동유럽 상상 여행

34. 1878-1885년 발칸, 반 오스만 봉기와 열강들의 횡포

딸기21 2014. 1. 24. 16:30

34. 1878-1885년의 발칸


187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반 오스만 투르크 봉기가 일어나자 세르비아는 오스만의 종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토를 늘릴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반 오스만 봉기는 또한 유럽의 열강들이 이른바 ‘동유럽 문제 Eastern Question’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지... 지금까지도 '서유럽'은 '동유럽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는 형국이니. 최근 벌어진 우크라이나 시위 사태가 그런 예이지요. '유로마이단(유럽) 시위'라 이름붙은 이번 시위는 동유럽의 우크라이나를 서유럽(정확히 말하면 옛 동구권도 포함된 유럽연합)이 끌어당기고, 반대편에서 러시아가 붙잡으면서 벌어진 사달이거든요.


아무튼 오늘날의 유로마이단 시위에서, 14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보지요.


1876년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 내 세르비아인들과 손잡고 오스만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오스만이 워낙 기력이 빠진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다른 계산들도 좀 있었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반 오스만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결국에는 자신들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속내였던 겁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Gravira Bajarski가 그린 1876-1878년의 세르비아-터키(오스만) 전쟁. /위키피디아


1876년 터키에 맞서 싸우던 세르비아 군인들. 이제부터 '사진'이 나오기 시작하네요. ㅎㅎ / 베오그라드 군(軍) 박물관 소장품



영국은 유럽 내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그대로 보전되게 만들려고 애쓰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오스만이 강할 때엔 어떻게든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오스만이 이렇게 갈갈이 찢기고 나면 '완충지대' 없이 러시아라는 세력과 맞부딪칠 위기가 됐던 거죠. 세르비아가 오스만에 승리를 하면 러시아가 전략적 요충인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합스부르크 역시 러시아가 발칸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는 걸 막고 싶었습니다. 합스부르크가는 자신들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세르비아를 억누르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손에 넣으려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장기판의 말 신세로군요.


결과부터 말하자면 세르비아는 오스만에 졌습니다(비록 산발적인 싸움이 1878년까지도 이어지긴 했지만 초반에 상황은 이미 정리가 됐던 것 같습니다). 이로써 복잡한 위기 국면은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겉보기에는요. 영국의 제안으로 이스탄불에서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열강들은 오스만에 서유럽 스타일의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도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여기서도 오늘날 터키를 대하는 유럽국들의 '민주화 압력'을 그대로 보는 것 같군요.


세르비아인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1876년 4월 오스만령 불가리아에서는 봉기라는 게 있었습니다. '4월 봉기'라 부르는 사건이죠. 하지만 불가리아인들의 봉기는 안쓰럽게도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전략도 없고 미숙했습니다. 엉성하고 무기도 부족한 반군들은 군중집회를 열어 애국심을 부추기는 노래를 부르고, 평화롭게 한 마을에서 잘 살아가던 무슬림 이웃들을 학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저질렀습니다. 


'이스탄불 회의' 이후, 1876-1877년의 불가리아. /위키피디아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고... 불가리아인들보다 훨씬 잘 조직된 투르크 군대가 재빨리 진압에 나섰다. 한 달도 되지 않아 투르크 군은 반군을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투르크 비정규 부대가 야만적인 보복공격을 해 불가리아인 1만5000명을 죽이고 반군이 있던 지역을 초토화시켰습니다.


투르크 군의 잔학행위들에 대한 소문이 불가리아 전체에 퍼지더니 나중에는 서유럽 언론들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영국에서는 벤저민 디즈레일리 Benjamin Disraeli 총리(1868년, 1874~80년 재위)의 친 투르크 정책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1877년 러시아가 불가리아인들에게 자유로운 민족국가를 세워줘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여론에 밀려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습니다.


러시아와 투르크의 전쟁에서 초반에는 러시아가 지지부진한 듯했지만 그해 말이 되자 투르크 군이 야전(野戰)에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1878년 2월 말 러시아군은 이스탄불을 목전에 두게 됐습니다. 바야흐로 러시아는 이 도시를 함락해 지중해의 항구를 확보한다는 제국주의적인 야심을 이뤄낼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스탄불이 어떤 도시입니까. 이스탄불이 넘어가면, 오스만이라는 옛 제국의 세력권이 러시아로 넘어간다는 뜻이죠. 영국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가 이스탄불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보스포루스 해협에 해군 함대를 보냈습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81년)


영국의 제국주의 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유대계 문필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갔으나 문학에 흥미를 느껴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1832년 정계에 진출했지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40년대 보호무역주의와 보수주의를 내세우면서 토리(보수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습니다. 


