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15. 갈라진 교회, 찢어진 발칸

딸기21 2012. 11. 1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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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2세기 말의 발칸 반도


(한 달 넘게 딴짓하고 있다가 다시 동유럽 얘기하려니 좀 뻘쭘하네요 ^^;;)


'혼란' 아닐 때가 거의 없어보이는 발칸, 11세기에 이르자 더 큰 파도가 몰아칩니다. 이른바 '대분열'이 일어난 것이죠하나로 통일돼 있던 유럽 교회는 1054년에 서방의 로마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갈라졌습니다. 


이 분열에는 여러 측면이 있었습니다. 수백 년에 걸친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총대주교 간의 종교적 권위 다툼이 겉으로 드러난 종교적인 요인이지만 실상은 비잔틴 제국과 신성로마제국 사이에서 계속되어온 싸움의 결과였습니다. 즉 세속 권력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의 절정이 교회의 대분열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싸움의 전장 격인 '기독교 세계'는 말로만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였습니다. 


표면에 드러난 것은 종교 문제였지만 대분열은 동서 간의 문화적 결별에 도장을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양측에 오랫동안 쌓여온 정치적 반목과 민족적, 종교적 독선으로 인한 분열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죠. 그나마 강력했던 비잔틴 제국(마케도니아 왕조)은 바실레이오스2세 이후 급격히 쇠락했고, 뒤를 이은 후계자들은 나약하기만 했습니다. 황제의 권위가 무너지자 그러자 테마타(지방행정단위)에 기반을 둔 지방 군사귀족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맞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11세기 중반에는 내전이 일어나 군벌들이 돌아가며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혼란은 콤네누스 Comnenus 가의 장군 알렉시우스1세 Alexius I Comnenus (1081-1118년 재위)가 혁명을 일으켜 안정적인 왕조(콤네누스 왕조 1081-1185년)를 세울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콤네누스 가


11세기 중반부터 한 세기 넘게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왕가입니다. 콤네누스 가의 시조 격인 인물은 마누엘 에로티쿠스 콤네누스 Manuel Erotikus Comnenus 장군으로, 바실리우스2세 황제 때 동방 전선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알렉시우스1세. /위키피디아


그의 아들 이사키우스1세가 1057년 황제에 올랐으나 재위기간이 3년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이사키우스의 조카 알렉시우스1세(1081~1118년 재위) 때 콤네누스 왕조가 막을 열었고 뒤를 이어 요한네스2세, 마누엘1세, 알렉시우스2세가 차례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한 뒤 콤네누스 일족인 알렉시우스와 다비드는 터키 북동부로 옮겨가 트레비존드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왕국은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멸망했습니다.


알렉시우스 덕에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제국이 이렇게 흔들릴 때 밖에서 그냥 둘 리 있나요. 이탈리아로 밀려 내려온 노르만족과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투르크족 양측이 덤벼와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1071년 비잔틴은 이미 이탈리아 내의 마지막 보루를 잃었고, 같은 해 만지케르트 Manzikert 전투에서 셀주크에 대패해 아나톨리아까지 투르크족에 넘어갔습니다. 비잔틴, 즉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핵심인 이탈리아와는 이제 작별하게 됩니다.

알렉시우스는 사법 개혁과 재정개혁 등을 추진해서 지방 군사령관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동시에, 정교회 고위 사제들을 부추겨 지방 군사령관들을 견제하게 만들었습니다. 1085년에는 발칸을 노리고 쳐들어온 노르만족을 몰아냈습니다. 옛 불가리아 땅에서 1086-91년의 보고밀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것도 진압했습니다. 또 다뉴브 남쪽에 1091년 쳐들어온 쿠만족을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셀주크를 몰아낼 군사적 역량까지는 없다는 걸 알렉시우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를 그린 15세기의 그림. 만지케르트는 오늘날의 터키 동부에 있는 지명입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비잔틴은 동방에서 온 유목집단 투르크에 절절 매는 처지가 됐지요. /그림 위키피디아



알렉시우스는 그래서! 서방의 로마 교황 우르바노2세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알렉시우스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십자군 병력이 발칸을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몰려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로 진격해 무슬림 투르크족에 빼앗긴 신성한 땅을 되찾겠다고 했지만 규율도 제대로 없는 병사들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 비잔틴 제국을 짓밟으며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알렉시우스는 십자군의 제국 체류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빨리 아시아로 향하게끔 하려고 애를 썼으나 비잔틴령 발칸 땅이 십자군에 짓밟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강추. 정말 쉽고 흥미진진합니다.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도 읽어볼 만 합니다. 십자군 전쟁에 국한된 내용은 아니지만 토마스 이디노풀루스의 <예루살렘>도 재미있어요.

