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6. 1400년 전 동로마 제국

딸기21 2012. 6. 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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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1세 치하의 동로마 제국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1세(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527-565년 재위). 영어로는 보통 Justinian I이라고 쓰지요. 아래 모자이크속의 인물)입니다. 



훗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 불리는 인물이 되었지만, 책을 좋아하고 '음울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여러 파벌들은 이 사람이 즉위할 때만 해도 우습게 여겼다고 합니다. 532년에는 반대파들이 폭동을 사주하고 거리에 불을 지르며 세제 개혁과 황제의 퇴진을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 Theodora 황후의 조언을 들어 봉기를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폭도 3만 명을 죽인(!) 황제는 강력한 통치력으로 관료제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신, 하나의 황제, 하나의 제국. 니케아 공의회가 황제에게 내려준 막강한 권력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동유럽이라는 지역구분에서 살짝 벗어나, 유스티니아누스 시절의 동로마 제국 이야기입니다. 지리적인 배경은, 현재의 동유럽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쪽... 이 시기에 동-서 로마제국의 문화적 경계선이 더욱 깊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재임기간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재정을 거의 파산지경으로 몰아가면서까지 대내외에서 제국주의적 야망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대제는 법체계를 정비해 자신의 이름을 딴 법령을 만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령’은 18세기 말까지 서유럽과 동유럽 모든 나라들에서 법체계의 근간이 됐지요. 그는 또 막대한 돈을 들여 건축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 중에는 실용적인 공공 건축물도 있었고, 장엄한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국가와 교회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지요. 


유스티니아누스는 기독교 제국의 통치자이면서도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한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적 요소들을 많이 빌려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 황제는 그리스의 문화 전통에 기독교의 얼굴을 한 전제군주가 되었습니다. 훗날의 동유럽도 뭐랄까, 그리스와 기독교와 전제적인 요소와 신비주의적인 요소와 동양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유스티니아누스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경향인 것일까요?


★ 테오도라 황후


잠시 샛길로 벗어나서, 로마사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인 테오도라 황후 이야기. 
테오도라는 비천한 출신이었지만 원로원 계급인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을 했고, 남편이 삼촌 유스티누스를 이어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자 황후 자리에 올라 ‘아우구스타(augusta·여제 혹은 황후)’ 칭호를 얻었습니다. 귀족들의 반발 속에 황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라는 일단 아우구스타가 되자 제국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총명하고 지혜로운데다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갖고 있었던 테오도라는 제국의 거의 모든 법령을 만드는 데에 관여했고 남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하네요.


유스티니아누스는 강력하고 신비스러운 종교적 권위를 후광 삼아 모든 기독교 세계를 자신의 지배 하에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게르만족의 이주로 느슨해진 국경을 정비하고 기독교 로마제국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한 거죠


니케아 기독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교회가 게르만 동고트족의 통치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호소하자 대제는 기다렸다는 듯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대제의 군대는 먼저 동고트 왕국의 식량 공급줄이던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친 뒤 이탈리아에서 동고트족을 몰아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을 다시 통일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세운 뒤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군주로 군림했습니다. 훗날의 우리는 서유럽 중심으로 세상을 보다 보니 기독교 세계 혹은 로마 세계의 중심을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라고 보기 쉽지만, 실상 로마 제국의 기나긴 역사에서 제국의 중심은 '콘스탄티노플'로 상징되는 '동방'에 있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533년부터 554년까지 유스티니아누스는 서유럽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533년 그는 유능한 장군 벨리사리우스 Flavius Belisarius 를 북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많지 않은 병력으로 겔리메르 Gelimer 가 이끌던 반달 왕국을 무너뜨리고 북아프리카 전역과 히스파니아 남부에 이르는 땅을 복속시켰습니다. 

535년에는 시칠리아 섬을 재정복했으며, 이듬해에는 이탈리아로 진격해 동고트족을 몰아내고 로마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 도시는 동고트족 손에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타이틀롤을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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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방전은 한참을 계속됐습니다. 비티게스 Witiges 왕이 이끄는 동고트 군은 로마 성안에서 1년 가까이 버티다가 수성에 실패하고 도망쳤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북부로 나아가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공략, 비티게스를 생포했으나 아쉽게도 그 순간 콘스탄티노플의 소환을 받았습니다. 이때를 틈타 동고트의 새 지도자 토틸라 Totila 가 제국군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제국군은 543년에는 다시 이탈리아 남부로 밀렸습니다. 3년 뒤 토틸라가 로마 시를 되차지하자 결국 벨리사리우스가 다시 출정해 재점령...


그러나 549년에 로마 시는 다시 동고트족 손으로 들어갔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돕도록 나르세스 Narses 장군을 파병했습니다. 나르세스는 훈족을 비롯한 이민족 용병들을 모아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를 치고 내려왔습니다. 나르세스는 552년 동고트족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다시 유스티니아누스 통치 하에 복속시켰습니다. 이탈리아를 다시 찾은 로마 제국이라니, 좀 우습지 않나요?


서기 550년 무렵의 로마 제국 영토. /위키피디아


554년 이탈리아 전쟁이 끝나자 제국의 영토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대부분 지역과 히스파니아 남부 해안지대에 이르렀습니다. 반달족과 동고트족은 완전히 밀려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방세계 재정복은 무너져가는 헬레니즘 패권국가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대제가 이룩한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인적 비용을 로마는 감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제국의 재정도, 군대의 인적 자원도 곧 소진됐다. 20년에 걸친 전쟁으로 이탈리아는 황폐해졌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현재의 마케도니아 수도인 스코피예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사진은 스코피예에 있는 대제의 조각상. /위키피디아


반도의 비게르만 민족들은 처음에는 게르만 통치로부터의 해방을 고맙게 생각했지만 콘스탄티노플 중앙정부의 효율적인 세제 덕택에 과세가 늘자 곧 불만을 품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동로마와의 문화적 차이도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됐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정신에 바탕을 둔 동로마의 기독교도들과 이탈리아의 서로마인들은 모두 겉으로는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그리스어권과 라틴어권 사이에 종교적 공감대가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실용적이고 상식적인 라틴계'는 이탈리아에 ‘무자비하고 교활하고 파렴치한 그리스계’를 끌어들인 걸 후회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제국 재건 전쟁이 끝난 지 14년이 지난 568년 새로운 게르만 부족인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라틴계는 이번에는 로마 제국의 허약한 군대가 이민족의 약탈에 맞서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제국은 결국 4년 만에 로마와 라벤나와 남부 일부지역을 뺀 이탈리아 반도 거의 전체를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