Earl of Beaconsfield, K.G. Photographed at Osborne
by Command of H.M. The Queen, July 22, 1878 / Harvard Art Museum


1868년부터 2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내면서 이집트 수에즈운하 주식을 사들여 동방으로 가는 무역로를 확보하는 등 제국주의적인 외교정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877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 해군을 파견했습니다.


영국의 방해 공작을 눈치 챈 러시아는 재빨리 오스만을 압박, 1878년 3월 산스테파노 San Stefano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오스만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1856년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통합돼 만들어진 루마니아도 완전한 독립을 얻어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 중부와 동부 유럽에 불가리아라는 거대한 꼭두각시 국가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된 예실쾨이(Yeşilköy)의 시메오노글루(Simeonoglou) 주택, 일명 '산 스테파노 하우스'/위키피디아



유럽 국가들은 이 조약에 반발했고, 그래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곧 조약을 손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강들은 그해 6월과 7월 베를린에서 만나 새로운 조약을 맺었습니다. 산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독립한 나라들은 그대로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러시아는 베사라비아를 차지했고 루마니아는 도브루자 지역을 조금 더 얻어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노비 파자르의 산자크 Sandjak 지방을 제 몫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조치는 세르비아를 몬테네그로와 갈라지게 만들어 '대 세르비아 국가'가 탄생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산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형성된 거대한 불가리아는 네 부분으로 나뉘었습니다. 첫째는 형식 상 투르크의 속령으로 남는 대신 선거로 선출된 대공의 통치를 받는 불가리아 자치공국이었습니다. 플로브디프를 수도로 하는 동 루멜리아는 술탄이 임명하고 열강들이 승인한 기독교도 총독이 통치를 하기로 했습니다. 트라케 서부와 마케도니아는 오스만의 직접 지배 하로 돌아갔습니다.



발칸 국가들은 열강들의 조약을 불만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대 불가리아 국가의 설립이 무산된 것에 불가리아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잃은 것을 반드시 되찾아와야만 한다는 생각이 불가리아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새로 출범한 불가리아의 자유주의 정부는 러시아의 지원 속에 성립됐고, 자치공국 정부 내 요직은 러시아가 모두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신생 불가리아 군대를 훈련시킨 것도 러시아인들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 큰 몫을 잃었다고 생각한 불가리아인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불가리아 민족주의 내부에 들끓고 있는 위험한 기류를 능숙하게 관리할 능력이 없었음이 곧 드러나게 됩니다.


합스부르크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빼앗긴 세르비아인들도 러시아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민족적 열망을 달성하는 데에 중요한 요지들을 불가리아에 넘겨주었다며 분노했습니다. 베를린에서 독립의 꿈을 인정받지 못한 그리스인들도 북부 국경지대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영토라고 생각되는 지역들을 얻어내기 위해 열성을 다했습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라는 세 발칸 민족들의 민족주의적 열망은 훗날 마케도니아에서의 폭력적 충돌로 이어집니다.)


이들의 갈등은 오래지 않아 물 위로 떠오릅니다. 1885년 바텐부르크 대공 알렉산두르1세 Aleksandŭr I Battenburg (1879-86년 재위)는 러시아의 강력한 저항에도 아랑곳 않고 동루멜리아를 불가리아 공국에 통합했습니다. 러시아는 화가 나 모든 자문관들과 각료들, 군 장교들을 불가리아에서 철수시켰습니다.


1885년 말 러시아의 부추김을 받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세르비아는 대 불가리아가 형성돼 마케도니아까지 넘볼까 두려워하던 차였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쉽게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영토를 얻어낼 것이라 여겼지만 불가리아인들이 오히려 슬리브니차 Slivnitsa 에서 세르비아 군을 몰아내고 세르비아 영토로 몰려들어왔습니다. 


합스부르크가 세르비아 편에 서서 개입하겠다고 위협한 뒤에야 간신히 불가리아 군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산스테파노 조약 8주년을 맞은 1886년 3월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1885년의 국경으로 되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