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없는 사람들 : 헤겔 역사철학 비판 History at the Limit of World-History (2003)
라나지트 구하 | 이광수 역 | 삼천리 | 2011년 11월
부제가 '헤겔 역사철학 비판'이다. 헤겔, 역사철학. 너무 무겁다. 무지하고 가벼운 나로서는 다가가기 참 힘들다. 표지도 무겁다. 하지만 '역사 없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에 끌렸다.
역사 없는 사람들. 키스 휘틀럼이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에서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던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노린 '역사 지우기', 옛 유럽 식민주의자들과 미국 백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역사 지우기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200쪽 남짓한 많지 않은 분량. 요즘 '민족주의'를 화두로 삼은 책을 여러 권 이어서 읽고 있던 차였기에 망설임 없이 꺼내 들었다.
재미있었다. 호미 바바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책을 읽으면서 이들 인도의 학자들이 얼마나 어렵게 얘기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겁이 난 것도 사실이지만, 뭐 어때, 내가 알아듣는 것만 알아듣고 넘어가면 되지. 내가 이 나이에 학문의 길을 걸어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머리 속에 살짝 생채기를 내보겠다는 것 뿐인데 뭐. 헤겔의 역사철학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지만, 라나지트 구하의 책은 예상대로 어려웠지만, 다행히도 재미있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에 일어난 것들 중에서 취사선택해 시간 순서대로 구성한 것.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역사서술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너선 스펜스처럼 명문에 미문으로 역사를 다루든(<천안문>), 에릭 홉스봄처럼 역사적 사실로 알려진 것의 허상을 꼬집어 깨부수든(<만들어진 전통>), 하워드 진처럼 '지배자들의 역사' 이면에 가려진 민중의 삶과 투쟁을 조명하든(<미국민중사>), 윌리엄 맥닐처럼 역사의 흐름 아래에 있는 질병이나 기술의 역할을 새롭게 끄집어올리든(<전염병의 세계사>) 간에, 아무튼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기로는,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그렇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누군가의 눈과 입을 통해 취사선택되고 각색되어 전해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를 중시하고, 묻혀있던 필부필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도 생각해왔다. 하지만 라나지트 구하는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전 세계의 역사(학)'는 과거에 일어난 것 중 무언가를 골라 산문으로 정리해놓은 것이라는 바로 그 사실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이 '역사(학)'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의 거대한 지적 기획의 일부분이었고, 그래서 이 기획에 포섭돼 들어가버린 서구 밖의 세계에서는 숱한 역사가 '역사 아닌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민중의 것, 피지배자들의 것, 너와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겪는 경험, 거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감정과 느낌, 글이 아닌 목소리는 모두 전근대적인 것, 역사 아닌 것으로 되어버렸다. 식민지였던 지역의 지식인들(역사학자들)마저도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혹은 묵인한 채 서구가 틀을 잡아준대로 역사를 논하는 마당이 되어버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월터 미뇰로에 따르면 '역사 없는 민족'이라는 말에는 역사관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를 "기록이 없는 사람들은 역사가 없는 민족이고, 역사가 없는 민족은 열등한 인간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런 역사관은 당시 역사서술에서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신대륙을 '정복한' 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에게 정복된 자, 즉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역사에서 쫓겨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신대륙을 정복한 이들은 그로부터 300년 뒤 이러한 생각을 남아시아에 적용하고, 결국 인도 아대륙 사람들을 역사의 지평 밖으로 몰아냈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의 사례와 다를 바 없이 남아시아에서도 그 전략이 사용된 것이다. (25쪽)
-'세계사'의 대상으로 인정받은 행운을 누린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세계사'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은 역사 이전 시대에 포함되는 반면, 선택받은 국가들은 ‘세계사'의 자리가 예약되었다. 즉 선사(Prehistory)와 ‘세계사(World-History)'를 가르는 선은 ... (중략)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식이 ‘자연의 직접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민족적 ‘형태’(Gestaltungen)를 띠는 것이다. 동양, 그리스, 로마, 게르만 네 영역 가운데 셋은 적합성 테스트를 통과했다. 탈락한 것은 오직 하나, 동양 뿐이다. (80쪽)
라나지트 구하는 이런 '역사 기획'의 틀을 만든 인물이 헤겔이라고 말한다. 이성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방향성'을 상정하면서 헤겔은 자연스레 민족들 간의 우열을 매기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다. 방향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한, 그 한 방향으로 나아간 정도에 따라 서열이 매겨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은 서구 지배세력과 덜떨어진 피지배 지역들로 나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뒤에까지도 피지배 지역들에는 서구가 강요한 역사의 틀이 살아남아 스스로의 역사를 '역사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고 있다고 구하는 지적한다.
