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14. 동유럽을 가득 채운 '독립국가들'

딸기21 2012. 9. 24. 14:41
14. 11세기 중반의 동유럽

11세기 중반이 되면 역사상 처음으로 발트 해안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동유럽 세계에 독립 국가들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들 국가들 중 크로아티아와 제타(Zeta) 같은 몇몇 나라는 아주 잠깐 동안 존재했을 뿐이지만 훗날 19-20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일었을 때에 건국의 '역사적 근거'로 인용되곤 했지요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체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비잔틴(그리스).... 나라마다 복잡한 사정이 있고 내분이 일어나고 지배자가 바뀌고, 또 나라들끼리 싸우고 점령하고... 복잡하게 전개되던 11세기였습니다만, 핵심은 이 겁니다. 이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동유럽 여러 나라의 틀이 만들어졌다는 것.

폴란드에서는 ‘용맹왕’으로 불렸던 볼레스와프1세가 후예들에게 발트 해에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 서부까지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남겼습니다. 이 왕국은 가톨릭과 봉건영주 시스템을 두 축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가톨릭 교회 조직과 민간·군사부문 모두를 장악한 성주들의 행정체제로 결합돼 있었던 겁니다.

볼레스와프1세는 보헤미아-모라비아와 키예프 루시를 침공했지만 반짝 승리를 거두는 데에 그쳤고, 지난번에 얘기했던 대로 그가 죽은 뒤 10년 동안 왕위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또한 왕실과 지배계급은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신앙을 버리지 않은 부족세력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반(反) 가톨릭 저항을 산발적으로 해봅니다만, 이미 대세는 가톨릭... 어찌 됐든 폴란드라는 나라는 갈팡질팡 하면서도 볼레스와프1세가 만들어 놓은 통일을 유지하긴 했습니다

이 내부적 통일을 지키는 데에 가장 큰 몫을 한 사람은 ‘회복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카지미에슈1세 Kazimierz I (1038-58년 재위. 영어로는 Casimir I the Restorer, 폴란드 식으로는 Kazimierz I Odnowiciel) 입니다. 카지미에슈1세는 혼돈 속에서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세우고 국가 질서를 회복했습니다.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해낸 카지미에슈1세..
뒷날 폴란드가 독립을 잃었을 때에 부흥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죠.
이 그림은 브로츠와프(Wrocław) 박물관에 소장된 19세기 말 작품입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카지미에슈1세가 나라를 다독이는 사이,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던 귀족계급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라의 통합과 '강력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국왕을 몹시도 견제했고, 끝내는 '대공' 지위까지 빼앗았다고 합니다. 귀족들, 그리고 귀족들과 결탁된 가톨릭 사제 계급은 군주를 압박해 양보조치를 얻어냄으로써 왕권에 타격을 입히는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헝가리의 '황금 황소'보다도 오히려 더 앞서서 귀족들이 군주를 누른 예가 폴란드였던 셈입니다.

폴란드에서 잠시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해볼까요.

폴란드의 서쪽에는 대(大)모라비아라는 나라도 있었지요. 이 나라는 헝가리를 일으킨 마자르족이 다뉴브 분지에 나타나면서 무너졌고, 대모라비아 땅의 상당부분이 헝가리와 폴란드에 먹혔습니다. 나머지 일부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이 군사적 팽창을 거듭하면서 그 제물로 바쳐졌지요. 보헤미아에서는 프제미슬 가문이 프라하에 수도를 두고 체코계 국가를 이어갔고요.

체코인들의 나라, 즉 보헤미아의 행보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보헤미아의 성 벤체슬라오’로 알려진(영어권에서 널리 불리는 크리스마스 캐롤 중 ‘착한 왕 벤체슬라우스(Good King Wenceslas)’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의 주인공이 이 왕입니다) 성 바츨라프1세 Wenceslaus I(929년 사망 추정)가 통합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톨릭 세력과 이교도 부족세력 간 분열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영어로는 벤체슬라우스 Saint Wenceslaus I, Duke of Bohemia 라고 씁니다만, 체코식으로는 바츨라프 Václav ... 이쪽 동네 고유명사 제대로 적기 넘 힘들어요...)

★보헤미아의 ‘선한 왕 벤체슬라우스’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보리보이 Borivoj 왕과 아내 루드밀라 Ludmilla 였습니다. 보리보이의 아들 라티슬라우스 Ratislaus 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왕위를 이은 것은 큰아들 벤체슬라우스였습니다. 벤체슬라우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귀족계급의 반발 속에서도 친기독교 정책들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축일을 맞아 축제에 갔다가 왕위를 노린 동생 볼레슬라우스 Boleslaus 에게 살해됐습니다. 볼레슬라우스 뒤에는 벤체슬라우스에 반대하는 귀족계급들이 포진해 있었고요.

전설에 따르면 벤체슬라우스는 숨지면서 "사랑으로 동생을 용서한다"고 외쳤다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보고 성인으로 추앙했습니다. 벤체슬라우스는 슬라브계 최초의 가톨릭 성인이 됐다 합니다.


2006년 체코의 추기경이 성 벤체슬라우스의 두개골을 옮기는 행사를 하고 있네요. /위키피디아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볼레슬라우스1세 Boleslaus I (929-967년 재위. 덕택에 '잔인한 볼레슬라우스' Boleslaus I the Cruel 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치하에서 왕실의 권위가 일시적으로나마 강해져 부족지도자들을 누를 수 있었지만, 보헤미아는 곧 시들시들해졌고 이내 신성로마제국의 종속국으로 전락했습니다.

