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가 정점에서 밀려나 쇠락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국가를 떠받쳐줄 통합된 사회정치적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까지 폴란드는 내부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너무 힘이 강해져 왕실의 권위에 맞먹으려 했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귀족 집단들을 서로 통합할만한 실질적인 단일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랍니다. 저야 뭐 잘 모르지만서도...
1182년 웬치차 Łęczyca에서 열린 최초의 세임을 그린 그림. 1880년대 작품입니다. /위키피디아
귀족들의 회의체인 '세임 Sejm'은 ‘자유거부권(Liberum Veto)’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정책을 무산시켜 행정을 마비시키기 일쑤였습니다. 이 자유거부권은 귀족들이 나약한 왕실을 윽박질러 얻어낸 것으로, 세임에서 단 한 명의 귀족이 반대해도 정책이나 법안은 가결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정부는 아무 데도 없었을 겁니다. 별로 힘없는 귀족이 반대를 했을 때에는 그래도 무마시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유력 귀족이 반대하고 나서거나 외국 세력을 등에 업은 귀족이 반대표를 던지고 나오면 왕실이나 정부가 되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좌절한 바자 왕가는 1668년 폴란드 왕위를 스스로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왕위를 놓고 지루한 싸움이 일어나 18세기까지 분쟁이 계속됐습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유럽의 패권을 놓고 파워 게임을 벌이던 열강들은 폴란드 왕위를 자기들 간 세력 다툼의 지렛대로 삼았습니다.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 프랑스는 앞 다퉈 폴란드에 꼭두각시 왕을 세웠으며 자유거부권을 악용해 폴란드 귀족들을 사분오열시키고 상황을 각기 자신들에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 애썼습니다.
때로는 폴란드 왕이 무모한 정책을 추진해 제 발등을 찍으며 문제를 증폭시키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강한 왕’이라 불렸던 아우구스투스2세 Friedrich August, the Strong(1697-1733년 재위)입니다.
이 왕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면 호칭이 참 복잡합니다. 영어로는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1세 Frederick Augustus I 또는 강한 왕 아우구스투스2세 Augustus II the Strong 독일어로는 강한 왕 아우구스트2세 August II der Starke 폴란드어로는 August II Mocny 리투아니아 식으로는 아우구스타스2세 Augustas II...
왜 이러냐고요? 여기저기 얽힌 데가 많아서였겠지요... 당초에는 작슨 공 Elector of Saxony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1세였는데 나중에 폴란드 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아우구스투스2세가 됐습니다.
이분이 이름 많은 '강한 왕'.... 저런 머리는 작곡가들만 하는 게 아니었군요;; /위키피디아
아우구스투스는 스웨덴에 맞서 발트 해 연안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북방전쟁(1700-21년)이 일어났는데, 전투가 벌어진 곳은 폴란드 영토였다는 슬픈 사실.... 이거야말로 제 발등 찍는 걸 넘어서 제 살 파먹는 일이겠지요. 폴란드는 내륙까지 속속들이 황폐해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한때 쫓겨났다가 다시 왕좌로 돌아왔으나 국내 정치 상황은 더욱 악화됐습니다. 대체 뭐가 '강한 왕'이라는 것인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귀족들의 선거는 외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질됐습니다. 폴란드인들은 프랑스 왕 루이15세(1715-74년 재위)의 사위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스타니스와프 레진스키 Stanisław Leszczyński 를 선출했습니다. 그러자 친 스웨덴 입장인 레진스키가 폴란드 왕이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러시아는 합스부르크와 손을 잡았습니다. 합스부르크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을 선호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해 레진스키를 몰아내자, 열강들 사이에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5년)’이라 불리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1735년 러시아-합스부르크 연합 세력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1734년의 '단치히 봉쇄'를 그린 그림. 전쟁 장면인데 이렇게 이쁘게(?) 그리면 어떡하나요... /위키피디아
여기서 잠시 샛길로... 이 '단치히 Danzig'라는 도시 이름은 독일식 이름이고요.
우리에겐 레흐 바웬사의 '연대' 노조로 유명한 곳, '그단스크 Gdańsk'랍니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 위키피디아의 사진 콜라주 구경해보세요.