여기서 구하의 주장이 이른바 민중사관 류와 다른 점은, '역사의 산문'이라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에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린 김부식의 <삼국사기>만이 우리의 옛 역사서인 줄 알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옛이야기, 민담, 속담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과거의 일이 대를 이어 전달된다. 거기에는 '사실(事實)'만이 아니라 옛일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감수성, 정서 같은 것들도 녹아 있다.
그런데 과거의 시간을 말하는 방식이 헤겔 식의 '사료를 근거로 논리적으로 재구성한 산문'으로 통일되면서 나머지 방식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니, 의도적으로 추방당했다.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한 가지 방식으로 제한한 것은 명백히 의도적이라고 구하는 말한다. 더욱이 헤겔의 역사서술은 철저하게 '국가 중심주의'에 매몰돼 있다. 헤겔은 자기네들이 정한 세계사의 기준선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그에 걸맞은 민족적 형태와 그 귀결점으로서의 국가를 구현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국가가 역사의 최종형태가 되는 셈이다.
-그는 세계에서 절대정신이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국가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는 사실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적 존재가 되는 것은 오로지 국가 안에서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국가 덕에 두고 있고, 오로지 국가 안에서만 그 존재를 찾는다. 그가 소유하는 가치 있고 정신적인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국가 덕분이다" (86쪽)
으으... 토할 것 같다. 구하도 그런가 보다. 역사학을 이제는 저들의 이데올로기, 헤겔의 논리에서 빼내어 인류 모두의 풍성한 과거이자 현재와 미래를 위한 상상력의 원천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서구인이든 비 서구인이든 헤겔식 역사서술에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서양의 근대에 형성된 역사라는 개념과 역사서술 방식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상상력의 출발점으로서 구하는 인도에서 '역사'와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으로 통용돼왔던 이야기법들을 불러낸다. <마하바라타>를 예로 들자면, 이야기꾼과 청중의 교감과 의논과 대화를 통해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지게 된다. 줄거리가 같다고 다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가 이야기하고 누가 어떤 질문을 던지며 어떤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따라 매번 새로운 체험이 된다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이 늘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불러내 현재의 경이로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사장시켜서는 안될 진정 풍요로운 역사라는 것이다.
어렵다. 책의 내용도 어렵지만, 던져주는 과제도 어렵다. 어찌 하란 말인가, 우리 보통 사람들은. 결론은 없다. 다만 힌트 삼아 저자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남긴 경이의 순간에 대한 글을 던져 놓는다. 책 뒷부분에 글 전문을 부록으로 실어놨다.
"어느 날 오후 네 시 반쯤에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막 돌아왔는데, 그때 우리 집 삼층 높이에 걸쳐 있는 검푸른 뭉게구름을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이었던가. 나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그날의 역사 속에서 그 뭉게구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안에서 라빈드라나트는 혼자이면서 모든 사람이 되었다.
또 한 번은 방과 후에 우리 집 서쪽 베란다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작은 당나귀 한 마리(영국 제국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그런 당나귀 말고 언제나 우리 사회 안에 들어와 있었고 태초 이래로 변함 없는 그 짐승)가 가정부가 사는 방 쪽에서 나와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암소 한 마리가 그 당나귀 등을 사랑스럽게 핥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살아 있는 한 생명체가 다른 한 생명체를 위해 사는 모습을 본 아름다운 광경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역사를 통틀어 그 장면을 황홀한 눈으로 본 사람은 라빈드라나트 밖에 없었다. 나는 확신한다. 그날의 역사에서 그 장면이 갖는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된 사람은 라빈드라나트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 자체로 창조인 터전 속에서 라빈드라나트는 오로지 혼자였고 역사를 통해 공적으로 어느 누구하고도 엮이지 않았다· 역사가 공적인 곳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영국 백성일 뿐 라빈드라나트 그 자신은 아니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문학 속의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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