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의 딸, 잉그리드 베탄쿠르.
잉그리드 베탄쿠르. 이은진 옮김. 뿌리와이파리. 5/30
콜롬비아. 보떼로의 나라, 오리노코강이 흐르는 나라, 마약왕과 마피아들이 설치는 나라, 게릴라와 납치범 천지인 나라, 축구를 잘하지만 월드컵에는 못 나오는 나라. 보떼로, 네루다 같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특권층 부모 밑에서 태어난 여성정치인의 일대기.
제목이 멋지게 들려서 재작년 위인전 좀 읽어야겠다 생각했을 때 충동구매를 해놓고 펼쳐보지도 못한 채 꽂아만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즘 전철 안에서 쉬엄쉬엄 읽을 책이 뭐 있을까 해서 책꽂이를 뒤지다가 ‘적당한 두께’라는 점 때문에 이 책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뭐 대단한 기대는 안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라고 하면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의 상투적인 수식어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흥미진진했다. 과연 이 책을 쓴 사람이 정치인 맞나, 혹시 소설가 아니야 할 정도로 재미나게 써서 책장 넘기는 동안 숨이 가빴다.
미모의 어머니와 외교관·장관 출신 아버지에게서 자라난 베탄쿠르(베탕쿠르라고 써야 할 것 같은데 책에는 베탄쿠르로 돼 있다;;)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명망가 친구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다. 엄청난 특권을 누리며 자라지만 아버지는 “어떤 콜롬비아 꼬마도 누리지 못하는 호사를 네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콜롬비아 덕분이다”라면서 잉그리드에게 애국심(이렇게 써놓으면 진정 구태의연하게 들리지만)을 심어준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치에 뛰어들기엔 소심한 인물이었다.
사회적 생을 살고자 했던 어머니는 남편과 딸들을 남겨두고 홀로 정치에 뛰어든다.
소녀 잉그리드는 프랑스에서 명문학교를 나온 뒤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한다. ‘우아한 외교관 부인 생활’에 만족하는 대신 남편과 이혼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마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정치에 뛰어든다. 마피아 두목이 감옥 안에서 배신자를 처형하고 대통령과 결탁해 국정을 주무르는 나라, 의원이나 언론이나 경찰이나 마약조직 돈을 받고 검은 그물망으로 엮여 있는 나라,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탄 암살범들이 총질을 해대는 나라. 잉그리드는 그런 나라를 ‘깨끗하고 희망 있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벌인다. 이 책은 잉그리드가 태어나 ‘산소당’ 당수가 되기까지의 일을 담은 자서전이다.
1961년생. 정치인치고는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잉그리드의 이야기는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줄거리가 극적일 뿐만 아니라, 그의 투쟁과 콜롬비아의 현실이 극적이다.
더 극적인 것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 자서전의 ‘뒷이야기’다. 잉그리드는 이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서, 좌익 게릴라 반군에게 납치됐다. 아직도 그는 풀려나지 못하고 있고, 국제적인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전 외신에는 잉그리드의 러닝메이트로서 산소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함께 납치됐던 또다른 여성정치인이 게릴라 반군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체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실화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곳이 콜롬비아다.
콜롬비아에 대해서라면 노엄 촘스키가 여러 책에서 다뤘지만, 상황이 좀 복잡하다. 미국과 콜롬비아 우파 정부는 좌익 반군들이 마약을 팔아 무기를 사서 유혈분쟁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전쟁 대행사’들을 고용해 반군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인다. 코카밭을 말리겠다며 헬리콥터로 고엽제를 들이붓는다. 반군들은 자기네가 아니라 우익 민병대들이 마약범들과 연계돼 있다고 주장한다.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벌어지는 유혈사태 속에 콜롬비아는 납치산업이 기승을 부리는 나라, 용병들이 판치는 나라가 됐다(미국은 페루나 콜롬비아에서 반군 때려잡던 용병들을 이라크로 수입하려고 하고 있단다. 이건 또다른 이야기이니 생략하기로 하고).
라틴아메리카에 좌파 바람이 부는데 유독 콜롬비아에서는 며칠전 대선에서 친미 강경 우파인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이 재선됐다. 60%가 넘는 지지를 얻어 20%대 지지율에 그친 좌파 후보에게 압승을 거뒀다. 콜롬비아가 향후 미국의 중남미 외교 거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것저것 종합해볼 때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름대로 구성해보면 콜롬비아에는 마약 조직들, 즉 범죄조직들이 판치고 있고, 그들은 우파 정치인들에게 돈을 댄다. 우파 정치인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우익 민병대들이 역시 마약조직들과 연결돼 좌익 반군을 상대로 싸움질을 한다. 미국은 마약조직을 때려잡는다면서 우익 민병대나 우파정권은 그대로 놔두고 좌익 게릴라들을 못살게 군다. 그러면서 용병회사들에게 미국 ‘마약과의 전쟁’ 예산을 풀어서 미국 무기를 사들이게 만든다. 그러니 살찌는 것은 콜롬비아의 썩은 정치인들과 미국의 무기회사들이고, 죽어나자빠지는 것은 코카 재배 농민들과 좌익 반군들이다.
이 복잡한 구도 속에서 잉그리드는 ‘반 부패’를 외쳤고, 당연히 정치권의 미움을 샀다. 그는 좌익 반군들과의 대화를 주장했지만 결국 반군들에게 납치됐다. 반군들이 그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은 이렇게 꼬인 사실들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잉그리드의 자서전이 소설처럼 느껴지는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꼬인 정치적 상황이 너무나 드라마틱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정치인의 책 같지 않게 너무 솔직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조국을 위해 가족을 떠나간 엄마’와 아버지의 이혼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자라나서는 이번엔 자신이 남편을 떠나 정치에 뛰어들게 된 사연, 적들의 위협 속에서 아이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엄마의 마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어져만 가는 아이들, 그런 감정들이 너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또 부패한 정치인들과 유치한 언론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들. 실명을 마구 거론한 이 ‘정치고발서’를 콜롬비아의 우익 정권이 출판금지시켰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보떼로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미스터리같지만, 잉그리드가 빨리 석방되어서 ‘산소 같은 정치’에 성공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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