초콜렛 상자들을 이어놓은 듯한 저런 동네 꼭 가보고 싶어요 ㅠㅠ
러시아-합스부르크의 지원으로 즉위한 작센 공 아우구스투스3세(1734-63년 재위)는 폴란드에 별로 애정과 재산을 쏟지 않았습니다. 왕이 20여 년 간 무관심 속에 나라를 내버려두고 있는 사이 러시아는 폴란드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이 때문에 폴란드 귀족들 사이에 포토츠키 Potocki 일가를 중심으로 해서 반 러시아 감정이 고조됐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귀족 파벌인 차르토리스키 Czartoryski 가문은 러시아 세력을 뒤에 업고 귀족들의 반발 움직임을 내리눌렀습니다.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유거부권을 폐지했으며 중앙집권적인 정치개혁을 진행시켰습니다. 폴란드 왕권을 약화하기 위한 귀족 거부권이, 러시아를 뒷배에 둔 귀족 가문에 의해 폐지되는 역설이란.
1764년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러시아 예카테리나 대제의 지원 속에 포니아토프스키 Poniatowski 를 밀어 스타니스와프2세(1764-95년 재위)로 옹립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그가 러시아에 친숙할 뿐 아니라 꼭두각시로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 여겼던 것이겠지요.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폴란드를 계속 약소국으로 남겨두고 자기들의 공통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순순히 따르게 만들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한번은 스타니스와프2세가 막강한 뒷배인 러시아의 뜻을 거슬러 독립적으로 행동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차르토리스키 가문이 주도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도화해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겁니다.
그러자 러시아가 폴란드를 공격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발트 연안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 희생을 치르게 될까 두려웠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예 열강들이 폴란드를 분할, 구획을 정해서 각각 직접 통치를 하자는 제안을 내놨습니다.
1772년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 제국 간에 합의가 이뤄져서 러시아는 벨라루스와 폴란드령 우크라이나를, 합스부르크가는 갈리시아를, 프로이센은 서프로이센과 단치히(그단스크) 시의 일부를 나눠 가졌습니다. 이른바 ‘1차 폴란드 분할’입니다. 이를 통해 폴란드는 세 조각으로 나뉘었습니다.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국민들이 세 제국의 치하로 들어갔습니다.
폴란드는 분할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지만, 폴란드인들은 뒤늦게나마 정치 개혁에 나섰습니다. 1791년 세습군주제를 규정한 새 헌법이 반포됐습니다. 새 헌법은 왕실에 행정 권한을, 세임에는 입법 권한을 주되 귀족들의 자유거부권은 폐지했습니다.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도 이 개혁을 용인했습니다.
러시아는 반대하면서 폴란드를 공격했지만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는 걸 두려워한 프로이센이 군사적 반격에 나섰습니다. 더 이상의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또 한 차례 거래가 이뤄졌습니다. 희생물은 다시 폴란드였습니다.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이 이뤄졌습니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리투아니아였던 지역과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챙겼습니다. 프로이센은 단치히와 대폴란드 지역을 가져갔습니다. 게다가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와의 ‘제휴’를 강요당해, 그나마 남은 영토에 러시아 군대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허용해줘야 했습니다. 폴란드의 외교도 러시아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두 차례 분할이 이뤄질 때가 되자 서유럽의 민족주의 개념이 폴란드 귀족들 사이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2차 분할이 실시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국민적인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러시아와 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타되츠 코슈츠코 Tadeusz Kościuszko가 이끄는 반란군이 영웅적으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코슈츠코는 사로잡혔고 바르샤바는 러시아군에 함락됐습니다.
1795년 ‘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남은 땅과 우크라이나, 쿠를란트를 장악했고 프로이센은 마조비아와 바르샤바를 손에 넣었습니다.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은 1793년 2차 분할 때에는 새 영토를 챙기지 못한 터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소폴란드의 남은 땅을 제 몫으로 가져갔습니다. 폴란드는 이제 더 이상 독립국가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2세(프리드리히 대제)
18세기 화가 Bernhard Rode가 그린 프리드리히 대제. /위키피디아
이 글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프리드리히2세는 눈길 끄는 인물이죠. 프로이센의 세 번째 국왕으로 1740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국가 경영 능력도 뛰어나, 후발국가인 프로이센을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게다가 문화적, 예술적인 재능까지 겸비하고 있어 ‘계몽 전제군주’의 표상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데어 그로쎄(der Große)’ 즉 ‘대왕’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왕이 되기 전에는 독재자였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밉보여 왕궁에서 가출하기도 했고, 이 때문에 교도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아이는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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