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대담 | 산책자 | 2008년 07월
굉장히 어려우면서, 또한 재미있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은 모두 여성이다. 버틀러는 젠더와 관련된 정치이론을 발전시켜온 사람이고, 스피박은 서발턴 문제에 천착해온 사람이다. 책은 '국가/민족국가/주권'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담을 싣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서발턴의 목소리를 강조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하지만 소수자의 감수성이 물씬 묻어난다. 여성, 원주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자들, 팔레스타인의 난민들, 이 모든 소수자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젠더 문제에 대해 정색하고 고민하거나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사회에서 나는 늘 마이너리티다. 이유는 하나다. 여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공부를 잘 하고 그럴싸한 직장에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들, 몇달 전 목수정씨가 경향신문 칼럼에서 썼던 대로 '여성은 사회의 검둥이'일 뿐이다. 그것이 구미권이든, 유아 수준의 판단력을 지닌 네티즌들이 틈만 나면 '꼴페미' 운운하며 지랄 떠는 한국이든 간에.
나는 민족이 싫고, 민족 국가가 싫다. 그것들에 내포된, 그것들을 주장하는 자들이이 늘 강요하고 싶어하는 이데올로기가 마이너리티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분석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생래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압박감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민족/민족국가를 운운하는 자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아, 갑자기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가 떠오르면서 머리 복잡해지려고 한다. 끊어버리자!) 그들은 기득권을 옹호하며, 누군가를 배제하며, 자기들만의 선을 그으려 하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결국은 누군가를 못살게 하면서 자기들끼리 잘 살거나 혹은 잘 사는 척이라도 해보자 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버틀러와 스피박은 기존의 논의(정치적 담론은 물론이고 학술적인 측면에서도)에서 늘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아예 틀 밖으로 쫓겨나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배제되는 사람'과 '그들을 배제하는 방식'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그래서 어려우면서도 신선하다. 근래 왜 내가 서발턴 혹은 마이너리티와 관련된 책, 그리고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룬 책들을 자꾸 골라내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여성이라는 아이덴티티 자체)이 그렇게 이끌고 간 것이 아닐까 싶다.
버틀러와 스피박의 대화는 국가와 주권에서 민족으로,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에 붙잡힌 수감자들의 인권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정치적 박탈 상태로, 자본에 의한 전지구적 '해체'에서 '비판적 지역주의'라는 거대 기획으로 종횡무진 넘나든다. 그래서 따라잡기 숨가쁘지만, 머릿속을 확 틔워주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래, 이런 것들을 '상상'해야 하는 거야!
두 사람이 2006년 5월 UC어바인에서 했던 대담을 정리한 것이라는데, 114쪽 분량에 글씨도 크고 줄 간격도 넓다(그런데 양장본이다;;). 뒷부분에 20쪽에 걸쳐 옮긴이의 해제와 후기가 있다. 이 정도면 배꼽이 배의 5분의1인 셈이다.
대담 내용이 워낙 어려운데다, 대담자들의 학문적/실천적 이력을 모르는 사람이 읽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인 듯하다. 스피박의 글들은 그나마 두어번 접해보기라도 했지, 버틀러는 처음이기 때문에 나 역시 몹시 무리했다...
