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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9세기, '민족주의의 시대' 동유럽의 변화

딸기21 2013. 10. 1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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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9세기-1918년 민족주의의 시대 PERIOD OF NATIONALISM


29. 1809년의 동유럽


어느새 시간은 흘러~ 흘러~ 19세기로 넘어옵니다.


2차, 3차 폴란드 분할이 이뤄지던 시기는 이미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나 서유럽의 정치문화에 격변이 오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과 함께 혁명군을 통해 확산된 자유민주 ‘국가(nation)’라는 개념은 사뭇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폴란드인들의 ‘국가’는 이제 갈기갈기 찢겨나갔지만 국가와 국경이라는 망할놈의 개념은 신성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 신성화는 국가라는 개념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인 동시에 ‘계몽’을 통해 퍼져나간 것이었습니다. 동유럽에서도 서유럽과 비슷한 양상의 정치적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밖에서는 모멸을, 안에서는 내분을 겪어온 폴란드 귀족 계급은 프랑스혁명에 내포된 민족주의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Napoleon Bonaparte (나폴레옹1세, 1804-15년 재위)이 급진적인 공화주의에서 출발한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민족주의-제국주의로 변화시키자,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 세력에 급속히 동조하게 됐습니다. 


예나 전투를 그린 19세기 그림.



1806-1807년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 Jena-Auerstedt 전투, 아일라우 Eylau 전투 등에서 잇달아 프로이센군과 맞붙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며, 영토를 빼앗은 프로이센·러시아에 맞선 봉기를 부추겼습니다. 1806년 예나에서 프로이센 군에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은 옛 폴란드 땅으로 진격했으며, 러시아 세력에 맞서 바르샤바에 사령부를 건설했습니다. 

프로이센의 패배에 흥분한 폴란드 귀족들은 민족주의적 감상에 한껏 고취됐습니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열강들 간의 분할로 사라진 대폴란드의 부활을 약속해주는 것처럼 행동했고요. 나폴레옹 군의 승리로 옛 폴란드 영토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행정적 영향력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은 1807년 프리틀란트 Friedland 에서 러시아 군을 격퇴하고 중·북동부 유럽에서 마지막 군사적 장애물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에게 틸지트 조약을 강요했습니다. 프로이센은 1차 분할 이후 폴란드에서 빼앗아 바르샤바 공국으로 삼은 땅을 나폴레옹에게 모두 내놓았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은 사실상 폴란드나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1세 Aleksandr I (1801-25년 재위)는 ‘폴란드’라는 이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어찌 됐든 러시아는 새로운 ‘바르샤바’ 국가의 독립을 공식 승인해야만 했습니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1세. 그림 위키피디아.

 

(요즘 읽고 있는 러시아사 입문서는 알렉산드르1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국내 및 대외정책에서 지나치게 망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불가사의한 차르', '스핑크스', '왕관을 쓴 햄릿'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극심한 자극에 직면하면 신하들과 적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강인함과 용기가 분출되는 사람이었다". 

혹자는 "알렉산드르는 지배하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지배받기에는 너무 강하다"고 평했다네요. 이런 표현도 있네요. "알렉산드르1세는 광범위한 개혁정책들을 궁리했고 일부를 시행해보기도 했지만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폴란드 귀족계급의 야망을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은 프로이센을 벗어나 이번엔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이니까요.

언제라도 반격에 나설 준비가 된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은 나폴레옹에게는 ‘다모클레스의 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제국의 장기적 이익을 생각하며 폴란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 항상 모호한 지원만 해줬습니다. 그저 그들이 독립의 기대감을 안고 프랑스에 충성심을 바칠 정도로만, 하지만 실질적으로 행동의 자유를 누리지는 못할 정도로만.
 

★ 다모클레스(Damokles)의 칼


다모클레스는 기원전 4세기 시라쿠사의 참주였습니다. 어느 날 디오니시오스 Dionysios 왕은 그를 연회에 초대해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칼 아래에 앉혔습니다. 참주라는 자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를 칼 밑에 있는 것처럼 위험한 자리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연설가 키케로는 이를 인용하며 ‘다모클레스의 칼’을 언제 닥칠지 모를 위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1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핵 전쟁 위험을 경고하면서 이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정치적 술책에서 나온 이런 환상은 유효했고, 폴란드라는 국가의 부활은 언제나 ‘다음번 전쟁에서 승리한 뒤’로 미뤄졌습니다. 그런데도 폴란드는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믿음직스러운 동맹국’ 프랑스를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1815년 워털루에서 패함으로써 폴란드인들의 기대는 무참히 어그러졌습니다. 그 3년 전 나폴레옹은 폴란드의 영원한 숙적 러시아를 공격하다가 쓰디쓴 패배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 때 상당 규모의 폴란드 군대도 나폴레옹과 함께 했습니다. 


