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현대사'

딸기21 2012. 4. 9. 19:21
팔레스타인 현대사 : 하나의 땅, 두 민족 A History of modern Palestine
일란 파페 저  |  유강은 역 | 후마니타스


이스라엘 출신의 역사학자가 팔레스타인의 현대사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관할지역과 동일시되는 곳 혹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만든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세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포괄하는,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이라 불려왔던 지역'을 가리킨다. 


저자는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중 어느 한 쪽을 옹호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 지역 '모든 가려진 사람들', '모든 빼앗긴 사람들'의 입과 눈이 되어 이 지역의 현대사를 이야기한다. 시대적으로는 19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영국에 밀려나던 시기부터 시작해,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이후의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정된 지역에 한정된 시기라고 하지만 워낙 복잡다단한데다가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입장이 극단적으로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동네 얘기다. 어느 한쪽 일방적으로 편들거나 미화하거나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이 지역에서 100년 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전한다. 하지만 결코 객관주의를 가장하거나 가치평가를 미루지는 않는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기까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알 나크바(재앙)'라 알려진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유대인 이주자들의 행태는 교묘하고 기만적이며 영국은 무책한 제국주의 세력 그 이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한쪽을 일방적인 가해자라 욕하기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보여준 모습 또한 무능하기 짝이 없다. 


대재앙 이후 이스라엘은 잔인하고 오만하다. 식민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의 개 노릇을 도맡아 한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려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성공적으로 나름 정치세력화했고 국제무대에서 자기네들 목소리를 냈지만 결과로 말하자면 지금 보듯이 끔찍하다.


하지만 이렇게만 현재까지의 스코어를 정리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정치판에서 큰 목소리 내는 '지도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사이사이 고비마다 숨겨져 있는 것,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계 팔레스타인 사람들, 난민들, 자치지구에 갇혀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하는 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스라엘의 '2등 국민'이 되어버린 아랍계 소수 주민들과 메즈라히 유대인들, 광기마저 띠고 있는 이스라엘 군국주의에 사로잡혀 사는 그 나라 사람들, 이런 모든 '보통사람들'이다. 비록 완전한 기록은 되지 않을지라도(아무래도 저자는 이스라엘의 진보적 지식인이지 난민촌의 아랍인은 아니니까) 이들의 삶에 조명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건들을 시대순으로 쭉 정리한 역사서의 평범한 틀을 그대로 따르면서 팩트들을 충실히 모아뒀고, 심지어 방대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여러가지 사건과 행위에 대한 명확한 정치적 평가를 내리고 있어 상황을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워낙 알차게 정리되어있는 책이라, 읽고 나니 잘 차려진 한 끼 밥을 먹은 듯 속이 든든하다.


사실 팔레스타인 문제, 중동 분쟁에 대해서는 국내에 출간된 책들을(적어도 한 3년전까지는) 거의 다 읽었던 지라 대략적인 그림은 머리 속에 그려두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구체적인 상황을 다시한번 체크하게 된 것은 소득이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랍 각국에서 이스라엘 건국 뒤 이스라엘로 들어간(이 사람들은 바꿔 말하면 아랍 각국에서 쫓겨난 것이 되지만) 아랍국 출신 유대인, 이른바 '메즈라히 유대인'들에 대한 것들. 샤스 당이 우익화된 메즈라히 유대인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거나 하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또 한 가지, 마지막 부분의 우울한 예언을 빼놓을 수 없다.


저자가 이 책을 펴낸 것은 2004년. 국내에는 2009년 소개됐지만, 벌써 몇 년의 시간차가 난다. 저자가 이 책을 마무리할 당시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권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연달아 침공한 뒤였다. 이-팔 문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래도 한 다리 건너인 아프간 전쟁이라기보다는 이라크 전쟁이다. 


이라크를 멋대로 유린하면서 중동아랍국들은 물론 세계 전체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이라고 하지만 한국과 일본처럼 '석유 때문이라면~' 하면서 전쟁 지지하고 군대를 보냈던 나라들이 없지는 않다;;) 미국은 아랍권을 달래보겠다며 '중동민주화 구상'에 이어 '중동평화 로드맵'이라는 것을 꺼내보였다. 그 중 전자인 '중동민주화 구상'은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을 축출한 '레짐 체인지' 정책(그리고 그것의 수단 격이었던 선제공격 독트린)을 정당화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후자인 중동평화 로드맵도, 지금은 그런 것이 언제 있었던가 할 정도로 가물가물해졌다. 진심이라곤 전혀 들어있지 않은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전임자인 빌 클린턴이 2번째 임기 때 이-팔 평화협상에 목을 매다가 되레 진창에 빠지는 걸 본 부시는 이 동네 일에는 통 관여하길 꺼려했다. 그러다가 전쟁 일으키고 비난이 빗발치니 나름 달래보겠다며 내놓은 것이 그 로드맵이라는 것이지만, 늘상 그것을 들여다보며 기사를 썼던 나조차도 그 내용이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런 시기였다. 미국 우파 행정부의 묵인 아래 이스라엘의 오만은 하늘을 찔렀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정권과 상관없이 늘 대략 막가파였다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막가파 식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그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유감스럽지만 시온주의 좌파의 정치 ·문화적 힘의 쇠퇴는 유대 국가의 역사에서 은총의 10년이 끝나고 어둠의 시기가 도래할 것임을 알리는 징후이다. 이 시기가 얼마나 갈지는 알수 없지만, 신시온주의, 즉 비타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형태의 시온주의가 포스트 시온주의 대신 군렴할 것이다" (439쪽)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시온주의 우파들이 잇단 전쟁을 일으켜 중근동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1960~80년대가 지나고 1990년대에는 다소나마 성찰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던 '포스트 시온주의' 시기가 있었다. 그 10년이 지나가고 이스라엘에 '신(新) 시온주의'라 부를 법한 극우 시온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이 저자가 말미에 내놓은 우려이자 경고였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06년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공격해 엄청난 피해를 냈고(이스라엘 입장에서도 '이긴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2009년에는 가자 지구를 침공해 무지막지한 짓들을 저질렀다. 이스라엘의 행동을 국제사회 누구도 막지 못했고, 막지 않았고, 심지어 유엔은 이스라엘에 얻어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행태 속에서 이스라엘은 어느 때보다도 고립됐다. 2010년에는 두바이에서 하마스 지도자를 암살하면서 유럽 각국 여권을 모사드가 멋대로 위조한 사실이 드러나 유럽국과도 갈등을 빚었다.