버틀러: 우리는 ‘국가 없음’의 상태를 특정한 서사와 비유적 절차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정치적 영역을 빼앗기고 자연상태로 ‘귀환한다’는 식이지요. 물론 잔혹 이런 서사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으로 수감되거나 추방된 사람들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장소에 강제로 갇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박탈의 극단적 형태라 할 수 있는 장소의 부재 placelessness 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소 부재의 현실을, 장벽과 영토 외부에 위치한 감옥을 만들어내고 감시하는 규약의 부재와 등치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규약은 주권이 통제하는 영토 밖에서 작동하는 국가권력의 변형태이며, 제국 Empire 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극도의 결핍 상태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벌거벗은 삶으로 귀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핍, 박탈, 추방 상황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권력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수감자에 대한 축소와 박탈이 복합적이고 강제적인 권력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생산되고 유지되며 감시되는 상태가 드러내는 역설입니다. (20쪽)
버틀러: 아렌트는 민족국가라는 형태, 즉 국가의 설립 자체가 민족적 소수집단을 지속적으로 추방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긴밀히 얽혀 있다고 얘기합니다. 민족국가의 적법성은 민족에서 나오기에, ‘민족적 소속’에 어긋나는 민족적 소수집단은 ‘적법하지 않은’ 거주자가 됩니다. 민족적 소속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이질적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민족국가가 자신의 적법성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적법성의 기반이 되는 민족을 문자 그대로 만들어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민족’이 상정하는 민족적 소속 방식은 특정 기준에 맞추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민족에서 단순히 누락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에 의한 분류에 따라 모자란 것으로 인식되고, 적극적으로 ‘모자란 자’로 만들어집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 없는 자라는 지위를 부여받게 되며, 이러한 지위는 이들이 권력의 장 내부에서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동시에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하는 수단이 됩니다. (37쪽)
버틀러: 최근 들어서 카를 슈미트 Carl Schmitt 와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의 저작에 관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외 상태 state of exception' 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는, 최근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헌법에 보장된 재판받을 권리를 빼앗긴 채 수감되는 사람들을 볼 때 명백히 드러나는 권력의 작동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감벤의 논의에서 주권으로 이해되는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은 통치집단 중 일부를 정치체 밖으로 몰아내고, 그들을 ‘벌거벗은 삶’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아감벤에 대해 여러 비판적 질문을 던질수 있지만, 그 중의 핵심은 어떻게 특정 집단이 ‘벌거벗은 삶’에 처하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삶이 ‘벌거벗는’ 게 가능할까요? 삶이란 이미 불가역적으로 정치적 장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 않나요?
이는 생체권력 biopower의 연장선상에서 삶과 권력의 배타적인 논리가 그리 간단하게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는 그러한 상호 배타적인 논리를 내세우려는 시도 자체가 삶을 탈정치화하며, 젠더와 단순노동과 재생산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주권이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를 정지시키고 그들을 정치체 밖으로 내쫓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은 맞는 말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내쫓겼을 때 그 누군가는 벌거벗은 삶에 해당하는 조건이나 공간에 놓이며, 그 사람만의 삶, 즉 비오스는 더이상 정치적 지위와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정치적 지위’란 시민권을 가리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를 시민권의 문제로 한정한다면, 정치적인 것에 납득하기 어려운 사법적 제한을 가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43쪽)
이러한 생각은 정치와 삶이 오직 시민권의 문제에서 만난다는 가정 아래 성립되는 것이고, 따라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다른 수단에 의해 결정되는 생체권력의 영역은 포함하지 못하게 됩니다. 국가권력은 복잡한 통치성 governmentality 이 작동하여 행사되는 것이지 단순히 주권의 행사를 통해 작동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권의 이론적 장치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개념 틀과 언어가 빈곤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정작 추방된 자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추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추방당하는 사람들, 독일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재현해야 하는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다 비슷비슷한 ‘벌거벗은 삶’의 사례가 아니라, 특정한 법제적 권력에 의해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45쪽)
스피박: 다양한 민족국가 스타일의 통합체제가 지구 도처에서 붕괴되었으며, 오늘날엔 그 기원이 오래된 다인종혼합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유럽 중앙유럽 국가들, 발칸 반도와 코카서스 지역의 국가들이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 또한 떠오르고 있지요. 이들은 아렌트가 말한 의미에서 민족 국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다수의 ‘민족’들로 구성된 거대한 국가들이죠. 하지만 전지구적 자본의 탈민족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정치구조는 여전히 국가 안에 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전지구적 페미니즘은 민족주의와 파시즘과는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국가를 일종의 추상적인 구조로 재발명 reinvent 하려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의 재발명은 민족국가를 넘어서 비판적 지역주의 critical regionalism 로 진행합니다.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점에 민족국가 문제만을 지적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반면 우리는 지금 아렌트와는 다른 국면에서 우리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해결책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최근에 생겨난 국경 해체론과 초국가적 사법관할권 등을 사유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민족에 기반한 국가의 쇠퇴는 추상적인 복지구조가 개별 국가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비판적 지역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77쪽)
스피박: 우리가 국가를 추상적인 구조로 여긴다면, 요즘의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한 전지구적 관리국가는 ‘국가없음’의 상태를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분배와 복지, 헌법주의라는 구조가 국가 안에서 소멸되고 있으니까요. (87쪽)
'국가 없음’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데에 기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자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북반구에서는 복지국가의 해체 그리고 남반구에서는 개발도상국의 해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79쪽)
제가 얘기한 비판적 지역주의는 분석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기획입니다. 역사의 신화생성적 이해는 역사가 현재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는 철학적 문제이자 실천적 정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철학과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1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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