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토머스 F. 매든. 권영주 옮김. 루비박스
십자군에 대해 별반 관심 없는데, 어찌어찌 집에 이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심심풀이 삼아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미가 있고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해서 쑥쑥 넘겼다. 책 원제는 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인데 한글판에 부제를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로 달아놨다.
제목 장난질이야 흔하다 해도, 이 경우는 좀 심했다. 요즘 ‘이슬람 바로보기’ 같은 흐름이 분명히 있는데 2005년 출판된 책에서 겨우 이따위 19세기 풍의 부제를 달아놓다니. 이 책은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저자가 제목에서 표현한대로, 십자군 역사를 충실하면서도 컴팩트하게 정리해놓은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이다. 인물평이라든가 전설 따위는 사건 이해에 필요한 정도로만 최소화시켰기 때문에 이 책에선 로망스 같은 것은 냄새도 맡기 힘들다. 전설에서 ‘팩트(fact)’를 가려내 당대의 ‘사실(史實)’ 중심으로 접근한 것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자 특징인데, 저 부제는 완전히 책의 이미지를 구기고 있다.
역사를 볼 때 누구의 ‘편’에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본질적인 문제다. 십자군을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 유럽과 이슬람 사이의 십자군 전쟁은 분명 유럽이 ‘일으킨’ 것이지만 일방적인 침략 작전 혹은 어느 한쪽이 가해자(이득을 얻은 자)이고 어느 한쪽이 피해자(손해를 입은 자)인 것은 아니었다.
이 오랜 전쟁은 유럽이 일으킨 것이고,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두고두고 미쳤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어쨌거나 유럽은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했고, 다만 이슬람의 유럽 완전정복을 막아냈을 뿐이었다. 유럽은 많은 것을 잃었고(경제적으로 유럽은 손해를 봤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싸움에서 졌지만 십자군의 감수성은 이베리아 반도의 리콩키스타 등으로 나타나는 등 오랜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아랍국과 뒤이은 투르크제국 등 이슬람권에게 십자군 전쟁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며, 심지어 십자군 전쟁이란 용어를 아는 이들조차 드물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 지도자 살라딘을 부각시킨 것은 오히려 월터 스콧 같은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이었고, 아랍인들에게 살라딘은 19세기 혹은 20세기까지도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그저 수많은 전쟁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 어떤 성스런 의미가 있는 대단한 전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마도 이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 십자군 전쟁에 맞서야 했던 것은 이른바 ‘근동’ 지방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쪽이었을 뿐이지 이슬람제국의 내륙이었던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는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니까.
따라서 저자가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유럽인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에게는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이슬람권에는 그저 그런 전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서구지상주의라는 오해를 유발할 소지가 많은 저 부제(저런 식의 ‘십자군전쟁론’이 아직도 통용된다면 유감스럽다)와는 달리, 저자의 시각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눈으로 십자군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눈으로 본다고 해서 유럽과 십자군 전쟁을 무작정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바보 같은 학자는 아니다. 그저 유럽인들의 눈으로 봤을 때 그 전쟁은 이러저러한 전쟁이었음을 설명하는 데에 치중할 뿐, 무식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이슬람 식으로 남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서술 자체는 무미건조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럽의 눈’으로 보되 ‘당대인의 시각’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입성 후의 혼란 속에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다수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살 수 있었거나 성밖으로 추방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예루살렘의 거리마다 무릎까지 차오는 피바다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과장이었다. 중세 사람들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80쪽)
재미난 지적이다. 저자는 중세인에게 십자군 전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설명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종교의 시대’에 ‘성전(聖戰)’의 의미가 대단히 컸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한다. 맑스주의 역사관이 퍼지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십자군 전쟁을 ‘경제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강했지만, 이는 온당치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맑스주의 영향을 받은 서양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이들이 유산 혹은 봉토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의 둘째 아들이나 기사 계급 실업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당대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봤을 때에 십자군 전쟁은 분명한 성전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반론이다.
십자군은 스콧 같은 소설가들이 바라본 세련된 아랍 군주와 과격한 유럽 기사의 싸움도 아니었고, 19세기 민족주의자들이 예찬했던 것 같은 ‘유럽의 로망스’도 아니었으며, 20세기 좌파들이 말하는 것 같은 ‘유럽 실업자들이 벌인 싸움판’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기독교 유럽인들의 성전이었지만 후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해석의 변화를 거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저자의 말대로 철저히 ‘유럽의, 유럽에 의한, 유럽을 위한’ 전쟁이었던 십자군의 진실을 지금에 와서 파헤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서문은 역시나 9·11을 끌어당기고 있다. 유럽은 중세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근세 이후 십자군 전쟁의 재판(再版)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니까 이슬람도 거기 맞선 성전을 일으켜 십자군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오사마 빈라덴 류의 시각이다.
십자군 전쟁을 끌어다 이리 붙이고 저리 둘러대는 세력이 많고 그들 사이에 싸움(테러가 됐든 ‘테러와의 전쟁’이 됐든)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21세기 지구인 모두를 둘러싼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전쟁이었으며 별나게 멋진 전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달리 저질스런 전쟁도 아니었다, 20세기 시리아와 이라크 독재자가 뒤늦게 살라딘 흉내를 냈었지만 실상 아랍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왔다,
십자군 전쟁이란 말이 모종의 은유로 통용되고는 있지만 역사는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낭만도 증오도 모두 일단 가라앉히고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책은 문체가 냉랭해 재미가 없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흥미로웠다. 저자가 뒤에서 혹평을 하고 있는 제임스 레스턴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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