이스라엘 내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부정적인 변화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슬람화 현상'들은 이 지역의 과거와 현재가 그렇듯 미래 또한 그다지 단순치는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 일란 파페는 하이파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하이파 대학 교수로 있었지만 이스라엘 내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진보학자로 찍혔고 지금은 영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 한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저자처럼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통일된 나라'라는 이상을 그리는 이들이 이스라엘 내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책 말미의 '공존과 공유의 모델들'은 사실 광대한 분쟁의 역사에 비하면 너무 미약해 보인다. 하지만 혹시 아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한' 결과가 장차 미래의 어느 시점에, 중동에서 펼쳐질지. 


* 스크랩해둘 부분이 많았다. 책의 여기저기를 옮겨놓고 보니, 팔레스타인 현대사가 어느 정도 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19세기 말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


팔레스타인으로 비집고 들어오거나 유럽 경제에 팔레스타인을 결합시키려는 유럽 세력의 시도는 크림전쟁이 끝난 1856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을 종식시킨 파리강화회의는 오스만제국의 중동 지방을 유럽의 투자와 투기의 장으로 활짝 열어 주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 질서는 팔레스타인 사회구조에 이중의 영향을 미쳤다. 즉, 이 지역을 하나의 지정학적 단위로 재규정했으며, 생산방식과 생산수단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1880년대에 팔레스타인의 경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세계경제에 종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증기선을 비롯한 대형 선박들이 산업화된 영국과 프랑스에서 제조된 생산품을 가지고 도착해서 대부분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생산되지만 팔레스타인을 거쳐야만 하는 원료를 싣고 떠남에 따라 대對유럽 수출과 수입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제 팔레스타인은 베이루트나 카이로에 속하지 않는, 세계경제 지도 위에 뚜렷하게 표시된 정거장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팔레스타인이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의 시장에 대한 편리한 접근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제 팔레스타인은 성서 속의 옛 팔레스타인이 아니었다.


변화는 대다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곳, 즉 경작지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의 농업은 강력한 외부시장 세력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사적 소유는 새롭고 값비싼 특권이 되었고 소토지 소유자와 도시의 상점주들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대토지 소유자와 부유한 도시 가문에 자신의 소유권을 팔아야 했다. 농민들은 인상된 세금을 납부할 수 없었던 탓에 납부능력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땅을 넘겨주었다. (52쪽)



정교회 공동체의 부상


이런 외부의 압력은 이미 화폐무역에 참여하고 있던 도시 엘리트의 성공한 구성원인 부유층 집안의 생활수준 향상 욕구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처음으로 유럽의 도전에 주목한 것은 소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도였던 팔레스타인의 상인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상인들의 자각이 드러난 것은 부의 중대보다는 상인 숫자의 증가를 통해서였다. 상인들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의 그리스 정교회 공동체가 유럽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인 첫 번째 집단이었는데, 이런 변화는 도심부에서 사망률 감소와 출생률 증가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정교회 공동체가 팔레스타인 경제 엘리트 집단의 중추가 되었다. 이들은 후에 종교적 성격보다는 특정 민족의 성향이 더 두드러져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리스정교회 공동체는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diaspora 에서도 두드러진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9쪽)


유럽인들이 팔레스타인을 근대화시킨 것일까? 이 외국인들은 변화의 동인이었을까? 언제나 또는 모든 면에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새로운 기법과 장비를 도입하고 농업 생산을 증대시켰지만 이런 현대적 혜택을 현지 주민들과 공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현지 산업가들은 이익을 전혀 올리지 못했고 그들의 생활 방식이나 생산방식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보건, 위생, 통신 등의 인상적인 개선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유럽인들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은 듯하다.


시온주의자들의 유입


팔레스 타인이 유럽의 자본주의 통화 체제로 통합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결집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이주자들이 현지 엘리트 집단에 편입되었다. 땅·소유물·노동력 같은 생산 수단의 많은 부분이 소수의 수중에 축적되었다. 주로 대지주와 대규모 농업 생산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지배 엘리트 집단은 땅투기가 자본을 늘리는 가장 매력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순간에 팔레스타인에 발을 들여놓은 시온주의 운동은 신속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이것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60쪽)


선교사들과 거의 같은 무렵에 초기 시온주의자들이 도착했다.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지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유럽 시온주의의 진화 


일찍이 시온주의는 유럽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동장했다. 처음에는 유럽 대륙의 중심부에서 유럽 유대인이 처한 곤경에 대한 지적 개념화로 나타났고, 두 번째는 동유럽에서 이런 곤경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등장했다. 


지적 운동의 중심에는 유대 민족운동에 앞장선 테오도르 헤르츨 Theodor Herzl이 있었다. 그는 19 세기 말에 이를 팔레스타인 식민화로 귀결되는 경로로 이끌었다. 유럽 유대인 민족문제의 해결에 대한 헤르츨의 전망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1850년대에 동유럽에서 시작된 지적인 유대 원原민족주의proto-nationalism 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 학자들은 헤르츨에 앞서서 유대교를 종교라기보다는 민족 이데올로기로 재발명했으며, 따라서 성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모델인 고대 유대의 역사에서 길잡이를 추구했다. 학자들은 고대 히브리어로 글을 썼고 성서의 솔로몬 왕국과 하스모니아 Hasmonea 왕조의 마지막 유대 국가 이야기를 다시 서술했다. (68쪽)