뒤를 이은 볼레슬라우스2세(967-999년 재위)는 마침내 보헤미아에서 가톨릭의 승리를 이뤄내고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지원, 마자르족과 폴란드인들을 개종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폴란드의 ‘용맹왕’ 볼레스와프1세와 끊임없이 경합해야 했습니다. 볼레슬라우스 사후에는 잠시나마 볼레스와프1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폴란드와 헝가리와 체코는 끊임없이 경쟁하는 이웃들이라 할까요. 1991년에 '비셰그라드 그룹'이라는 걸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자유무역지대를 결성하기도 하고, 동유럽 무너진 뒤에 나란히 유럽연합에 가입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소하게 영토분쟁을 하고...) 

10세기 내내 혼란을 겪은 보헤미아. 한동안 보헤미아와 신성로마제국에 눌려 있던 폴란드인들이 이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11세기가 되자 폴란드에서는 ‘복원왕’ 브제티스와프1세 Bretislav I(1034-55년)가 집권하면서 왕권이 되살아나 영토를 회복합니다. 

보헤미아가 위기에 몰릴까 깜짝 놀란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3세(1039-56년 재위)는 폴란드로 밀고 들어가 브제티스와프를 압박하고는, 점령지들을 내놓고 종속국 지위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헝가리도 보헤미아처럼 격동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스트반1세가 1038년 숨진 뒤 내부가 불안정해졌고, 여기서도 새로 개종한 가톨릭계와 이교 신앙을 간직한 전통 세력의 갈등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습니다. 헝가리를 지배한 아르파드 집안은 분파별로 갈라져 왕위 다툼을 벌였고 일부 파벌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게르만 세력을 끌어들였습니다. 

헝가리의 왕권 분쟁에 끼어든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3세는 이스트반의 조카이자 베네치아 총독이던 피에트로 오르세올로에게 충성서약을 받고 그가 왕이 되도록 밀었습니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1038~41년과 1044~46년 헝가리 왕으로 군림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가톨릭 세력에 반대하는 전통 부족지도자들의 반란에 밀려 결국 축출됐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멋대로 앉힌 이 왕은 헝가리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국민들 사이에서 '베네치아인'이라 불렸답니다. 

뒤이어 진짜 헝가리 사람인 안드라스1세가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인리히는 헝가리를 아예 직접 통치하려고 세 번이나 군사공격을 하지요. 그러나 안드라스는 이걸 모두 막아냈고, 하인리히는 결국 1058년 헝가리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보헤미아'는 체코를 가리키는 옛이름이기도 합니다만, 지리적 개념이기도 하죠. 

오늘날 체코의 3분의2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과거 '보헤미아'로 통칭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사진은 위키에서 퍼온 체코 카를로비 바리 Karlovy Vary의 모습... 

이 곳,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해보세요. 끝내주네요!



배경을 잠시 옮겨서... 비잔틴으로 가볼까요.


11세기 ‘불가르 학살자’ 바실레이오스2세 치하에서 비잔틴은 다시 한번 발칸을 지배했습니다. 불가리아는 1014년 무너졌고 4년 뒤 비잔틴 제국에 완전히 통합됐습니다. 불가리아의 영토는 행정적, 군사적 '테마타'들로 나뉘어졌습니다. 테마타는 themata 라고도 하고 테마 theme 라고도 하는데요. 비잔틴 제국의 행정단위이자 군사적 편제 단위입니다. 테마타의 사령관과 장교들이 행정·군사 업무를 총괄했고, 불가리아의 예전 귀족계급은 비잔틴의 편제로 흡수돼 그들을 도왔습니다.


11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의 테마타들. /위키피디아


★페테르 델리얀의 반란

비잔틴 행정체계, 특히 과세제도가 가혹했던 탓에 1040년 페테르 델리얀 Peter Delyan 이 이끄는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델리얀은 스스로를 차르(황제)로 선언하고 중·북부 발칸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티호미르 Tihomir 라는 경쟁자와의 권력 다툼 때문에 지도력이 약화됐고 이듬해 비잔틴 군에 격파됐습니다.


왼쪽부터 델리얀, 티호미르, 그들을 지지한 불가리아인들.



델리얀 시대는 '1년 천하'로 끝나고, 곧 이어 1048-1054년 페체네그족이 쳐들어와 옛 불가리아 북동부 지역을 약탈했습니다. 그 사이 민중들 사이에서는 보고밀 종파의 선동이 호소력을 얻으면서 반 비잔틴 감정이 고조됐습니다. 이래저래 민중들은 살기 힘든 시대였던 모양입니다.


발칸 북서부에서는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이 각각 나라를 세웠습니다. 크로아티아는 로마가톨릭을 받아들였으나 독립된 주교 관구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크로아티아가 보스니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도 있었지만 북쪽에서부터 남진하고 있던 마자르족과 남쪽 아드리아 해안을 공략해오는 베네치아 세력 때문에 방해를 받았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옛 불가리아 지배층을 통해 정교를 받아들였습니다. 11세기 중반 그들은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제타 위쪽의 고지대에 자신들만의 작은 나라를 세워 굳건히 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