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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쇠와 자물쇠- 미셸 투르니에, <짧은 글 긴 침묵>에서

딸기21 2002. 10. 2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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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 오래된 집들은 어느 것이나 다 그럴 것이다. 나의 집에는 열쇠들과 자물쇠들이 서로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열쇠라면 내 서랍 속에 넘치도록 가득 들어있다. 가장자리를 곱게 접어 감친 V자형 맹꽁이 자물쇠형 열쇠, 속이 빈 막대기 열쇠, 이중 걸쇠를 여는 다이아몬드형 열쇠, 공격용 무기 같은 거대한 뭉치 열쇠, 레이스처럼 예쁘게 깎은 반지모양 열쇠, 어디에도 맞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인 만능 열쇠. 신비스러운 것은 바로 그 점, 즉 집 안의 그 어느 자물쇠에도 이 열쇠들에 순순히 복종하는 게 없다는 점이다. 나는 분명히 해두고 싶어서 그 모든 열쇠들을 하나하나 다 테스트해 보았다. 파스칼의 표현처럼 그것들은 식욕증진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났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어디서 난 것일까? 이 아름다운 열쇠들은 저마다 쇠붙이로 된 의문부호 모양을 해가지고서 뭣하러 여기 있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이 집안의 어떤 자물쇠도 제게 맞는 열쇠를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리하여 내 모든 열쇠들에는 맞지 않아서 하나같이 무용해진 그만큼의 해당 자물쇠들이 존재하게 되어 있다. 마치 그 어떤 심술궂은 혼령이 온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이 집 열쇠는 저 집에 저 집 열쇠는 이 집에 갖다놓기라도 한 것만 같다.
그런데 이건 대단히 상징적이다. 이 세상 전체가 한 무더기의 열쇠들과 자물쇠들의 모임이니 말이다. 인간의 얼굴, 책, 여자, 저마다의 낯선 고장, 저마다의 에술작품, 하늘에 가득한 별들 이 모두가 자물쇠들이다. 무기, 돈, 사람, 교통기관, 저마다의 악기, 하나하나의 연장들 모두가 열쇠들이다. 열쇠는 사용할 줄만 할면 된다. 자물쇠를 내 것으로 하자면 그것에 봉사할 줄만 알면 된다.
자물쇠는 닫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열쇠는 여는 행동을 상기시킨다. 그 양자는 각기 하나의 부름을, 하나의 소명을,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방향에서 형성한다. 열쇠가 없는 자물쇠는 해명해야 할 비밀이요, 밝혀져야 할 어둠이요, 판독해야 할 암호다. 인내와 고집과 칩거가 특징인 자물쇠 같은 인간이 있다. 그들은 '완전히 알기 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소!'라고 딱부러지게 말하는 어른들이다. 그러나 자물쇠 없는 열쇠는 여행에의 초대다. 자물쇠가 없는 열쇠를 가진 사람은 두 발 묶어놓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손에 자신의 열쇠를 들고 자물쇠를 닮은 것이면 무엇이든 다 넣어 돌려보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골고루 돌아다녀야 한다. 


미셸 투르니에, <짧은 글 긴 침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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