첫번째 유대인의 물결


절멸 위협 속에서 유대인들은 속속 러시아를 떠났고 대다수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럽에서는 주로 유대인 학생들이 새롭게 결성된 민족조직에 합류했다. 몇몇 사람들은 논의를 넘어서 민족주의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쪽을 택했다. 1882년에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첫 번째 유대인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온주의 역사 서술에서는 1882년에 온 사람들을 1차 알리야 First Aliya 라고 지칭한다. 알리야는 ‘올라감’이라는 뜻인데, 팔레스타인 이주가 유대인들을 더 고차원적인 형태의 삶과 존재로 상승시키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국외 이주가 예나 지금이나 ‘예리다’ yerida, 즉 ‘내려감’이라고 표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초기 이민자들은 자신들을 ‘할루짐’ haluzim(개척자들)이라고 생각했으며 북아메리카 서부로 몰려간 백인 정착민들을 모방하거나 적어도 그 통상적인 이미지를 차용하려고 애썼다. (72쪽)


시온주의라는 이름의 식민주의


‘현대’ 팔레스타인이 성스러운 땅의 재발견 속에서만 규정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지역에 도착한 유럽인들을 모두 선교사로 보는 것만큼이나 그릇된 처사다.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외국인들 가운데는 폭리를 노리는 모리배와 금융 투기꾼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유럽인들에게 ‘근대화’란 새로운 출발을 위해 과거를 다시 규정하거나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초래된 식민화의 에너지에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비록 수는 적었지만 식민화를 목표로 삼은 이민이었다. 유럽 강대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은 엄격한 의미의 식민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곳의 식민주의와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현지의 이해가 아니라 유럽의 이해를 위해 팔레스타인에 진입하는 유럽의 운동이었다. 현지인들은 새로운 이주자들을 위해 착취해야 할 하나의 상품이나 자산, 또는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현지인들은 기독교도 공동체를 확대하는 기반이 되는 영적 상품이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에게 원주민들은 값싼 막노동자나 환금작물 생산자였다. 좀 더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인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팔레스타인인은 '셸라 넬라마' Shela neelama, 즉 비가시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감춰진문제’로 규정되었다. (77쪽)


영국 점령(위임통치) 하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영국의 팽창을 용이하게 할 수만 있다면 영국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중동 정책의 친시온주의적 경향은 세계,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식민주의적 인식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메시아의 재림과 연결 짓는 종래의 신학적 관념이 뒤섞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헤르츨은 가자 인근의 옐 아리시 EI-Arish 라는 불모지대를 시온주의의 오아시스로 바꿀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영국 정부에 제안하면서 영국의 식민주의적이고도 복음주의적인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집트 총독으로 열렬한 공리주의자였던 크로머 경Lord Cromer 은 이런 전망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 그의 반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쨌든 유대 민족주의를 팔레스타인(시온) 정착과 결정적으로 연결 짓는 시온주의로 정의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희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헤르출이었다. 헤르츨은 애국심이나 유대 민족주의에 대한 충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만들어 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유대인 정착촌의 확대


1908년에 다시 문을 연 터키 의회의 소수 팔레스타인 대표들이 팔레스타인 안에서 유대인의 팽창주의를 억제하는 입법을 통과시키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착민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시온주의 공동체가 건설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유대인 정착민들은 심각한 적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미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 정착촌은 12곳이 되었다. 땅은 팔레스타인 안팎 부유한 지주들에게서 구입한 것이었다. 메나헴 우시쉬킨 Menachem Ussishkin 의 지도 아래 정치조직과 더불어 직능조직이 속속 생겨나면서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가 영구적으로 자리 잡을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93쪽)


앨런비 장군의 팔레스타인 점령


1917년 12월 9일, 이집트에서 온 영국 파견군 최고사령관인 앨런비 장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적국 영토인 팔레스타인을 관리하기 위한 임시 정치기구를 세웠다. 1918년 9월에는 조용히 팔레스타인 북부를 손에 넣었고, 1919년에 프랑스령 시리아로부터 갈릴리 북부를 양도받자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하나의 지정학적 단위이자 대영제국 중동 지역의 필수적인 부분이되었다. (125쪽)


앨런비의 팔레스타인은 학대받았고 특히 해안 지역과 그 주변의 풍경은 전쟁에 의해 큰 상처를 입었다. 전쟁이 야기한 직접적인 결과는 터키 관료 사회와 터키어가 사라진 것이었다. 마치 오스만인들이 한 번도 지배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땅을 전쟁터로 삼기로 한 유럽의 결정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무슬림 4만 명, 기독교도 1만여 명, 유대인 1천여 명이 폭정과 무기, 기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126쪽)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무능


민족주의 명사들은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시온주의자들의 변화무쌍한 정치에 맞서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 점점 확대되는 불만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며, 점점 늘어나는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이 시온주의를 이 지역 역사의 단순한 각주에서 위협적인 한 장으로 뒤바꾸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대조적으로 시온주의 공동체는 연대와 지도부의 측면에서 많은 성취를 이룬 상태였다. 시온주의 공동체가 영국식 식민주의와 자체적인 식민주의를 모두 활용한 반면,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자기 땅에 대한 이중적인 식민주의 구상에 대처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농촌에서는 반 봉건적이고 도시에서는 권위주의적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명사들의 정치라는 협소한 세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정치 엘리트들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상황에서 이런 편협성은 마비와 정체를 의미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온주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한 토대를 구축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공동체를 결집시키는데 집했다.


동유럽주의는 정착민들의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핵심을 차지했다. 문화 엘리트들이 1920년대에 상당한 비중으로 팽창하면서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규범, 표준, 야망, 요구 등을 공식적으로 형성했다. 이 공동체는 완전히 서구문화의 일부가 되기를 열망했고, 자신들의 사회에서 중동이나 아랍의 특징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추구했다. (147쪽)


유대인 정착민 증가와 팔레스타인 봉기


1929년에 벤구리온은 땅이 지출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3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유대인기구의 토지 매입과 농업 식민지 건설이 전체 지출의 40퍼센트를 차지했고 전체 투자의 약 75퍼센트가 이런 용도에 할당됐다. 돈과 땅의 결합에 대한 이런 인식 덕분에 시온주의자들은 토대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쪽은 이런 경영 능력이 전혀 없었다. 민족주의 명사들은 기껏해야 임시적인 방식으로 씨족에 기초한 소작인들의 농업 · 경제생활을 이끌었을 뿐, 사회 전체에 경제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명사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경제적 독립을 부여하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때늦은 시도로 미약한 움직임에 불과했으며, 이런 시도조차 씨족을 경계로 분열된 채 민족주의의 대의에 이바지하지 못했다. 대부분 시기 동안 지도부는 경제보다는 상위 정치에 초점을 맞추었다. 


