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중국의 서양인 고문들 To Change China : Western Advisers in China (1969)
조너선 스펜스. 김우영 옮김. 이산
조너선 스펜스다. 중국에 딱히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조너선 스펜스의 책을 나오는족족 모조리 읽고자 결심한 터라... (이산 출판사에서 나온 것은 무조건 사두고 보자는 심리도 있거니와) 이 책도 보이자마자 재빨리 업어왔다. 스펜스의 책이 굴러다니고 있는데 아무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니, 복 받았다!!!
무려 1969년에 나온 책이다. 허나 스펜스의 책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국내에 출판된 그의 책 중에서 이산에서 나오지 않은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 한 권 빼고. '현대 중국을 찾아서' 2권은 정통 역사서에 가깝지만 그 나머지 책들, 더 설명해 무엇하랴 싶은 '천안문'과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과 '왕여인의 죽음', '반역의 책', '칸의 제국' 등은 하나의 모티브를 잡아 그 실마리로부터 '중국'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풀어가는 재주가 탁월하다.
이 책, '근대중국의 서양인 고문들'에서 그 실마리는 제목 그대로 중국 근대사의 장면장면에 얼굴을 들이미는 '서양인'들이다. '서양인 고문들'이라고 하면 관료적인 냄새가 나는데, 책에 등장하는 서양인 중에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정식 지위를 가진 '고문'도 있고 그저 중국의 아수라장에 한몫 잡으러 뛰어들었던 인물들도 있다. 그들 모두를 가리켜 '고문들'이라고 한 것은,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당시 중국은 수세적인 입장에 있었고 서양인들은 노쇠한 중국을 '깨우치러' '한 수 가르쳐주러' 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원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대적 배경은 16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300년이 넘는다. 그 시기 중국의 일에 참견하러 들어갔던 사람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가지가지다. 맨 처음 얼굴을 내미는 것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그리고 샬의 후계자 격인 예수회원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다. 17세기 중국에 가톨릭을 전파하려 했던 이들의 뒤를 이은 사람은 미국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피터 파커. 이런 종류의 인물은 그보다 좀 지난 시기 조선에서도 드물잖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이자 의사로서 '봉사하고 선교'하려 했던 사람들 말이다.
피터 파커를 지나면, 한층 거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몫 챙기려 뛰어든 모험가 군인 프레더릭 워드에 대한 대목은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의 별볼일 없는 날라리였던 워드는 떼돈 벌어보자며 중국으로 가 일종의 용병대장이 된다. 워드와 한묶음으로 나오는 것은 영국 육군 대위 찰스 고든. 본의 아니게, 혹은 자기 의지로, 머나먼 아시아에서 전쟁에 휘말리게 된 이들은 자기네들이 맞닥뜨린 제국을 우러러보고 무시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해석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원망한다.
'중국에 간 서양인'들의 발걸음과 목소리를 통해, 책을 읽는 우리도 '중국 중심'이 아닌 '바깥 사람들(비록 서양인들 뿐이긴 하지만)'의 눈으로 그 거대한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어느새 시간은 '현대'로 들어와, 난장판 같던 20세기에 이른다. 눈에 띄는 사람은 옛소련에서 중국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했던 미하일 보로딘이다. 중일전쟁, 국공내전, '닥터 노먼 베순(베순의 이야기는 지금 다시 읽어도 감동적이다!)', 그리고 2차 대전과 함께 등장하는 미국의 장군들. 마지막 장은 특별한 주인공 없이 그저 '미국과 소련'이라고만 되어 있다.
스펜스는 늘 그렇듯, 마치 중립적인 양, 담담하게 스스로 골라낸 16명 '서양인 고문들'의 걸음을 그려놓는다. 명나라 말부터 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상대로 훈수를 두고 참견을 하려 했던 이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경험했으며 무엇을 배웠을까. 동기는 여러가지였고, 경험도 여러가지였다.
하지만 저자가 결론 부분에서 설명하듯이,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명백한 동기 하나는 정신적 또는 물질적으로 중국의 진보를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도와준다는 것은 중국을 좀더 서양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을 도와준다기보다는 스스로를 도우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중국으로 간 고문들은 대개는 자기 나라에서 발 뻗을 자리가 별로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중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크게 실망했다."
책은 재미있다.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다. 하지만 서양인 '고문들'이 중국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지금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을 것 같다. 주변에 중국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많다. 이상하게도 중국어를 배운다거나, 중국 특파원을 했거나 혹은 지망한다거나, 중국에 관심 또는 애정이 많은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도 되는 양, 꼭 중국 우월주의자처럼 말한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을 때, 경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이유가 없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세기 우리는 미국에 목 매달고 지냈다. 힘 있는 자에게 붙어야 한다는 심리가 팽배하고, 그게 국제관계에서도 당연시된다. 그래서 '미국 다음은 중국', '21세기는 중국의 시대라 하니 우리는 중국에 붙자'라는 식의 논리적 비약이 되는 것 아닐까 싶다. 현실주의를 너무 따르다보니 과연 그게 현실인지, 냉정하게 본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지는 그런 종류의 현실주의 말이다.
근대중국의 서양인 고문들은 우월감을 안고 중국에 들어갔다가 산전수전 겪으며 영광을 누리고 상처를 입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의도와 노력을 가지고 '늙었지만 젊어진' 중국이라는 역동적인 제국에 다가가려 하는 것일까. 중국에 한번 발 디뎌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더이상 생각을 진전시킬 방도도 없지만, 아무튼 궁금하다. 21세기의 중국, 그리고 거기를 향한 '우리의 걸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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