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리얼리티에 질려버렸던 기억들

딸기21 2002. 9. 1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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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내가 니나와 다니엘라를 동경했다는 얘기를 했고, 빵빵이가 니나에 대한 <답글>을 올려놓은 걸 봤다. 덕분에, 생각난 김에 문학 이야기를 좀 하려고.

소설 읽은지 오래됐다-정확히 말하면, 예전에 읽던 그런 종류의 <진짜 소설>을 읽은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황금나침반> 시리즈의 마지막권을 지난 주에 끝냈지만 너무 긴 세월(3년)에 걸쳐 읽다보니 긴장감이 확 떨어져버렸고, 후배가 갖고 있는 베르베르의 <뇌>의 첫 몇장을 슬쩍 넘겨보다 놓았고, 어제는 스타벅스에 커피한잔에 팔아넘길 요량으로 <서른살의 강>이라는 연작소설집 중 전경린의 글을 보다가 <짜증나서> 집어치웠다. 

맨처음 소설에 염증을 느낀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대학교 3학년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비롯해 한국단편소설들을 연이어 쭉 읽다가 어느 순간 지쳐버렸다. <염증>이라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난 그때 정말 뇌와 내장에 종창이 생기는 것 같은 환멸감을 느꼈다. <천착> 없는 스케치, 우울하고 궁상맞은 그 내면들이 너무 싫어서. 좌도 우도 아니면서 염세만 풀어놓는 작가들이 역겨워서. 여담이지만 <오아시스>로 큰 상 받았다는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역시 내게는 비슷한 류의 염증을 느끼게 했던 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95년 무렵이었나, 나는 두번째 <소설 권태기>에 들어갔다. 얘기 듣기 좋아하는 탓에 서사적인 것, 줄거리 재미난 것을 몹시 밝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든 작가들이 <의식의 흐름>을 좇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사적 구조를 갖추지 못한 책을 장편이랍시고 내놓지 않나, 도대체 내 눈에는 <의식>으로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포장해서 벌려놓지 않나.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7년 전에도 소설을 보는 나의 눈은 아주 오만했던 것 같다.

세번째로 다가온 <안티소설모드>는 2년 전. 언젠가 마냐님 글에 답글 붙이면서 한번 썼었는데 전경린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읽고 나서 나는 한국소설을 더이상 읽지 말아야지 하는 말도 안되는 결심까지 해버렸다.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 그러나 치명적인 <수준낮음>.

좋아했던 소설 이야기를 하려다가 어느새 <소설 싫어하게 된 이유>를 늘어놓은 꼴이 돼버렸는데, 어찌보면 나는 리얼리티를 견뎌내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긋지긋한거, 궁상떠는 거 미워서 보기싫어진 소설이 한두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체 <낭만> 좋아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혜린이 써놓은 <회색노트>(정작 마르탱 뒤 갸르의 <티보> 1권은 보고나서 멀찌감치 치워버렸다) 유행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멋진척 하는 어떤 옛날 여자의 글 따위는 무시하는 것이 세련된 행동이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생의 한가운데>나 <다니엘라> 따위에 뻑갔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치만 헤세의 책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여느 여고생들이 그랬듯이 내게도 주요 <코드> 중의 하나였고, 난 <한밤중의 한시간>이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따위에 오랫동안 빠져있었다. 헤세에게 <물린> 것은 <크로이체르 소나타>까지 이르는 그 모든 잡다한 책들을 읽은 뒤의 일이었다. (빵빵, 미안해, 조르바는 읽지를 않아서 ^^;;)

<염증>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지만, 십대 시절의 내가 소설 때문에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던 인물 중의 하나는 레마르크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도 그렇지만, 생일선물로 받았던 <개선문>의 장면들은 지금도 머리 속에 무채색의 명암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 책을 생일선물로 주었던 자는 대체 누구였던가) 


아주 좋아했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개선문>의 그 리얼리티에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다니엘라의 <용감한 리얼리티>가 아닌 그 지지부진한 회색빛에 말이다.

에이브 문고 중에 있었던 <조그만 물고기>와 <한밤의 소년들>류의 책들도 그 리얼함 때문에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지금껏 읽은 책 중 유일하게 덴마크 작가의 글이었던 <한밤의 소년들>에 등장하는 십대들의 방황은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흑인들의 머리를 잘라 바싹 말렸다는 <미니어처> 이야기가 나오면서 불쑥 몬도가네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리얼리티는 갑자기 <엽기>로 돌변해버렸다. 난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인간들의 광기와 비참함 혹은 무관심과 삭막함, 관계의 단절 따위에 무서워했고, 또 가끔씩은 격앙됐었다.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핵잠/물에 기쓰난다
여보 우리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죽어가는 게의 꿈벅거리는 눈을 보고 올래

황지우의 <나는 너다>에 있었던 시들. 정확하게 기억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저 시들도 그런 리얼리티들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나는 리얼리티라는 것들이 (특히 문화예술 속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많은 다른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는 걸 계속 확인할 수 있었다. 때로는 공선옥의 글들처럼 문장의 힘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린저의 인물들처럼 자존심과 자유정신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장길산>처럼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박노해의 초기 시들처럼 지리멸렬함 속에서 건져낸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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