1939년까지 계속된 1936년 봉기를 설명해 주는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식민지배 아래서 팔레스타인 농촌이 빈곤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빈곤화는 처음에 팔레스타인 농촌을 정치화하면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부여했으나 나중에 위임통치의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이 도래했을 때 사회를 불구로 만든 사회경제적 재앙이었다. (160쪽)


영국의 줄타기 정책과 유대 정착민의 반란


영국은 1939년 백서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민감한 반응에 대비하고자 했다. 백서는 밸푸어선언을 철회한다는 1930년의 약속과 유대인의 이민 및 토지 매입을 제한할 것을 되풀이했다. 백서의 목적은 유럽의 상황이 명쾌해질 때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제 이슈브(이스라엘 건국 전의 유대인 팔레스타인 이주자들)는 자기 나름의 반란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설적인 오드 윈게이트Orde Wingate 같이 시온주의에 동조적인 영국군 장교들의 도움 아래 불법 이민, 토지 취득, 준군사조직 결성 등의 비밀 활동에 나선 것이다. 이 반란을 통해 등장한 시온주의 공동체는 과거보다 더 강해지고 단호해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군사력에 매혹되었다. 당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이 협상을 통한 해결책에 비해 우선시되는 때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훗날 이스라엘의 군국주의로 변신하는 시온주의적 군국주의가 등장했다. 


군사적 노력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하부구조의 구축이었고 하른 하나는 좀 더 도발적인 쪽이었다. 하부구조를 창출하는 과정은 하임 바이츠만 같이 신중하게 하나씩 이슈브의 군사력을 구축하자고 주장한 온건한 엘리트 성원들을 밀쳐내는 과정이었다. 스파르타 노선에 입각해 시온주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아하드 하암 Ahad Ha’am 같은 초기 시온주의자들이 품었던 아테네식 전망을 포기한 다비드 벤구리온 같은 강경한 인물들이 바이츠만 대신 들어섰다. (176쪽)


공존의 사례들


많은 사례들에서 용감한 사람들은 유대인 프롤레타리아(하층 중간계급 및 노동계급으로 변신하고 있었다)와 가난해진 농촌 원주민과 미숙련 도시거주자들(자기 나라에서 서서히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이의 충돌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하이파가 계급적인 연대와 두 민족 또는 비민족적 a-national 협력을 경험할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장소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이파는 유대인, 기독교도, 무슬림 공동체의 규모가 서로 비슷한 도시였다. 1920년에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시리아와 이집트 출신 아랍인 등이 철도 조차장과 작업장, 전신, 체신 등의 부문에서 팔레스타인 최초의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비단 계급의식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존의 사례들을 낳았다. 1936년 반란으로 공존의 패턴이 방해를 받기는 했지만, 많은 중요한 생활 영역에서 협력이 계속되었다. 공존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아랍인과 유대인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봉기를 둘러싸고 분열했다. 그러나 실제로 게릴라 전투가 벌어진 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공존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 쪽보다는 시온주의 엘리트들이 협력을 향한 본능을 압살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 유대인 지도부는 아랍-유대 직종 조직의 토대를 무너뜨리느라 분주했다. (184쪽)


2차 대전과 이스라엘 건국, 대재앙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시기에 걸쳐 각기 다른 정도로 팔레스타인에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 젊은이들은 영국군에 입대해 유럽에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1941년 여름에 (전前 대무프티의 축복과 지원 아래) 바그다드에 수립된 정권 같은 친독일 성향의 아랍 정권틀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싸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을 눈앞의 현실로 만든 것은 이 땅에 주둔하면서 팔레스타인을 거대한 병참기지로 바꾸어 놓은 엄청난 수의 영국군 병사와 군 인력이었다. 팔레스타인은 거대한 군 주둔지였고, 이 때문에 외국인 병사들의 수가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일자리도 늘어났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전시라는 조건을 유대인들을 위한 쪽으로 최대한 활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에게 극히 중요한군대 경험을 주기 위해 전쟁을 활용한 지도부의 능력이었다. “우리는 마치 1939년의 반시온주의 백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독일인들에게 맞서 영국군과 함께 싸울 것이며, 마치 독일과의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백서에 맞서 싸울 것이다." (벤구리온)


시온주의 지도부는 유대인 입국이 법적 허용치를 넘어서자 성공적인 불법 이민 캠페인에 착수했다. 신체적으로 적합하고 올바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에게 우선권이 주어졌고 때로는 이런 사람들만 배타적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호마 homa 와 미그달 migdal 즉 ‘울타리’와 ‘감시탑’이 시온주의가 채택한 방식이었다. 이런 전술은 위임통치령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법률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법률의 규정에 따르면 장래에 정착하기 위해 기초적인 기반 시설을 세우면 정착 자체가 기정사실이 되었다. 영국 정부에게는 정착민들을 퇴거시킬 여력이 없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매우 다른 경험을 했다. 아민 알후사이니는 아랍 각국의 수도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베를린으로 가서 나치의 선전기구에서 일함으로써 승전국들의 눈에서 아랍 민족운동의 대의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인접 아랍국가 출신 정치인들과 그들의 현지 부하들이 이미 정치적 풍경에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공동체에는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공식 지도부가 세워졌다. 아랍연맹 Arab League의 승인을 받았으며 여전히 (자말 알 후사이니가 이끄는) 후사이니 가가 지배하는 아랍고등위원회와 하심 가의 지지를 받으며 라기브 알-나샤시비 Raghib al-Nashashibi 가 이끄는 민족기구National Authority 가 그것이었다. 이런 분열은 정치 구조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193쪽) 


운스콥의 분할 계획


드라마의 각본은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쓰였다. 충돌을 끝내려 한 위임통치 당국의 앞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제 유엔에 문제 해결을 의존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유엔이 처음으로 다루게 된 심각한 지역 분쟁이었다. 


