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10. '모든 도시의 여왕', 콘스탄티노플

딸기21 2012. 9. 7.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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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12세기의 콘스탄티노플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로마 제국을 기독교에 맡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새 수도를 지어 신에게 바쳤습니다(으윽 갑자기 서울을 봉헌한다던 어떤 사람의 얼굴의 생각나는... ;;). 고대 그리스의 식민 항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새로운 로마’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에서 콘스탄티노플(동로마의 언어인 그리스어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 하는 게 맞지만 우리 귀에 익은 것은 영어식으로 읽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도시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에 있었는데, 세모꼴 땅 끝에 자리 잡아 방어하기가 쉬웠습니다. 이스탄불 여행을 해본 분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바로 위 북쪽으로는 작은 강이 초승달 모양으로 흐르며 보스포루스와 만나는 하구가 있었습니다. ‘골든혼 Golden Horn(황금 뿔)’이라 불리는 이 곳은 자연이 만들어준 항구였습니다. 


빨갛게 표시된 부분이 보스포러스 해협, 거기 있는 까만 점이 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콘스탄티노플 남쪽은 마르마라 해입니다. 이 바다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지중해와 만납니다. 보스포루스-마르마라-다르다넬스로 이어지는 뱃길은 유럽을 아시아의 거대한 땅덩이와 가르면서 동시에 유라시아 내륙의 흑해를 지중해와 이어주는 구실을 했습니다. 천혜의 바다라는 장벽과 골든 혼을 낀 콘스탄티노플(훗날의 비잔티움)은 이 중요한 해로에 위치한 요충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도시는 두 대륙이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탄불에 가면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두 개의 대륙에 발을 걸친 도시'라는 것이죠. 이 삼각형 땅에 세워진 콘스탄티노플 성은 유럽과 아시아 두 세계를 잇는 난공의 요새였습니다. 13세기까지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하고, 가장 부유하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발전된 도시였습니다.



Cristoforo Buondelmonti라는 사람이 그린 15세기의 콘스탄티노플. /위키피디아



이 도시는 독교 정교 제국의 질서를 그대로 형상화했습니다. 도시의 성벽 안에는 로마를 본떠 만든 공공 건축물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이교도적인 요소를 없애고 '신의 도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합니다(이 '신의 도시'는 훗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또다른 '신의 도시'로 바뀌게 되지요).

 

바다 쪽 장벽과 육지 쪽 세 겹의 장벽은 신의 선민인 기독교 백성들을 보호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성은 기독교 제국의 최고 지배자인 황제의 거처이자 동방 정교의 심장인 하기아 소피아 Haggia Sophia 대성당의 총대주교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국가와 교회의 제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져야 할 니케아 공의회의 약속을 물질로 형상화한 도시"였던 겁니다. 


실제로 411년 테오도시우스2세(408-450년 재위) 때 만들어진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쪽 방벽은 천년 가까이 어떤 적들의 침공에도 무너지지 않았고, 바다 쪽 방벽 또한 수백 년 간 페르시아와 아랍, 러시아의 침공을 거의 모두 이겨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건설 이래 계속 확대됐습니다. 비잔틴 황제들은 모든 노력을 다해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덕택에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환상적인 관광지로 이스탄불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만... 특히 10세기부터 11세기 초반까지 비잔틴 제국은 마케도니아 왕조 치세를 맞아 전성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케도니아계 황실의 후원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은 거대한 왕궁과 히포드롬 Hippodrome(대경기장), 광장, 수도관, 시스테른 cistern(지하 저수조), 교회, 수도원 등의 찬란한 공공건축물들로 채워졌습니다. 아, 벌써 8년이 훌쩍 지나버린... 이스탄불 여행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네요. 



콘스탄티노플을 굽어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하기아소피아(아야소피아) 내부의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그리스계, 아르메니아계, 불가르족, 유대인, 투르크족, 러시아인, 하자르족, 이집트인, 이탈리아계 등 제국 전역에서 이 도시로 사람들이 흘러들어왔습니다. 도시 행정기구와 교회 조직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기에 복잡하게 뒤섞인 이 대도시의 거주민들을 위해 사회·보건 시스템을 운용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잘 조직된 소방 부대가 화재에 대비하고 있었고, 상하수도 설비와 무료 병원도 갖춰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유럽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학교, 가로등, 공중목욕탕, 정교한 무역규제, 골든 혼의 방대한 하역설비, 시민 광장, 물산이 넘쳐나는 노천 시장 같은 것들이 콘스탄티노플에는 모두 있었습니다. 수많은 수도원들은 노숙자와 빈민들에게 음식과 피난처를 내주고 병자를 돌봤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공적인 생활은 대궁전 Great Palace 과 망가나 궁전 Mangana Palace, 하기아 소피아와 히포드롬 등이 몰려있는 아우구스테움 포룸(광장)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신성한 지혜’를 뜻하는 하기아 소피아는 비잔틴 건축의 대표작이죠. 360년 콘스탄티누스1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2세에 의해 세워졌지만 현재의 건물은 두 차례 소실 뒤 유스티니아누스1세의 명에 의해 537년 재건된 것입니다. 

하기아 소피아는 총대주교가 거하는 동방교회(정교)의 본산이었으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흐메드2세 술탄 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면서 이슬람 사원이 됐고 이름도 ‘아야 소피아’로 바뀌었습니다. 현대 터키 정부는 이 곳을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종교행위를 금지했습니다. 


왕궁 지구는 멋진 건축물들과 공원, 망가나 Mangana(병기고) 등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당시 서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헬레니즘 연구와 정교 신학의 본산인 대학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위키피디아



하기아 소피아는 제국 전체에 종교 건축과 예술의 본보기가 되어주는 정교의 최고 상징이었습니다. 이 대성당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로 출세할 수 있었다. 비잔틴 문화를 불가르족과 세르비아계, 키예프루시 Kiev Russ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이죠)등 변방 세계와 이민족들에게 전하는 선교사들도 하기아 소피아에서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히포드롬에서는 국가가 주관하는 전차 경주, 사냥대회, 연극제, 곡예 공연 같은 초대형 이벤트들이 펼쳐져 화려한 구경거리를 원하는 시민들의 갈망을 채워주었습니다. 


이런 행사들에 참가하는 것이 비잔틴 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정치적 파벌을 지지하는 이들이 각각 특징적인 색깔로 몸을 장식하고 운동경기 때 다른 편을 응원했습니다. 이는 종종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으며 거리 폭동으로 비화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빛이 찬란할 때에는 그늘이 없을 수 없는 법...


‘모든 도시의 여왕’이라 불렸던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축도인 동시에 제국의 자원을 모두 빨아들이는 도랑이었습니다. 정치와 문화의 흐름이 모두 여기서 결정됐지만 이는 제국의 다른 지역들로부터 재정적, 인적 자산을 모두 흡수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제국의 여러 지방은 점점 쇠약해져갔고, 수도의 행정기능과 지방의 귀족정치 사이에 격차가 갈수록 커졌습니다. 


11세기 초반에 이르자 수도와 지방 간 긴장으로 내전이 일어날 정도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