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디아스포라의 지식인- 책도 어렵고, 현실은 더 어렵고.

딸기21 2006. 6. 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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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지식인 

Tactics of Intervention in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1993)

레이 초우 (지은이) | 김우영 | 장수현 (옮긴이) | 이산 | 2005-02-19




요즘 디아스포라 문제에 관심이 좀 있어서 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알라딘 서재에 페이퍼를 올렸더니 역자인 김우영 선생님이 마침 그 페이퍼를 보고 친절하게도 책을 보내주셨다. 김선생님은 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를 번역하신 분이어서 여차저차해 연결이 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산에서 나온 책들을 여러권 번역하셨다.

그런 연유로 책을 손에 넣었고, 지난달 멀리 여행할 때에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배낭에 넣어갔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시간 때울겸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었다. ‘디아스포라’의 개념도 이 책에서는 아주 넓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다, 서벌턴이니 담론이니 아도르노 비릴리오 하는 것들은 나한테는 너무 낯선지라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이거, 이러다가 소화불량 걸리겠네, 하면서 대충 훑어 넘기려는데 중국 얘기가 나왔다. 저자는 ‘중국여성지식인’인데 홍콩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 미국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인데, 책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의 기본은 그런 배경에서 출발한다. 중국, 제3세계, 여성, 서벌턴, 지식인.

“1세계에서 활동하는 3세계 여성지식인이 1세계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국 밖의 디아스포라 중국지식인은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중국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

나는 담론이니 하는 것 잘 모르니까, 내가 읽은 대로 생각나는 문제를 정리하면 이런 질문이 된다. 확장하면, “서벌턴은 말할 수 없다”라는 역설에서 출발해서 그 역설을 뒤집기 위해 ‘디아스포라의 중국지식인’같은 1세계적인 3세계 인물들(3세계의 특권층 엘리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좀더 보편적인 문제로 가는데, 저자는 자기 존재조건을 가지고 스스로 ‘서벌턴 말하기’의 실험을 하는 것 같다.

책장을 덮긴 했는데, 대답은? 잘 모르겠다. 내가 잘 모르는 탓도 있지만, 저자의 논의가 ‘문제 제기’에 많이 머물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무슨무슨 유명한 유럽 철학자들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 전형적인 이름따오기 하는 것 같아 무식한 독자가 지레 거부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화불량 감수하고 꿋꿋이 넘기다가 의외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천안문 학살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해석 부분, 그리고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것 같은 ‘구체적인’ 것들이었다.

“1989년6월의 천안문 학살사건은 근대중국의 역사를 정지시켰다. 이것은 파국적 정지이다. 지난 150년 동안 중국역사가 재앙의 연속이었다면, 1989년 6월 4일의 사건은 그 완결편이라 말할 수 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중국의 전통적 부패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희망을 상징하던 정부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근대성'이라는 지속적 외상 trauma 속에서, 문화의 연속성과 (재)생산에 대한 질문이 중국 지식인을 다시 찾아와 괴롭힌다. 그것은 교육 pedagogy에 관한 질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파국에 이른 문화를 어떻게 전승할 것이며, 누가 무슨 수로 전승할 것인가?”

“‘중국인이라는 것’이 고정된 정체성의 축으로 남아 있는 한, 중국의 지식인은 근대에 반복적으로 표면화된 폭력의 중심에 있는 정치적 중앙집권주의를 영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은 전통적 지식의 정통성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정치적 반대세력의 구축에 이용하는 대신에, 다른 장소로 관심을 돌려 새로운 투쟁의 장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디아스포라 상태의 중국지식인에게 중국학이 저항의 논리적 거점이 될 수는 없을까?...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의 지식인은 전지구적 대중운동의 결과로 발생한 논의에 좀더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길은 담론의 개입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이용하여 담론을 개입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저자의 개념으로 보면 ‘중국지식인’은 띄어 쓰는 ‘중국 지식인’이 아니라 한 단어로 ‘중국지식인’이 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번역서는 ‘중국지식인’을 한 단어로 쓰고 있다.

서벌턴들이 말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고, 앞 부분 ‘서벌턴 논의 이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논문들에서는 말도 개념도 너무 복잡한데다가, “토착민은 없다, 그들을 바라보는 잘난척 서양 마초들만 있을 뿐이다, 3세계 지식인이 3세계를 옹호하는 것도 모두 1세계 논리로 1세계 시선에 봉사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면 대체 그럼 뭘 어쩌란 말이냐! 하는 거부감이 좀 들었다.

하지만 홍콩의 엘리트가 천안문 학살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오늘날의 중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일단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송두율교수 케이스를 ‘코리안 디아스포라지식인의 개입과 한국 사회의 반응’ 맥락에서 접근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천안문의 중국’보다 나았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