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편집보다 내용이 알찬 <보스니아 역사>

딸기21 2007. 10. 6. 22:44
728x90

보스니아 역사 

김철민 (지은이)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05-04-10





보스니아 역사에 대해 충실히, 교과서적으로 중세부터 최근(2005년)까지를 설명하고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됐다. 


발칸을 비롯한 동유럽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사실 옛 유고연방의 내전은 참 ‘이해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그 지역 상황이 비상식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게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그렇게 민족적, 종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나, 어째서 그들은 티토 치하 수십년간의 한 나라 경험에도 불구하고 냉전 끝나자마자 갈라졌나, 어째서 그들은 한때 한 나라 국민이었는데 그렇게 격렬하고 잔혹한 내전과 인종청소를 자행하게 되었나. 


의문은 많았지만 그들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 답답했다. 그들의 내전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은 너무나 끔찍했고 내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 문제는 복잡하기 그지없어서 웬만해서는 해석을 내리기도 힘든데, 정작 구체적인 과정과 전사(前史)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아주 훌륭한 참고서다. ‘보스니아 역사- 무슬림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보스니아 무슬림에 국한하지 않고 옛 유고연방 지역의 전반적인 역사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험난한 산악지형 때문에 중세 가톨릭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데다 비잔틴마저 강력한 성직자-종교통치 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오스만제국이 밀고 들어오자 믿음이 약했던 보스니아 지도층은 쉽사리 이익을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오스만 하에서 지배층 자리를 유지했던 무슬림들은 19세기 오스만의 국력이 떨어지고 발칸에 민족주의 바람이 몰아치자 정교 계통(세르비아계) 민중들의 반발에 부딪쳤다는 것,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20세기에까지 파장을 미쳤다는 것.


사건들을 좀 빡세다 싶게 많이 나열하면서도 그 사건들의 역사적 의미와 이후 영향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때문에 재미가 있었다. ‘민족국가’를 만드는 동력이 됐던 서유럽 민족주의와 달리 독립국가를 형성해 잘나가본 경험이 적은 동유럽 민족주의는 유달리 신화적(고대지향적, 영웅중심) 색채를 띠었다는 분석도 재미있다. ‘국가’라는 틀과 무관하게 흘러간 남슬라브의 이런 문화적 민족주의는 종교를 중심으로 민족들간 차이를 확대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20세기 역사는 사건들이 많아 아주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티토 치하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만 유고에 대한 미국의 지원 부분은 처음 듣는 것이라 재미있었다. 보스니아 내전과 그 뒤처리 과정도 사건들 중심으로 컴팩트하게 정리돼있고, 파장과 문제점 등에 대한 설명이 충실한 것도 좋았다. 


다만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잘 설명해놓고는 있지만 문장이 좀 꼬여있다는 것. ~를 제공했다, ~를 부여했다는 식의 중언부언이 많고 ‘정당성’ ‘인종청소’ 등의 용어를 남발하고 있다. 인종청소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뒷날 누구누구의 인종청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식의 표현은 백번 가감하고 들어도 용납하기 힘들다. 심지어 ‘인종청소라는 미명하에’ 라는 문구도 보았는데, 세상 어떤 가해자들도 자기네가 인종청소 하고 있다고 내세우진 않는다. 인종청소는 어떤 경우에도 ‘미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95년의 데이튼 합의안이 효력을 본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각 민족계파들이 자행한 인종청소를 통해 민족들간 분포양상이 비교적 정리됨으로써 수월한 분리 기반이 마련되게 되었다”고 써놨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는지는 몰라도 ‘인종청소의 효과’를 저렇게 서술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인종청소에 찬성할리는 없겠지만 좀 무신경한 표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책들은 특징이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가 대개 한국외대 교수 혹은 강사들이기 때문에, 문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소설가가 아닌 학자들이니, 그들에게서 ‘지식’을 넘어선 유려한 문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정말 편집이 끝내준다는 것이다. 서울대출판부,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책들도 얼핏 보니 비슷비슷하던데, 디자인 개념을 철저히 무시한 단순무식한 편집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세 번째 특징은, 오히려 그래서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알짜배기 교과서가 될 수도 있다는 점. 이 책이 그렇다. 디자인이 검소하고 조악한 대신 쓸데없이 하드커버에 줄 간격 글자크기 펑펑 키워 비싸게 받아먹는 책들보다 훨씬 소박하고 알차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