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로마제국의 분열과 동유럽
우리가 보통 집시라 부르는 사람들, 영어로는 '로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의 루마니아는 '로마 사람들의 나라'라는 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로마 제국은 동유럽의 과거와 현재에 엄청난 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동유럽 역사 이야기는 로마 제국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야 살고 있었겠지만 국가/제도가 만들어진 것이 이 때였으니까요.
역설적이지만 동유럽의 출발은 로마제국의 내리막과 겹쳐집니다. 시기적으로는 3세기 말. 이 때가 되면 로마 제국은 안으로부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합니다. 제국의 군대는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용병을 고용하면서 수적으로 불어나 너무 강성해졌고, 황제들은 이를 통제하지 못해 무정부에 가까운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잠시 로마 제국의 사정을 더 들여다볼까요.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졌고 빈민들 사이에선 좌절감을 반영하듯 동방의 신비주의 종교(일전에 신화에 대한 책 번역하면서 얼핏 읽었는데, 로마제국 말기에 '동방 종교들'이 기승을 부렸더군요. 사방 천지로 뻗어나갔던 군인들이 수입해온 종교들... 멀리 이란과 인도에서 땡겨온 종교들이랄까요)가 널리 퍼졌습니다.
역시 어디서나 빈부격차가 문제야... 신비주의로 가든 뭔 종교로 가든, 그런 것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지는 못하죠. 혹자의 말에 따르면 로마제국 말기에 "황제의 집무실은 군 최고사령관의 사무실처럼 변해갔다"고 합니다. 병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 외적으로부터 제국을 방어할 수 있게 하려면 황제가 나서서 병사들과 호흡해야 했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더 이상 제국의 수도로 기능할 수가 없었습니다. 밀라노든 리용이든 트리에르든, 황제의 사령부가 있는 곳이 곧 수도였다고 합니다. 숱한 위협 속에서도 로마는 제국의 국경을 어찌 됐든 이 때까지는 성공적으로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군인 출신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284-305년 재위)는 직업군인으로서의 상식에 충실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황제가 있어야만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라면, 동시다발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황제가 여럿 있어야 하겠죠. 그래서 그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각각에 황제들을 두기로 했다는... 것이 세계사 시간에 우리가 배운 내용입니다;;
이 분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라 불리는 이 황제들은 각각 '카이사르'라는 젊은 파트너 겸 후계자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제국의 최고사령부로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권력 승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정치적 혼란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 ‘4두 정치(Tetrarchy)’ 체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생전에만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305년 그가 퇴위하자 체제는 곧바로 무너졌고, 네 명의 ‘황제들’ 사이에서는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동시다발 내전(311-324년)이 일어났습니다.
★ 4두 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동서로 나눠 두 명의 정제(Augustus)가 맡고 각각의 정제는 부제(Caesar)를 두는 이른바 ‘4두 정치’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정제와 부제들에게는 각각 다스리는 영역이 따로 있었습니다.
동방의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소아시아와 폰투스, 이집트를 다스렸고 동방의 부제 갈레리우스 Galerius Maximianus 는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를 통치했습니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는 이탈리아 반도와 이집트를 뺀 북아프리카를,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us 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제국 전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혼자 내렸다고 합니다.
동로마-서로마 간단 지도. 출처는 http://www.martinsville.k12.va.us
동·서 로마를 가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구분선은 완전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행정체계에 완전히 들어맞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국의 문화는 모든 영역에서 엄격히 로마식을 따랐다기보다는 그리스 고전 문화전통과 밀접히 결합돼 있었습니다. 이런 두 겹의 문화가 그레코-로마 전체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 내 그리스계와 라틴계는 늘 서로를 얕잡아 보았지만, 양측 모두 그레코-로마 문화의 이중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라틴어를 쓰는 로마계는 대개 제국의 서부에 해당되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살았고, 그리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동부, 중동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서 행정구역을 나누면서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경계선을 기준으로 동쪽의 그리스계와 서쪽의 라틴계를 갈랐습니다. 그 경계선은 발칸 반도의 북서쪽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3세기 말 제국을 위협하는 여러 중차대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으로 제국을 분할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책은 실패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한번 제도화된 분할 시스템은 갈수록 굳어졌고 양쪽 사이에는 짧은 연결고리들만 남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에 양쪽 가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서유럽 문명의 뿌리인 헬레니즘은 샤를마뉴 Charlemagne 대제의 제국으로 이어졌고, 동유럽 문명은 비잔틴 제국을 통해 그리스적인 요소들을 발현시켰습니다.
동쪽의 제국이 떠오른 것은 제국을 분할한 네 황제들 간의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306-337년 재위) 때입니다.
이분이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는 세계사 책에 따르면 (1) 기독교를 키워준 황제 (2)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의 주인이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를 불법화했지만 황제의 군대 중에도 은밀히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승리하는 데에 기독교도들이 믿는 신이 큰 보탬이 됐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합니다.
헬레니즘이나 동방의 신비주의 종교들과 달리 기독교는 신도들이 종교적 가르침을 반드시 지키게 만드는 강력한 윤리·도덕적 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과 연결지어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유용하다는 점을 알았나봅니다. 국가는 기독교와 제휴함으로써 제국 전역에 새로운 도덕을 고양시키고 신민들의 충성심을 제고하며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이고요.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기독교는 변경의 게르만족에게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로마가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하야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만들려 발 벗고 나섰으며, 그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379-395년 재위) 때 결국 기독교는 국교로 공인받았습니다.
동로마의 영광을 상징하는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오스만제국 이후로는 모스크가 되어 '아야 소피아'로 바뀌었지요. 사진/위키피디아
그런데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려면 교리가 하나로 통일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격, 즉 ‘삼위일체’ 문제가 걸림돌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아리우스(4세기의 신학자) 파는 그리스도를 신과 인간의 중간으로 규정하며 신성(神性)을 부인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대신관)’를 겸임하는 황제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4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교회와 국가, 그리고 황제의 이익이 맞아떨어진 이 회의는 ‘기독교 로마 제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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