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13. 갑자기 떠오른 폴란드

딸기21 2012. 9. 19. 13:02

13. 10세기 말~13세기 폴란드의 흥기


폴란드 민족은 963년 '갑자기' 역사의 전면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게르만계 유럽 세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잘 조직된 슬라브 국가를 만들어 짠! 하고 나타난 양상이었다고 할까요.


이 새로 뜬 나라를 다스린 것은 미에슈코1세 Mieszko I(960-992년 재위 추정)라는 부족 지도자였습니다. 미에슈코의 직책은 ‘피아스트(piast)’ 즉 부사령관이었지만 그 집안이 성공적으로 여러 부족집단들을 다스렸기 때문에 피아스트라는 말이 신생 폴란드 국가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됐다고 합니다.


17세기 초반에 그려진 미에슈코1세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명민한 미에슈코는 자신들이 이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 게르만 세력으로부터 더욱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신성로마제국이 선교를 명분으로 폴란드 땅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 한다는 것을 곧 알아챘습니다. 당시 폴란드 주변에는 개종으로 덕을 본 슬라브계가 이미 있었지요. 바로 보헤미아, 즉 오늘날의 체코계입니다. 미에슈코는 이들을 중재자로 삼고 교황청과 협상에 나섭니다. 965~966년 폴란드는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미에슈코를 그린 그림 중에는 기독교도였던 부인 덕에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보여주는 것도 있던데... 정말 그 이유에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해서 폴란드는 신성로마제국의 압력 속에서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중세 서유럽 세계에서 세속권력을 영구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황제와 교황 간, 세속권력과 종교권력 간에 다툼과 견제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고요. 이 때문에 교황청은 황제에 맞서 신성로마제국 동부 지역에서 동맹세력을 확보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폴란드가 독립국가로 살아남도록 지켜주는 한편, 폴란드의 충성심을 더 많이 이끌어내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1000년 무렵 교황청 직속의 대주교 관구를 신설해 준 겁니다(가톨릭이 뿌리박힌 폴란드에서 훗날 요한바오로2세라는 교황이 탄생하지요 ㅎㅎ). 폴란드에서는 신성로마제국 교회조직의 영향력이 사라졌습니다. 폴란드 대주교좌가 있는 그니에즈노 Gniezno는 피아스트 왕실의 수도가 됐습니다.


그니에즈노... 작고 예쁜 도시네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는 크라쿠프로 옮겨갔습니다...



창업자가 나라를 세우면 훌륭한 아들이 뒤를 이어받아 땅을 넓히지요. 미에슈코의 아들인 ‘용맹왕’ 볼레스와프1세 Bolesław I (992-1025년 재위)가 폴란드에 안정적인 통치 구조를 정착시킨 사람입니다.


(잠시 샛길로... 폴란드어에는 l에 작대기를 하나 그은 ł이라는 알파벳이 있더군요. 이게 붙으면 '워''와'같은 발음이 된대요. 저와 비슷한 세대는 아시겠지만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퀴리부인 얘기에서 어린 마리아가 자기네 나라 왕에 대해 답하는 장면이 있지요. "스타니슬라스 오거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는~" 하는 그 긴 이름. 문제의 그 왕은 Stanisław August Poniatowski 입니다. 스타니스와프가 어째서 스타니슬라프도 아닌 스타니슬라스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못된 번역 때문에 폴란드를 사랑했던 마리아 소녀는 제 나라 왕 이름도 잘 모르는 아이가 되어버렸네요 ^^)


볼레스와프는 땅 불리기에 나섰습니다. 1003년부터 이듬해까지 체코계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기도 했고,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있었던 키예프 루시(이 나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사방이 육지로 막혀 있던 대폴란드 평야에서 처음으로 북쪽 발트해 해안까지 진출했던 것도 그였습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가 죽은 뒤 6년이나 후계 싸움이 이어지는 바람에... 체코계인 프제미슬 Přemysl 가문이 손쉽게 폴란드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1025년 무렵의 폴란드. 지도 http://www.rymaszewski.iinet.net.au