엔은 창설되면서부터 냉전 정치에 의해 마비되었다. 그러나 두 초강대국인 소련과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기본적인 윤곽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시온주의 운동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팔레스타인을 분할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임명된 유엔 공식기구인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 United Nations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즉 운스콥 UNSCOP의 11개 국가 위원들 또한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유능하고 잘 준비된 시온주의 대표자들은 이미 분할안을 완벽하게 만들어서 운스콥 위원들에게 건넨 반면, 팔레스타인과 아랍쪽은 일관된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200쪽)


평범한 일상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이 과도기를 위한 적절한 대책이나 대리 체제를 전혀 마련하지 않은 채 무작정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함으로써 생겨나게 될 비정상적인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은 이런 공백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6년 5월 이래 시온주의 지도부는 현지 주민들과 최후의 결전을 치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해결책의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들을 강제 추빙하는 구상을 검토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하나의 분명한 심적 경향이 존재했다. 그 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팔레스타인이 유엔의 해법을 거부함으로써 유대국가에게 할당된 지역, 즉 운스콥 보고서에서 이미 경계가 정해진 지역 내에서 현지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추방할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201쪽)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청소'(이스라엘 독립전쟁)


1949년 겨울에 이르자 총성은 잠잠해졌다. 전쟁의 두 번째 단계가 끝나고 팔레스타인 ‘청소’의 두 번째 단계도 마무리되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팔레스타인 도시지역이 추방과 학살의 대상이 된 반면, 1948년 5월 이후에는 농촌 지역에 사는 대다수 주민들이 이 정책의 희생자가 되었다. 유엔에 의해 유대 국가로 지정된 영토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 85만 명 가운데 16만 명만이 자기 집이나 땅에, 또는 그 근처에 남았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소수 팔레스타인인이 되었다. 나머지는 추방되거나 추방의 위협 아래 도망쳤고 수천명이 학살당했다.


겨울이 끝나고 1949년 봄이 찾아올 즈음 이 땅들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팔레스타인 농촌의 심장부인 시골은 알록달록한 그림 같은 마을들과 폐허로 바뀌었다. 1948년 8월에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마을을 불도저로 싹 밀어버리고 경작지로 전환하거나 새로운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뒤 마을의 절반이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새로운 정착촌을 위한 명명 命名 위원회가 구성되어 원래의 아랍식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변경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향후에 마을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 역시 이런 이름들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과 닮은 쪽으로 지도가 바뀐다'고 권위를 부여하면서 개명에 힘을 보탰다. (221쪽)


팔레스타인인에게 닥친 파국은 민족의 집단적 기억 속에 ‘재앙’ Nakbah으로 각인되면서 팔레스타인인을 민족운동으로 단결시키는 불을 지피게 된다. 이것은 게릴라 운동의 지도 아래 가망 없이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원주민들의 운동이라는 자아상을 갖게 된다. 한편 이스라엘의 집단적 기억은 전쟁을 영국 식민주의와 아랍의 적대 행위에 맞서 역경을 무릅쓰고 승리한 민족해방운동의 행위로 묘사하게 된다. (224쪽)


난민들


난민들의 미래에 관한 국제사회의 협의가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는 동안, 몇몇 아랍 국가들은 자국에 있는 난민들에 관해 신속한 결정을 내리고 자체적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했다. 난민의 존재는 레바논의 경우처럼 종교 간의 미묘한 균형을 극적으로 바꾸거나, 난민들이 몰려오고 요르단 강 서안을 병합함에 따라 나라 자체가 팔레스타인화될 가능성이 크게 대두되었던 요르단의 경우처럼 인종 구성을 급작스럽게 변화시켰다. 


이런 위험을 예민하게 감지한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인을 동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부터 요르단의 난민들은 요르단 체제에 충성을 나타내기만 하면 직업의 자유를 누리고 난민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새롭게 확대된 왕국에서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을 가상으로나 실제로 드러내는 표상들은 엄격하게 제거되었다. 요르단은 예컨대 레바논이나 시리아에 비해 훨씬 더 우호적난민 수용국가였다.


레바논 정부는 처음부터 난민들에 대해 비타협적인 억압과 배제 정책을 사용했다. 난민들로 인해 레바논의 미묘한 민족-종교적 균형이 어지러워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정부는 난민들을 비참한 난민촌에 가둬 두었다. 시민권에도 동일한 제약이 가해졌다. 


시리아 정부는 난민들에 좀 더 느슨한 태도를 보이면서 난민들이 개업할 수 있는 소규모 사업에 대해서는 새롭게 번창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미숙련 노동에 대해서는 레바논 정부만큼이나 가혹했다. 


난민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조건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페르시아 만 국가들이었다. 난민들은 이 나라들로 가고 싶어 했지만 실제로 간 경우는 드물었다. 가산 카나파니 Ghasan Kanafani의 소셜 <불볕 속의 사람들 Men in the Sun>에 등장하는 세 명의 허구적인 영웅, 아니 반 反 영웅들의 모험은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반영한다. (232쪽)


이스라엘 '내부의 추방'


예루살렘의 정부는 국제사회가 유엔 결의안 제194호를 통해 난민들에게 한 약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1948년 8월 이스라엘 정부는 본국 귀환 방지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마을과 도시지역 모두에서 팔레스타인인이 버리고 떠난 주택과 주거지를 깡그리 파괴하거나 유대인이 모두 접수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실제로 유엔과 국제사회가 난민 귀환을 촉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세계 여론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마을 접수를 계속 확대할 수 있었다. 남부에서는 베두인족이 그전부터 자신들의 땅이었던 곳을 비롯하여 오스만제국 말기에 소유했던 광대한 땅을 빼앗기고 유목 문화를 박탈당하는 일련의 강탈과정을 통해 강제로 그곳에 정착했다.


1950년대에 중앙정부가 국경 지대의 새로운 정착촌으로 보낸 유대인 이민자의 대다수는 아랍국가 출신이었다. 그들을 국경 근처의 버려진 팔레스타인 마을의 폐허에 옮겨 놓은 것은 여러 가지 목적에 이바지했다. 우선 이것은 이민자수용과 토지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법이었다. 