지도/ 위키피디아



1813-14년 유럽 열강들이 연합군을 형성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나폴레옹 군대에 절망적인 패배를 안겼죠. 그 때 황제 곁에 가장 충성스럽게 남았던 것도 폴란드 부대였습니다.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이 엘베 섬에 유배돼 있을 때에는 개인 경호부대를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어쩜 좋아... 폴란드인들은 자신들의 우상이자 장차 국가적인 은인이 될지 모를 나폴레옹을 유럽의 황제로 다시 옹립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용감히 싸웠습니다. 워털루에서 숨진 이들 중에도 폴란드군이 많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군사 정복은 러시아 뿐 아니라 독일권 지역,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에도 결정적인 충격을 안겼습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아우슈테를리츠 Austerlitz 에서 프로이센·합스부르크·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이듬해 신성로마제국은 종말을 맞았습니다. 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을 내놓고 세습재산인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갈리시아를 다스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실로 축소됐습니다. 독일 지역에는 공고한 친 프랑스 '라인연합'이 형성됐습니다. 


합스부르크가가 1797년 획득했던 베네치아는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이탈리아 왕국으로 귀속됐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1809년 또 한 차례 바그람에서 프랑스군에 패한 뒤에 헝가리령 크로아티아였던 지역의 대부분과 합스부르크가 소유였던 슬로베니아는 일리리아 주(州)로 합쳐져 1809년부터 1813년까지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크로아티아의 수도가 된 자그레브의 19세기 모습. /위키피디아



그리고, 오늘날의 자그레브의 모습. swanky-hostel.com 이런 분위기, 바로 요런 모습, 제가 정말 좋아하는 도시의 풍경... 가보고시퍼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영토 대부분이 나폴레옹 치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프랑스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세례를 직접적으로 받게 됐습니다.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프랑스의 행정과 법체계, 그리고 언어가 여러 지역들로 전해져갔습니다. 프랑스는 길을 닦고 다리를 세웠으며 조림(造林)을 하고 땅을 개간하는 등 공공 노동 프로젝트들을 실시했습니다. 또 농노 해방과 토지 재분배 등 사회개혁에도 손을 댔습니다.

프랑스의 지배는 단 몇 년 동안만 지속됐고, 그나마도 반 크로아티아, 반 슬로베니아 성격을 띠었습니다. 프랑스는 이 지역들을 자국 땅으로 여겼지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크로아티아인들과 슬로베니아인들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혁명사상의 흐름 속에서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짧게나마 새로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정치문화를 스스로 경험하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다른 어떤 유럽사회보다 프랑스가 선구적이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까요.


합스부르크령 슬라보니아의 세르비아 이민자들을 통해 오스만 치하의 발칸으로도 민족주의 개념이 퍼져나갔습니다. 1804년 베오그라드 지역에서 봉기가 시작되더니 1815년에는 세르비아 전체에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됐습니다.


★ 나폴레옹과 프로이센의 전쟁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806년 10월)


프랑스 군대와 프로이센 군대가 작센의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맞붙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구식 군대를 격파했고, 그 결과 프로이센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비밀 동맹을 맺은 후 10월초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나폴레옹은 러시아 군이 합세하기 전에 엘베 강을 차단하고 프로이센군을 무너뜨렸습니다.


예나 전투를 기념해 지었다는... 파리의 다리. /위키피디아



아일라우 전투(1807년 2월)


나폴레옹이 첫 패배를 맛본 전투입니다. 아일라우(지금의 러시아 바그라티오노프스크) 근처에서 러시아·프로이센의 대군을 맞은 나폴레옹은 증원군을 기다리며 싸웠으나 눈보라로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패했습니다.


프리틀란트 전투(1807년 6월)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프리틀란트(지금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라는 조그만 마을에 몰아넣고 포탄 세례로 몰살, 아일라우의 패전을 설욕했습니다. 그러자 프로이센은 쾨니히스베르크를 포기한 채 틸지트로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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