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214년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제국
1204년 비잔틴 제국은 재앙을 만났습니다.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 Enrico Dandolo(1193-1205년 재임)가 이끄는 '비잔틴 선단'과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Boniface I, Marquess of Montferrat (보니파치오1세)가 이끄는 프랑스 기사단이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것이 그 전 해인 1203년. 이들은 4차 십자군의 주력부대였는데, 원래는 이슬람국인 터키와 아랍권 맹주인 터키를 공략하라는 교황 이노켄티우스3세의 명을 받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1202년 교황 이노켄티우스의 부름을 받아 베네치아에 처음 모였던 십자군 부대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지도자들은 미리부터 한 탕 해먹을 심산으로 선박들을 계약해놓고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왕국에 진 치고 있던 노르만계 부대가 합쳐져 십자군 규모는 훨씬 커졌습니다.
그런데 교황부터 사병들까지, 십자군은 비잔틴 정교 제국 입장에서 보면 '적 아닌 적'이었습니다. 옆집 승냥이들 좀 몰아내달라고 불러온 게 하이에나였던 셈... 가뜩이나 시체 꼴이던 동유럽은 잡아뜯길 일만 남은 거죠.
로마가톨릭(서유럽)과 동방 정교회(동유럽)가 종교적으로 완전히 갈라져버린 이른바 ‘대분열’에 대해 썼었는데요. 그 이후 문화적 갈등은 점점 커졌고, 그러던 차에 돈 많은 동방에서 '우리 좀 지켜줘' 하고 손 내밀고 나온 겁니다. 그리던 동방에 당도한 십자군은 무슬림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기보다는 콘스탄티노플을 약탈 목표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베네치아의 단돌로는 보니파치오를 꾀어 소규모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베네치아 자본을 끌어들여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자다르(Zadar) 항구를 장악했습니다. 이 성공에 힘을 얻은 단돌로는 부대를 나눠 콘스탄티노플로 보냈습니다. 단돌로의 속셈은 분명했습니다. 그동안 지중해 무역을 장악해온 종주국 격인 비잔틴 제국을 누르고 베네치아가 지중해 동부의 해상교역에서 더 큰 상업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랐던 거죠.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자다르
나라가 흔들릴 때에 빠지지 않는 것, 내부의 분열...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비잔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이사키우스 앙겔루스 Isaacius II Angelus(이사키우스2세·1185-95년)의 아들인데, 이 자가 자다르 외곽에서 십자군을 만나 음모를 꾸몄습니다. 무식한 서방 십자군 놈들을 끌어들여 비잔틴 황제 자리를 챙긴 뒤에 십자군을 토사구팽하면 되지 않을까 했던 겁니다. 이사키우스는 십자군에게 돈을 대주겠다고 약속했고, 십자군과 손잡고 나란히 1203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 결국 황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은 그리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지요... 비잔틴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못했다고 업신여겨왔던 십자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겁니다.
1204년이 되자 서방 십자군은 탐욕스런 본색을 드러냈고, 이들을 믿고 손잡았던 비잔틴 음모가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군은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에워싼 바다 쪽 성벽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고삐 풀린 십자군의 횡포는 유례없이 잔혹했습니다. 그런 참상은 남동부 유럽 역사에서 최근(1990년대)의 보스니아 내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가톨릭 십자군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도시였던 동방의 수도에 들어와 저지른 약탈과 파괴는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동방 정교 세계는 서방이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와 저질렀던 약탈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동서 유럽 문명 사이에 오늘날까지도 건널 수 없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는 4차 십자군. 15세기의 미니어처 그림. /위키피디아
라틴 제국은 끝내 동방 정교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월권은 60년도 채 못 되어 끝났습니다. 십자군 자체가 통일된 세력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봉건제 개념에 충실했던 승자들은 정복한 땅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습니다. 플랑드르의 보두앵 Baudouin I(보두앵1세)은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의 황제(1204-05년)를 자처했습니다.
★보두앵1세
플랑드르, 에노의 백작으로서 4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었으나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닌 비잔틴 제국 약탈에 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의 콤네누스 왕가를 무너뜨린 뒤 라틴 제국을 세웠습니다.
제국의 초대 황제 자리를 놓고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1세와 경합을 벌였으나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가 보두앵을 지지, 제위는 그에게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비잔틴 세력의 반란이 일어나고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칼로얀이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보두앵은 아드리아노플에서 1205년 칼로얀 군에 포로로 붙잡혀 처형됐습니다.
베네치아의 피에르 모로시니는 가톨릭 동방 대교구장으로 임명됐습니다. 보니파치오는 테살로니키 왕국을 챙겼습니다. 나머지 동방 영토들은 제국의 속령으로서 여러 십자군 우두머리들에게 분배됐습니다. 단돌로와 베네치아 세력도 보답을 받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일부와 에게 해 섬들, 아카이아와 크레타, 두브로브니크·듀레스·자다르를 비롯한 아드리아 해 도시들을 할당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라틴 제국은 제후들과 영주, 속령 총독들 간의 끊임없는 봉건적 경쟁 때문에 계속 취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라틴 세력이 약해지자 동방에서는 세 정교국가들이 부상해 비잔틴 제국의 옛 영토를 놓고 패권경쟁을 벌였습니다. 첫 번째 세력은 알렉시우스 두카스 Alexius V Ducas (알렉시우스5세·1204년 재위)가 콘스탄티노플 난민들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에 세운 니케아 제국이었습니다. 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 Theodorus I Lascaris(테오도루스1세·1204-22년 재위) 치하에서 이들은 라틴 제국을 효과적으로 막아내 아시아 지역에는 영원히 발을 못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1204년 이후의 라틴제국과 동유럽 세계
발칸에서는 재탄생한 불가리아가 정교 제국의 지각변동을 이끌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그 지배자 칼로얀은 보두앵과 라틴 군대를 1205년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에서 몰아내고, 보두앵을 사로잡은 뒤 죽을 때까지 투르노보에 가뒀습니다. 불가리아는 이어 남쪽과 서쪽으로 향해 라틴 제국과 맞부딪쳤습니다. 칼로얀은 가톨릭 세력들의 내분을 역이용, 교황으로부터 불가리아 교회의 자치를 얻어내고 왕의 지위도 인정받았습니다.
1218년 칼로얀의 아들 이반2세 Ivan II(1218-41년 재위)는 왕위를 차지한 뒤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원래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반2세는 온화하고 관대한 성격이었지만 군사 지도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니케아와 손잡고 발칸에서 라틴 제국의 영향력을 조금씩 잠식했고, 1232년에는 로마 교황청과 니케아의 연결 고리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비잔틴 정교회로부터 투르노보에 본부를 둔 불가리아 교구의 독립을 이끌어내고 세 번째 경쟁자인 에피루스 군주국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에피루스는 미카엘 앙겔루스 콤네누스(1204-14년 재위)가 세운 나라로, 라틴·베네치아·불가리아 세력과 경합하며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 해안에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에피루스의 테오도루스 두카스 앙겔루스(1214-30년 재위) 왕은 1222년 테살로니키 왕국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으며 2년 뒤에는 아드리아노플에서 니케아 군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불가리아 군에 패하고 포로가 된 뒤 후계자들을 모두 잃는 바람에 비잔틴 세계의 패권 경쟁 무대에서 에피루스의 영향력은 급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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