1949년에서 1952년 사이에 팔레스타인 마을 40곳이 비워졌고 거기 살던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다른 마을로 이주하거나 이스라엘 내의 곳곳으로 흩어졌다. 자기 집을 잃었지만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은 대규모 국내 난민 공동체에 합류했다. 오늘날 20만 명에 달하는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인 공동체에서 가장 정치적인 집단이다. (234쪽) 


난민촌의 형성과 '정치화' 과정


시간이 흐르면서 각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점점 영구적인 특정을 띠면서 중심부에 시장과 커피하우스와 상점이 있는 중동의 여느 소도시들과 비슷해졌다. 그렇지만 일종의 소형 도시였던 난민촌은 규모가 무척 작고 매우 과밀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학교, 식료품점, 보건소 같이 공적 기능을 하는 모든 건물에 붙어 있는 운르와(UNRWA)의 깃발이나 파란색 간판이었다. 운르와는 난민촌의 주요 고용주가 되었다. 교사 의사 사회복지사 등이 모두 운르와의 직원이 었다.


1950년대 말에 이르러 폭력과 절망은 게릴라 활동으로 방향을 틀었고 어린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이 여기에 뛰어들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이 재등장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두 측면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는 매우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아니 과도하리만치 적극적인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문회적 측면으로서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질서정연한 해체와 결합의 과정이다. 


첫 번째 측면의 주요 참가자들은 팔레스타인 민족 조직의 성원들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로운 ‘전통’ -팔레스타인 게릴라 운동-을 창조해 내느라 분주했다. 가자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운동 내의 이런 흐름을 양성한 것은 1928년에 이집트에서 하산 알-반나 Hasan al-Banna가 창건한 범이슬람 운동 조직인 무슬렴 형제단 Muslim Brotherhood 의 팔레스타인 성원들이었다. (236쪽)


아라파트와 아부 지하드, Fatah의 탄생


얼마 지나지 않아 난민 공동체는 과거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으로 정치화되었다. 정치 활동이 결실을 맺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처음에는 지도자 없이 개인주의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집트와 요르단의 약속에 어느 정도 고무된 대담한 사람들은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에서 가까운 고립된 유대인 정착촌을 상대로 무장공격을 개시했다. 


뚜렷한 정치적 감각과 민족주의를 갖춘 팔레스타인인은 점차 이런 습격을 유대국가에 대항하는 더욱 체계적인 형태의 전투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저항의 기원인 ‘투사 부대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이 새로운 ‘군대’가 지나치게 독자적으로 행동하거나 이스라엘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휘말리는사태를 원치 않았던 요르단과 이집트가 이 부대들을 감독하고 통제했다.


젊은 투사 기간요원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팔레스타인 조직인 파타 Fatah 가 생겨났다. 파타의 중심에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와 칼릴 알 와지르 Khalil al-WaZír (아부 지하드 Abu Jihad)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친구들과 함께 가자의 난민촌에서 활동하면서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민족 조직을 세웠다. ‘팔레스타인해방운동’이라는 뜻의 아랍어 머리글자를 거꾸로 하면 ‘승리’라는 뜻의 파타가 된다. 1954년에 이르러 파타는 이미 이스라엘을 상대로 일련의 소규모 파괴 공격을 개시한 상태였고, 무슬림형제단 조직을 활용하여 이집트 군대에서 ‘투사들’을 빼내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237쪽)


1950년대 말에 이르러 파타 같은 조직들의 노력으로 수립된 도시의 정치 활동은 민족적 지향에 관한 뚜렷한 의식을 낳았다. 10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각지에 흩어져 있던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은 각 정당의 강령과 담론을 통해 1948년의 재앙 이후 시대에 자신들을 인도해 줄 팔레스타인의 두 가지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과 난민의 귀이 그것이었다.


이제 젊은 세대가 나이 든 가부장 세대를 밀치고 우선권을 차지했고 여성들이 공적 무대에서 더욱 중심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으며, 씨족은 지배력을 거의 완전히 상설한 채 핵가족에 밀려나고 있었다.


'아랍 냉전'과 중동정치


1958년에서 1964년 사이에 불어닥친 패권을 둘러싼 격렬한 정치투쟁인 ‘아랍 냉전’은 팔레스타인의 정치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것은 이중적인 대결의 형태를 띠었다. 한편으로 나세르와 그 동맹자들이 전통적인 친서구 아랍 군주국들과 경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나세르가 1958년에 이라크에서 하심 왕조를 무너뜨린 압드 알-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 같은 급진적 지도자들과도 대결했다.


1958년, 나세르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일하여 통일아랍공화국 United Arab Republic(UAR)을 수립했다. 팔레스타인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비롯한 군대는 면밀한 주시 대상이 되었다.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허약한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연결망의 일부였던 것이다. 파타의 역할이 모양을 갖춘 것은 이런 지정학적 상황속에서였다. (259쪽)


이스라엘의 '근대화'와 민족국가의 '발명'


1956년 이후 이스라엘의 정당정치 내부뿐 아니라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의 게릴라 운동과 비밀 조직의 형태로 팔레스타인 정치의 급진주의가 제도화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회는 매우 다른 변화를 거쳤다.


융합과정은 조야한 근대화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유대인 공동체는 현대적인 서구사회와 유럽 출신의 토착 시온주의자들, 그리고 근대화를 고대하는 많은 비서구권 동유럽이나 동양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인, 아랍국가 출신 유대인, 초정통파 유대인 등이 이런 집단이었다. 히브리 대학에 신설된 사회학과의 학자들은 근대화 이론을 가르치는 동시에 정부에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지를 조언할 수 있었다.


히브리어의 부활은 시온주의의 가장 인상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를 가져왔다. 언어가 부활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히브리 문화가 발명된 것이다. 옛 성서의 언어가 현대적이고 변용 가능하며 영감을 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군데군데 박힌 현대 영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언어를 만들어 내면서 위태위태한 발을 내딛은 이후, 이스라엘의 문필가, 소설가, 기자들은 일상의 고민과 희망을 지유롭고 유려한 새 언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언어학적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측면에서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주장이 나타났다.


