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미카엘 엔데, '기관차 대여행'

딸기21 2002. 8. 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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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봤던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Jim Knopf und Lukas der Lokomotivefhrer)>가 다시 출간됐다는 복음을 이제 접했다. 오늘 알라딘에서 '용케 생각난 김에' 미카엘 엔데의 책들을 찾아보니 길벗에서 <기관차 대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돼 있었다.


엔데는 <모모>나 <끝없는 이야기>로 아주 유명하지만 이상하게도 <짐 크노프>는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운이 좋아서였는지, 엔데의 첫 작품인 <짐 크노프>를 먼저 읽었다. 1부는 원제 그대로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였고, 2부는 <짐 크노프와 13인의 악당>이었는데 모두 두 권씩으로 돼 있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몇번을 들춰가며 보고, 삽화를 들여다보고, 머리와 가슴과 손과 간과 내장에까지 꼭꼭 간직해놨다. 그 뒤로 <모모>도 보고 <끝없는 이야기>, <거울 속의 거울>도 봤는데 모두 아주 재미있었지만 <짐 크노프>만큼은 못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것의 줄거리를 보니, 제목에서부터 의역을 해서인지 내가 생각했던 느낌이 나지를 않았다. '알퐁소 12시15분전 임금님'은 그냥 '12시15분전 임금님'으로 돼 있고(나는 전자가 훨씬 멋있다고 생각한다) , 명백하게 중국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한 리씨 공주의 나라는 '색동나라'로 돼 있다. 


외국어를 되도록 안 쓰는 것도 좋지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절대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땅이름이건 사람이름이건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데...더우기 판타지 소설에서 이름을 다 바꿔버리면 어떡하냐구...

내가 봤던 옛날 그 책은 보라색의 얇은 표지에, 당시로서도 굉장히 엉성한 편집이었다. 번역은 아마도 독일문학 번역가로서 제일 오래된 축에 속하는 차경아씨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판본은 우리 집 책꽂이에서 밖에는 본 적이 없다. 왜 거기에 그 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엄마가 차경아씨와의 인연 덕에 가져왔을 수도 있겠고, 여튼 그 책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만 아는' 소설이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엔데의 책을 봤는데, <마법학교>라든가 하는 별볼일 없는 책가지는 지금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대학시절에는 어쩐지 좀 시들해졌다. 이유는 여러가지였을 것이다. 이미 유명한 작품들은 다 번역된 뒤라서 나중에 출간된 것들은 비교적 소품 혹은 습작 수준에 불과한 것들 뿐이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겉멋이 한껏 들려 있던 대학생의 눈에 시큰둥하게 보인 탓도 있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마법의 술>로 기억되는데, 책 앞머리의 소개글이 참 웃겼다. 천사와 악마, 선과 악의 대결은 판타지의 기본 구조다. 그런데 서평을 썼던 우리나라의 어떤 이는 이 동화책을 가리켜서 '공산주의라는 악에 대항에 맞서 싸우는 민주주의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희한뻔뻔한 분석을 붙여놨다. 


독일(서독) 사람인 엔데가 정말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려는' 문화투사의 사명감을 갖고 썼는지, 아니면 우리나라의 어떤 무식이가 오바를 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엔데의 책을 여러권 읽으면서도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의 싸움'이라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냄새는 한번도 맡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튼 그 서평 때문에 곰팡이 낀 기분으로 책장을 들춰야 했던 <마법의 술> 이후로 나는 엔데를 '끊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에서 <짐 크노프>는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책' 목록의 우선순위를 항상 차지하고 있었다.


농담따먹기처럼 종종 인용되곤 했던 '자석으로 만든 영구기관', 조그만 섬나라에서 시작해 바다밑 대륙과 동방박사 이야기로 이어지는 조밀한 구조, 그리고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은 것이 용(龍)이야"라고 했던 그 이야기, 엄마 기관차 엠마와 어린 기관차 몰리...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이 책의 서평을 보니, 어릴 적 살던 골목길 찾아오듯 반가와하며 달려온 사람들이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번에 나온 책은 어린이용으로 돼 있어서 그 때 그 책 그 감동을 다시 주지는 못할 것 같다. 제대로 된 <짐 크노프>를 꼭 다시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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