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8. 동유럽의 중세는 어땠을까요

딸기21 2012. 8. 31.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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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세기 중반의 동유럽과 '대(大) 모라비아'


비잔틴(동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신성로마제국)이 서로 세력을 넓히려 싸우면서 동유럽에서는 정치·문화적 압력이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9세기 중반 동유럽에서는 두 나라가 독립국가로 떠올랐습니다. 불가리아 제국(the First Bulgarian Empire)과 대(大)모라비아 제국(Great Moravian Empire)이었습니다. 


그 중 동유럽 최초의 독립국가로 탄생한 것은 불가리아였습니다.


7세기 후반 나라를 세운 이래로 불가리아의 군주들은 성공적으로 영토를 불리며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외교 상대로 떠올랐습니다. 보리스1세(Boris I·852-889년 재위)가 다스릴 무렵이 되자 불가리아는 발칸 북부와 중부의 광대한 영역에서 지배권을 굳히고 비잔틴과 발칸의 패권을 겨루는 강력한 경쟁자로 성장했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을 죽이는 불가르 전사들... 10세기 무렵의 그림이라네요. 위키피디아


이렇게 세를 불리긴 했지만 불가리아 내부적으로는 소수 지배계층인 투르크계 불가르족과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슬라브계 피지배층 간의 분열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땅이 넓어질 때마다 다양한 토착 신앙을 가진 슬라브 민족들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늘어났거든요.


게다가 비잔틴 제국의 끊임없는 군사적 위협에 더해, 멀리 발칸 북서부 아드리아 해안에 거점을 확보하려는 프랑크 쪽으로부터의 압력까지 더해졌습니다. 발칸 북서부의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부족 지배자들은 불가리아, 비잔틴, 때로는 프랑크 제국과 불안정한 제휴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휴는 별로 믿을만한 것이 못 되었고, 이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주기에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모라비아가 탄생했습니다.


사모 세력의 연합체가 무너진 뒤 이 지역은 권력의 진공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부상한 것은, 모라바 강 분지 중심부에서 새로운 슬라브 부족연합을 만드는데 성공한 체코계 모라비아 부족지도자 모이미르(Mojmir·833년-836년 재위)였습니다. 프랑크족과 불가르족이 이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한 것은, 모이미르의 뒤를 이은 로스티슬라프(Rostislav·846-869년 재위) 왕이 영토를 확장할 때였습니다. 모라비아는 스바토플루크(Svatopluk·870-894년 재위) 왕 때 판노니아 남북을 장악,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슬로바키아의 두코베에 있는 옛 모라비아의 요새 터. /위키피디아



프랑크 왕국은 모라비아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선교에 주력해 모라비아에 로마가톨릭 인구를 늘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로마가톨릭이 확산되면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범 게르만계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갈 것을 우려한 로스티슬라프는 비잔틴제국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비잔틴 황제 미하일3세(Mikhail III·842-867년 재위)는 863년 모라비아의 요청에 화답, 게르만계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정교를 확산시킬 선교단을 파견했습니다.


이 선교단을 이끈 것은 테살로니키 출신인 메토디우스 Methodius 와 키릴 Cyril 두 형제입니다. 철학자이자 외교관이면서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키릴은 모라비아로 떠나기 전 테살로니키 근방 슬라브계 부족 방언에 바탕을 둔 새로운 알파벳을 고안했습니다. 



불가리아 화가 Zahari Zograf가 그린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 /위키피디아



키릴 문자로 쓰인 16세기 러시아의 교과서. /위키피디아



키릴 알파벳이라 불리는 이 글자들은 그리스 문자와 페니키아 문자, 그 밖에 동방의 여러 문자를 섞어 만든 것으로서 글라골(고대 슬라브어) 문자와 비슷했습니다. 키릴 형제의 모라비아 선교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게르만계 교회들이 교황청에 그들을 맹비난하며 항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당시만 해도 서유럽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의 정교는 공식적, 제도적으로 확실히 갈라지기 전이었습니다. 두 교회가 완전히 등 돌린 것은 1054년의 ‘대분열’에 이르러서였고요). 


(그런데 여담입니다만... 저는 외국어를 잘 못해서 모르지만, 키릴문자에서 나온 러시아어 계통이 그렇게 어렵다죠? 전해오는 바로는,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이 20여개 언어를 했는데(대부분 유럽 말이겠지만) 러시아어는 정말 어렵다며 포기했다더군요. ㅎㅎ 믿거나 말거나~)


게르만 교회는 키릴 형제가 ‘신성한 라틴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전례를 베푸는 것을 문제 삼아 이단이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로 불려가 교황청의 법정에 선 키릴과 메토디우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조차도 원래는 이교도들의 문자였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이 만든 새 슬라브어 문자는 오히려 기독교적인 목적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키릴은 모라비아로 돌아오지 못한 채 로마에서 숨졌지만 새 문자를 지켜내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메토디우스는 주교로 임명돼 모라비아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홀로 게르만계 교회들의 반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885년 메토디우스가 죽자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게르만계 교회의 횡포로 모라비아에서 쫓겨났으며 게르만계 문화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키릴


그리스 테살로니키 출생으로 본명은 콘스탄티누스입니다. 14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지만 비잔틴 황궁의 실력자였던 환관 테옥티스투스 Theoctistus 의 눈에 들어 콘스탄티노플 대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학문적 자질을 보였으며 특히 언어적 재능이 뛰어나 라틴어, 아랍어, 슬라브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슬라브 선교의 공로를 인정받아 숨지자마자 동방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됐습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1880년 형 메토디우스와 함께 성인으로 추대됐습니다.



한편 불가리아의 보리스는 865년 자신들을 ‘야만적인 이교도 국가’라 공격하는 프랑크 제국과 비잔틴 제국 양측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유럽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국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독교 개종에는 대외적인 목적 외에 자국민들을 통합시키려는 내부적인 목적도 있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불가리아와의 접경지대에 군대를 보내며 보리스를 향해 정교로 개종하라 위협하자 그는 즉시 이를 수용하고 그리스로부터 사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개종과 동시에 불가리아는 곧장 비잔틴의 문화적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보리스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시메온1세(Simeon I·893-927년 재위)는 비잔틴에 문화적, 종교적으로 종속되다가는 결국 정치적 종속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키릴과 메토디우스를 따르던 모라비아인 문하생들이 고향에서 쫓겨나 불가리아로 들어오자 시메온은 즉시 이 뜻하지 않은 횡재를 냉큼 받아들였습니다. 



시메온1세와 협상하는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1세. 15세기 문서. /위키피디아



시메온1세는 키릴의 후계자들을 아낌없이 밀어주며 불가리아에 키릴 알파벳을 들여오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슬라브어에 바탕을 둔 종교 전례와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적인 위계질서가 형성됐습니다. 시메온의 선견지명과 그의 휘하에 들어온 키릴 문하생들의 노고에 힘입어 오늘날 키릴 문자로 알려진 문자체계에 바탕을 둔 슬라브 문자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스어를 시대에 맞게 변용한 키릴 문자는 슬라브어의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불가리아에서 그리스식 종교 전례는 슬라브어로 번역됐고, 불가리아 현지 출신 사제들이 키릴 문자로 전례들을 익혔습니다. 비잔틴의 종교적 위계구조는 불가리아에서는 토착 종교기구들로 대체됐습니다. 시메온1세 덕에 불가리아는 문화적 독립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