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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푸어, 빈곤의 경계에서 말하다

딸기21 2012. 3. 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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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푸어, 빈곤의 경계에서 말하다
데이비드 K. 쉬플러. 나일등 옮김. 후마니타스.




지난해 말부터 이것저것 일처리할 것들이 많아...라고 핑계를 대기엔, 이 책을 좀 오래 붙잡고 있었다. 지난해 가을 일본 왔다갔다 할 때부터 손에 들고 다녔고, 서울 집에서는 바닥에 굴려두고 틈날 때마다 읽는다고 읽었는데... 548쪽에 이르는 얇지 않은 책이라 쳐도, 몇달에 걸쳐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미국 저술가들의 '저널리스틱한 글쓰기'와는 좀 다르다. 앨런 와이즈먼 같은 재미는 없지만, 좀 중구난방이기는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천착한다는 느낌이랄까. 책에는 미국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오만가지 '가난하게 되어버린 이유'들이 백과사전처럼 펼쳐진다. 진보-보수(민주-공화)의 진영논리를 떠나 가난에 이르는 다양하고 중첩된 경로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말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하다. 저자가 얼핏 흘렸듯이 '아프리카의 굶어죽는 사람들'만큼이야 비참하겠느냐마는...어느 선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사람이 느끼는 '비참함'의 정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법이다. 이 책은 그렇게 '아주아주 빈곤한 지경' 이하로 떨어져버린 선진대국 미국의 빈민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천식을 앓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다보니 근무에 빠지게 되어 실직을 하면서 가난해지고, 어떤 사람은 아이를 돌봐줄 도우미가 없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빈곤의 나락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어떤 사람은 어릴적의 성폭행 악몽(가난한 소녀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근친 강간을 비롯한 숱한 성폭행의 희생양이 되는 건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보내게 되고, 어떤 사람은 배움이 낮은데다 마약중독에 빠져... 대략 이런 스토리들이다.

저자가 촘촘히 기록한 '가난해지는 이유'는 제각각인 것 같지만,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빈곤의 저변에 흐르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고, 가난한 마을 혹은 가난한 도심 지역에서 살았고, 많이 못 배웠고, 결혼해서도 가정을 건실히 일구는 데에 실패했고, 그래서 자기 아이들도 교육시키지 못하고. 대략 이런 사이클이 순환된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빈곤의 악순환이다.

이들을 가난에서 탈출시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보수파들은 그 유명한 '복지여왕의 거짓말'에서 보이듯, '미국의 복지제도를 누리며 일 안하고 살아가는 게으른 자들'을 욕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라는 거창한 담론을 외친다. 보수파들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겠지만, 저자가 미국 전역을 돌며 기록한 가난한 이들은 진보주의자들의 담론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엉망진창의 그물에 걸려 허덕이고 있다.

책의 제목은 그냥 '푸어'가 아니라 '워킹푸어'다. 일을 하려고 해도, 혹은 지금 일을 하고 있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2008~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워킹푸어'는 세계의 지배적인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천식에 걸린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다가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람이 없게 하려면 의료복지를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의 야심찬 의료개혁이 거센 반발에 부딪치는 것에서 보이듯, 미국이 복지국가로 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도시 구조(가난한 도심 슬럼), 인종 문제(가난한 유색인종), 사회안전망의 문제(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복지제도), 교육 문제(가난한 지역일수록 열악한 교육현실), 정치 문제(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돈 있는 자들의 로비에만 휘둘리는 워싱턴 정가), 이 많은 것들을 한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마법의 정책은 없다는 게 문제다.

허망하다. 그러면 어찌 하라는 말인가. 내 눈에 최소한 한국은, 미국보다는 좀 나아보인다. 아직까지는. 이명박 정부 다음에 좀더 나은 정부가 들어서고, 그동안 망가져온(이명박 '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보편적 복지 개념이 좀 살아나고... 하면 최소한 미국보다는 나은 사회로 유지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희망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근거없는 낙관론일 뿐 '2012년 대한민국'을 너무 좋게 본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고개를 든다. 미국의 워킹푸어를 추적한 저자의 주장은, '결국 중요한 것은 의지'라는 것이다. 내 아이가 살아갈 한국에는 '모두 같이 더 나은 삶을 누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얼마나 굳건히 자리잡고 있을까? 요즘의 경쟁열병과 돈타령과 이기주의를 보고 있자면 한국이 더 나빠졌음 나빠졌지, 공존의 사회로 가지는 않을 것 같아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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