기본적인 팩트 중심으로 된 토머스 F. 매든의 <십자군>도 꽤 괜찮았고요.


제국이 십자군 전쟁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 1185년 불가리아가 다시 독립을 했고 세르비아에서는 1196년 새로운 강력한 왕조가 생겨났습니다. 1185년 블라흐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페투르와 이반 아센 Ivan Asen (아센1세) 두 형제가 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초반에는 비잔틴 군에 밀려 다뉴브 북쪽으로 쫓겨났지만 1186년 쿠만족 부대를 이끌고 반격해왔습니다. 이사키우스 앙겔루스 Isaacius II Angelus (이사키우스2세.1185-95년 재위) 황제는 결국 휴전조약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다뉴브 강과 발칸 산맥 사이의 땅이 두 형제에 넘어갔습니다. 1189년 이반 형제는 이번에는 비잔틴 제국을 깊숙이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앙겔루스도 그들의 땅을 보복 공격했지만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틴 군을 손쉽게 물리치고 황제가 불가리아 독립국(2차 불가리아 제국)을 승인하게 했습니다. 한동안 숨죽여 있던 불가리아, 세르비아가 다시 제국 안에서 솟아난 것입니다.


불가리아는 내홍 속에서도 잘 나갑니다. 이반은 1196년, 페투르는 이듬해 각기 아랫사람들 손에 살해됐고 형제의 막내 동생 칼로얀 Kaloyan (1197-1207년 재위)이 뒤를 이어 왕이 됐습니다. 칼로얀은 1201년 비잔틴 제국과 화해협정을 맺고 세르비아, 헝가리 쪽으로 공격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군사작전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불가리아 서쪽 국경이 멀리 확장됐습니다.


칼로얀 시대에 다시 전성기를 맞은 '2차 불가리아 제국'입니다. 
아래 쪽 에피루스 공국(Despotate of Epirus)은 1204년 십자군이 도둑놈으로 변신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세워진 비잔틴인들의 서글픈 나라랍니다. 
폐위된 비잔틴 황실 출신인 미카일 앙겔루스 두카스가 세웠고, 1337년 무너질 때까지
십자군에 맞선 비잔틴 투쟁의 중심이 됐습니다. /지도 위키피디아



이 시기 세르비아에서는 라슈카의 지역 주판(zupan·지방 지도자)이었던 슈테판 나만야 Stefan Nemanja (슈테판1세·1167-96년 재위 추정)가 부족 세력들을 규합, 정교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는 불가리아에서 넘어온 보고밀 이단교파를 탄압, 보스니아로 쫓아냈습니다.


슈테판은 비잔틴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선언하고 제타의 옛 세르비아 세력과 협력해 서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늘렸습니다. 하지만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그는 1196년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 아들 성 사바가 세운 아토스 산의 힐란다르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번갈아 점령당했던 분쟁의 땅 보스니아는 12세기 후반 쿨린(1180-1204년 재위 추정)이라는 인물의 지휘 아래 독립 국가를 세웠습니다. 쿨린은 명목상으로는 헝가리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총독 지위에 머물렀지만 보스니아 은(銀) 광산에 대한 통제권을 차근차근 되찾았고 두브로브니크를 통해 교역을 하면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또 세르비아와 달리 보고밀교를 묵인하며 가톨릭과 정교의 영향력을 견제했습니다.


보스니아를 노리던 가톨릭계 헝가리와 정교를 신봉하는 세르비아 세력은 모두 쿨린과 그 일가가 보고밀파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쿨린이 헝가리-크로아티아계의 영향력 하에서 가톨릭을 받아들였던 보스니아를 보고밀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을 선동했습니다.


하지만 쿨린은 그들의 술책에 넘어가기엔 꽤나 영민한 인물이었던가 봅니다. 교황 이노켄티우스3세가 부추김에 넘어가 십자군을 보내 공격을 가하려 하자, 쿨린은 곧바로 "가톨릭을 신봉한다" 선언하고 보고밀파를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보스니아에 가톨릭 회의를 창설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쿨린의 겉다르고 속다른 조치 속에서 보스니아 민중들 사이에서는 보고밀교가 계속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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