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빛은 내 이름

딸기21 2012. 8. 2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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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내 이름 1, 2 veinte anos, Luz. 

엘사 오소리오. 박선영 옮김. 대교북스캔 6/28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때 벌어진 ‘도둑맞은 아이들’을 주제로 한 소설. 이사벨 아옌데의 <또 다른 봄> 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소설이랄까.


정적이나 반대세력을 학살하는 군부독재정권. 여기까지는 수많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 도둑질’에 이르면 ‘대체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반정부 세력으로 찍힌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해 죽이는데, 그 중 임신한 여성 수감자들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군인 가정이나 부유층 가정으로 넘긴 것은 대체 어떻게 봐야 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아이를 낳은 여성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니, 아이 공장도 아니고 매매도 아니고.


소설에 나오는 군부의 실력자는 딸이 아이를 사산하자 수감자의 아기를 데려다주어 키우게 한다. 이 실력자와 그 하수인 격이었던 ‘짐승’이라는 고문관, 실력자의 이기적인 딸과 유약한 사위, 이 사건에 말려들면서 인생이 바뀌게 되는 ‘창녀’. 이들의 캐릭터가 생생한 까닭에 소설은 금세 읽혔다. 아이 도둑질의 밝혀지지 않은 전모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


등장인물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실력자의 딸인 마리아나였다. 아이를 사산한 줄 모른 채 자기 아버지가 구해다 준 아기를 친딸로 키우는 여성. 딸아이가 아직 어리던 시절에 그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지만 마리아나는 꿈쩍도 않는다. 원주민이 아닌 예쁜 백인 혈통의 아이를 가져다준 것은 역시나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배려였군, 이런 이기심으로 남편마저 경악케 한 여성. 군사정권이 끝나 민간정권이 들어서고 아버지를 비롯한 군부 인사들이 재판을 받았음에도 “군부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들이 선동한 그 재판을 내가 왜 봐야 하는데!”라 외치는, 무지에 가까운 뻔뻔함.


그에 맞서는 캐릭터가 있다면 ‘창녀’ 미리암이다. 무지막지한 고문관 ‘짐승’의 애인이었던 미리암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고, 짐승을 통해 아기를 하나 얻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을 하면서 아기의 행방을 좇고 진실을 밝히는 열쇠 역할을 하는 사람.


더러운 전쟁의 진상은 아직도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처벌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도둑질 당한 아이들’의 사연이 지금도 외신을 통해 들려온다. 그 끔찍하고 더러운 전쟁이 지금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은 미리암과 마리아나를 둘러싼 주변적인 에피소드들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주변이 아닌 본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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