곡절 끝에 이어진 피아스트 왕조...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담왕’ 볼레스와프2세(1058-79년 재위) 입니다. 이 때 신성로마제국과 교황 간 서임권 분쟁이 벌어지죠. 그 때 폴란드는 교황 편에 섰습니다. 12세기 초반 집권한 크쥐부스티 Bolesław III Krzywousty (볼레스와프3세·1102-1138년 재위)는 신성로마제국과 끈질기게 싸워서 폴란드 영토에 다시는 욕심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왕은 북쪽 국경을 발트 해까지 넓혀 이교도 지역이던 포메라니아(폴란드어로는 Pomorze)를 기독교화하고 영토로 병합했습니다. 


★크라쿠프(Kraków)

비스와(Wisła) 강 상류에 위치한 크라쿠프는 크라쿠프 주의 주도입니다. 인구 75만명으로, 바르샤바와 우치(Lódz)에 이어 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10세기 볼레스와프1세 때 정치적 중심으로 성장했고 17세기 초반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폴란드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서유럽과 러시아로 연결되는 철도들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13세기에 타타르족 침공으로 파괴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옛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도 인기라네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


사진/위키피디아


크쥐부스티는 생전에 이복형제인 즈비그녜프 Zbigniew 대공과 왕위 싸움을 심하게 벌였고, 한 때 나라가 남북으로 두 동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걸 통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크쥐부스티가 죽자 폴란드는 왕위 계승 다툼으로 다시 혼돈에 빠졌습니다. 


폴란드의 왕위 계승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11세기가 시작될 무렵 마자르족의 헝가리에 세습왕조가 공고해진 것과 달리 폴란드는 국왕이 죽을 때마다 새 국왕을 뽑아 교황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교황은 왕가가 아닌 개인에게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군주가 죽으면 새 군주는 다시 로마로부터 승인을 얻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왕위 계승 때마다 정국이 복잡해졌습니다.


왕위 계승 시스템은 크쥐부스티 사후에도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두 세기에 걸쳐 가톨릭 서유럽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부족주의를 넘어선 정치·사회적 발전을 이뤄냈을 법도 했건만 폴란드인들은 여전히 부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아스트들이 가진 혈통에 대한 서유럽적인 관념과, 연장자를 우선시하는 폴란드의 전통적인 부족 관념이 충돌했던 거죠. 연장자 원칙이 우세했던 탓에 결국은 왕자들 간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크쥐부스티는 키예프 루시의 ‘순회 계승’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왕국을 다섯 조각으로 나눠 다섯 아들들에게 배분해주고 자신은 수도인 크라쿠프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죽으면 맏아들이 크라쿠프를 물려받고 국가의 지배권을 쥐며, 나머지 네 아들도 나이 순서에 따라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부터 차례로 맡게 될 것이었습니다. 일단 큰 아들이 큰 덩어리를 갖고, 왕인 내가 죽으면 큰아들이 내 땅을 받고, 둘째가 큰아들 땅으로 옮겨가고...색다른 시스템이죠? 


하지만 이 시스템은 키예프에서부터 깨졌습니다. 이런 분산 구조로 돌아가며 지역을 맡는 방식이라면, 강력한 중앙권력을 가진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무너지기 쉽고 내부의 적들로부터도 공격당하기 쉽지요... 순회 계승의 원조인 키예프의 경우 그 적은 몽골계 타타르인들이었다. 폴란드의 시도도 곧바로 무산됐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순회 계승제의 결과 안정이 아닌 무정부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당장 크쥐부스티의 아들들부터 지역을 바꿔가며 다스린다는 발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왕자들은 왕위 계승 서열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각자에게 남겨진 유산 상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크쥐부스티의 손자들까지 나서 제각기 땅을 물려받으려 애썼습니다. 수많은 왕실 가족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서 폴란드는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그 후 150년 동안 여러 피아스트들이 자기가 왕이라 주장했지만 누가 국왕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내부 분열 속에서 폴란드는 1241년과 1259년 몽골의 두 차례 침공을 받아 초토화됐습니다. 결국 재건을 돕고 동방의 외적들로부터 지켜주겠다며 들어온 독일 한자 동맹과 튜턴 기사단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