이런 언어학상의 성공과는 대조적으로 세속적인 노선에 따라 유대교를 재발명하려는 시도는 한결 어려웠다. 새로운 히브리 문화의 초창기 대표자들은 종교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표명하면서 세속주의에 희망을 걸었다. 그렇지만 초기 국가의 정치는 시온주의의 세속적 요소를 종교적 진영과의 타협으로 몰아갔다. 


안정된 연정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 정당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은 벤구리온은 1953년에 종교 유무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포괄적인 종교법을 발의할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다. 1956년 6월, 마프달 Mafdal 즉 민족종교당이라는 이름의 신당이 창설되었다. 인상적인 교육망을 보유하고 있던 마프달은 이스라엘에서 유대 민족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보호하는 데 전념했다. 마프달은 또한 1967년 이후 요르단 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운동인 구쉬 에무님 Gush Emunim 이 발전하는 비옥한 토양 역할을 했다. (267쪽)


이주 이전 아랍국들의 유대인 공동체들


아랍 각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몇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라크 공동체는 바그다드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자리를 잘 잡았던 까닭에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1951년, 이라크 정부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거부하는유대인을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거의 모든 이라크 유대인이 맨몸으로 출국해야 했고 유대인의 재산은 정부가 몰수했다.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19세기 초반 무하마드 알리 치세 이래로 순조로운 생활을 영위해 왔다. 콥트 Copt 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궁정과 국가 전체에 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무렵에 파루크 Farouq 이집트 국왕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하고 무슬림 형제단도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집트는 유대인을 추방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고 결국 대부분이 이 나라를 떠나 이스라엘이나 다른 나라로 향하게 된다.


아랍 유대인 이민자 집단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모로코 출신이었다. 모로코의 유대인은 아랍세계의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더 궁핍한 삶을 영위했지만 나름대로 경제와 사회의 엘리트를 배출했다. 그래서 모로코 유대인들을 불안정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시온주의자들은 전력을 다해야 했다.


이스라엘에 도착한 아랍 유대인 이민자들은 환영을 받았는데, 그 환영의 방식이란 것은 그들이 현대적인 생활을위해 원시적인 전통적 생활을 버렸으며 이에 대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현대’는 1950년대 초반 이스라엘의 경제적 현실을 왜곡하는 말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경제를 근대화하기 위해 아랍 각국의 유대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특히 정부는 당시 최대한 많은 땅을 소유하면서 식민 정착촌을 건설하는 데 노력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땅과 현대 산업은 지역 경제의 도약을 위한 이중적인 요인으로 여겨졌고, 이를 위해 정부는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미즈라히 유대인은 그런 목적에 안성맞춤이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대다수 미즈라히 유대인들은 새로운 국가에 의해 배치된 하층의 직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유럽계 유대인들은 아랍인 전체, 특히 아랍계 유대인에 대해 인종차별적으로 비하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아랍계 유대인들은 이런 관리들에게 교육, 주거, 고용 등 온갖 복지와 후생을 의존해야 했다.


미즈라히 유대인들은 손쉽게 고립되고 언제든지 팔레스타인 노동력을 대체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영원히 값싼 노동력이었다. 미숙련 일자리를 놓고 아랍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벌어진 경쟁은 이스라엘 국경에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되었다. (269쪽)


이스라엘 내 '2등 국민'들


1948년 이후 이스라엘에 도착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동화 담당 관리들에게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이스라엘 토박이들은 특히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혐오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경험 전체가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이 벌이는 영웅적 투쟁의 대립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랍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유럽계 유대인들 역시 무정하게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겉모습은 전혀 달랐을지 몰라도 필시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가 연상되었을 것이다. (279쪽)


독일의 배상은 이스라엘의 대다수 유럽계 유대인들에게는 번영을 가져다 주었지만 아슈케나지 유대인과 미즈라히 유대인 사이의 간극을 한층 더 넓혔다. 국가의 문화 정책은 유대인이든 팔레즈타인인이든 간에 아랍계에게 떠안겨진 열등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획일적인 기억의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회 내 주변 집단들의 경험은 억압되었다.


이스라엘의 군사국가화, 친미화


이스라엘 군대는 아랍계 유대인을 서구화하려는 노력의 선두에 섰다. 그렇지만 군대 내에서도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분리가 적용되어, 보통 마지못해 징집된 미즈라히 유대인들에게는 병참 보직이 주어졌으며, 이는 특공대 병사와 공군 조종사를 존경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위신과 제대 후 사회 경력에 계속 오점으로 작용했다. 


이런 식으로 군대는 근대화나 사회화의 대행자 역할을 하기보다는 군사화를 장려했고,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대외 관계를 모양 짓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군사주의적 민족주의는 끊임없이 업적을 이루어야 했지만, 또한 어려서부터 계속 교의를 주입받아 온 많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반응을 요구하고 실제로 이끌어 냈다. (275쪽)


벤구리온은 미국을 흠모했고 유대 국가와 초강대국 미국의 동맹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또한 이스라엘 내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특별한 열정을 보였고 처음부터 이스라엘 문화를 친미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매카시즘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당시에 이런 행동은 반가운 유대의 표시였다. (271쪽)


1967년 점령 이후의 이스라엘


무력 저항이든 평화적 저항이든 일체의 정치적 저항에 대해 군대가 이토록 가혹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부여한 법적 지위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점령 직후부터 이 두 지역을 군사지배가 적용되는 ‘보호관리 지역' territory under custody 으로 선포했다.


1968년 1월 이스라엘 내무장관은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 골란 고원은 ‘적의 지역’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의 경우에만 이스라엘 법을 적용하여 소규모 드루즈 공동체에 시민권을 부여했고 다른 지역에는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에 유대인을 정착시키고 팔레스타인인을 추방하고 집단 처벌을 가함으로써 제네바 협약의 거의 모든 조항을 위반했다. (309쪽)


이스라엘 내의 정치적 스펙트럼


‘지금 평화를’은 1950년대에 모셰 샤레트가 설파한 시온주의적 실용주의의 철저한 계승자였지만, 위임통치기에 '두 민족국가'를 주창했던 브리트 살롬과는 공통점이 없았다. ‘지금 평화를’은 시온주의라는 큰 틀의 합의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고 대안적인 패러다임이나 담론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지금 평화를’의 왼쪽에서는 새로운 운동체인 예쉬그불 Yesh Gvul (‘한도가 있다’)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공공연하게 설파했다. 나중에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에게도 이 호소가 퍼져 나갔다.


이스라엘에서 통용되는 언어나 언론과 학계에서 이용하는 정치 담론에서 이스라엘의 ‘평화진영’이란 ‘좌파’와 동의어였다. 이스라엘의 평화진영은 1973년 전쟁 이래 전적으로 외교적인 책략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이것은 1973년 이후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 수가 점차 늘어난 집단과는 무관한 게임이었다. (347쪽)


미즈라히 유대인 보수파의 정치운동


이런 집단들의 문제를 외면한 ‘좌파’의 실책은 그들을 소외시켰고, 이 집단들 가운데 일부는 ‘우파’, 즉 ‘반 反 평화’ 진영으로 이동했다. 이런 방향으로 이동한 집단은 크게 둘이었다. 미즈라히 유대인과 초 정통파 유대인이 그들이었다.


미즈라히에 기반을 둔 새로운 운동이 세 가지 나타났다. 빈민가와 가난한 지역의 활동가 그룹인 오할림 Ohalim(‘천막)은 점령 지역의 유대인 정착촌 확대에 지나치게 투자한 것도 빈곤을 야기한 부분적인 이유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그룹 ‘사라져 가를 위한 운동’ TAMI 은 단명에 그쳤다.


세 번째이자 가장 성공한 것은 정체성의 정치에 기초한 그룹인 샤스 Shas 운이었다. 초정통파 미즈라히 유대인의 운동인 샤스운동은 1984년에 아슈케나지가 지배하는 초정통파에 대항하는 미즈라히 유대인들의 반역의 일환으로 시작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미즈라히 유대인의 사회·정치 운동이 되었다. (348쪽)


레바논 전쟁 이후- '상층부 운동'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봉기


레바논 전쟁 이후 나머지 팔레스타인인들은 독자적인 의제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전쟁 전에 두 집단-점령 지역의 팔레스타인인들과 튀니스로 본부를 옮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로 가까워졌다. 이 과정이 낳은 위험은 난민 문제를 부차화하면서 이스라엘의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이 공동의 의제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주변화는 불화를 감당할 만한 여력이 없는 공동체에 불만의 씨앗을 뿌렸다. 의제의 융합은 결국 1987년 12월의 인티파다로 귀결되었다. (355쪽)


레바논 전쟁 이후 시작된 이른바 평화과정의 새로운 시도는 세 방향으로 나아갔다. 첫 번째는 얽히고설킨 레바논의 분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이 시도는 1985년에 이스라엘, 시리아, 시아파 민병대, 레바논 정부사이에 만족스럽지 못한 힘의 균형이 이뤄지는 것으로 끝났다. 


두 번째 방향은 야세르 아라파트와 후사인 국왕 사이의 기묘한 화해였다. 양자의 화해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요르단 강 서안의 운명을 놓고 이스라엘과 교섭하는 권한을 하심 가의 왕에게 어느 정도 위임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세 번째 방향은 점령 지역 내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에서 정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직업적 · 지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 공개적인 대화였다.


후사인 국왕은 페레스와 라빈을 상대로 일련의 사적인 비밀 교섭을 통해 협정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이 협정의 실패로 인해 이스라엘의 ‘요르단 선택지’라는 긴시기는 마감되었지만 지역 차원에서 더욱 직접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대화의 길이 열렸다. 이 대화가 한층 확대되면서 얼마 동안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둘러싼 교섭에서 유일하게 남은 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1987년 말에 팔레스타인 봉기가 발발한 뒤에야 유효한 선택지가 되었다. (356쪽)


오슬로 계획의 배경 


오슬로 계획은 이스라엘의 시온주의 좌파가 고안해 낸 것이었다. 노동당 운동원인 그들은 노동당의 전통적인 입장을 넘어서는 한편 노동당 왼쪽의 시온주의 정당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법에 기초하여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합의를 추구할 것을 위임받았다.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난민의 귀환권을 계속 주장했으며, 유대인 정착촌이 없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완전히 독립 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역사에서 최초로 민족 이데올로기의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교섭 가능한 대상이 되었다.


이 새로운 실용주의는 구체적인 상황 전개를 모태로 탄생한 것이었고, 변화된 상황은 다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약화시켰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지지하는 초강대국 소련이 소멸하고, 걸프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입장 표명에 뒤이어 사우디아라비아가 재정 지원을 축소하고, 1982년 레바논에서 철수한 뒤 아랍 세계 전체와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운이 전반적으로 쇠퇴한 것 등이 변화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1974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장구한 과정 즉 무력과 외교를 섞어 가면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중동의 실용주의 세력으로 전환시킨 과정의 일부였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1992년 선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 유대인 사회는 점령한 땅에서 즉시 철수할 의사를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정부에 기꺼이 기회를 주려고 했다. (374쪽)


공존의 모델


팔레스타인과-이스라엘의 통일된 땅에서 공동의 삶을 위한 미래의 모델이 어떠할 것인지를 살짝 들여다 보자. 21세기 초에 갈릴리 지방에서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어느 정도 인구학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의 다른 팔레스타인계 중심지인  와디아라 지방에서는 유대인이 오히려 소수이다. 이런 예외적인 현실은 무척 홍미롭고 매력적인 공존과 공유의 기획을 낳고 있다.


이를 보여 주는 훌륭한 사례는 전통적인 올리브유 생산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유대 여성들이 설립한 조직인 갈릴리 조합 Sindyanat al Galil 이다. 야드베야드 yad be-yad(손에 손잡고)는 갈릴리 지방에 아랍-유대 공동 학교를 개설한 비정부기구이다. 2004년에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시민들이 이스라엘을 북부에서 남부로 양분하는 6번 고속도로를 나라의 허파를 이루는 녹지로까지 확장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반대하는 공동 시위를 여러 차례 벌였다.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이 섬들- 합작회사, 노동자들의 협동조합과 쟁의행위, 교육 체제, 생태적 기획, 정치 활동 등-은 사람들에게 차별과 억압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은신처가 되어 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모델을 제공하기도 한다. (4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