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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내일을 가다/ (3) 독립 50년, '성찰의 시기'

딸기21 2010. 5. 4. 01:46
코트디부아르 수도 아비장 교외 코코디에 있는 아비장 국립대학교를 지난달 찾았다. 서아프리카의 중심 대학 중의 하나로 주변국들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오는 이 대학은 유럽의 대학도시들처럼 넓은 부지에 소도시같이 꾸며져 있었다.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에선 뙤약볕을 피해 그늘로 모여든 학생들이 삼삼오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올해는 1960년 ‘아프리카 독립의 봄’ 이후 50년이 되는 해다. 아비장 대학 학생들을 만나 ‘독립 50주년’의 의미와 아프리카의 장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젊은이들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었는가”라는 질문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통계학과 학생 레옹은 “우리가 쓰는 물건 대부분이 프랑스 것이고, 몇 안 되는 기업들도 프랑스 기술에 의존한다”며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그들 그늘 밑에 있다”고 말했다. 법학과 2학년 도소 페리마(22)와 마리잔(22)은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 좋아진 것 같다”며 정부가 계획하는 기념행사들에 냉소를 보냈다. 친구 도소 페리마(22)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부패했는데 우리 젊은 세대에게 어떤 미래가 있겠느냐”며 “독립은 관심 밖”이라고 잘라말했다.

아비장 대학에서 만난 도소 페리마(왼쪽)와 마리잔. 도소 페리마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고,
마리잔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두 여학생 모두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어 보였다.


“그들이 떠나고나서야 시험대에 올랐다”

프랑스 식민정부의 첫 수도였다는 상아해안의 옛 도시 그랑바쌈. 프랑스인들이 지은 낡은 2층 건물은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복도에는 백인 관료들이 흑인 원주민들을 부리는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들이 걸려있고, 전기가 모자라 낮에도 어두운 전시실에는 이 나라 여러 부족의 전통의상을 입힌 인물모형들이 서 있었다. 아름답지만 낡은 박물관을 나오면 식민지 시절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거리가 나온다.
고즈넉한 해안 마을은 철 지난 관광지 같기도 했고, 폐허처럼 보이기도 했다. 길모퉁이 담장에 ‘개교 50주년 기념’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프랑스인들이 쓰던 건물이 독립과 함께 학교로 변해 반세기를 맞은 것이다. 학교 건물은 한번도 신축·보수공사를 하지 않아 50년 전 프랑스인들이 떠날 때 그대로였다. 외세가 물러난 뒤 이 나라가 이룬 것이 무엇인지를 그 낡은 건물이 되묻고 있는 듯했다. 고즈넉한 바닷가에선 프랑스인 주민 몇명이 파도에 밀려온 쓰레기들 사이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 안정을 구가했지만 2000년대 들어 남쪽의 정부군과 북쪽의 반군 간 유혈충돌이 일어난 뒤 나라가 경제가 황폐해지고 인프라도 후퇴했다. 가장 큰 변화는 프랑스인들이 떠난 것이었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데비(39)는 “우리는 국민의식, 주인의식 같은 게 없었다. 내전으로 외국인들이 떠나면서야 비로소 시험대에 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위기가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국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 스스로의 문제와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과정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코트디부아르를 점령하고 첫 수도로 삼았다는 그랑바쌈.

그랑바쌈의 식민 시절 건물은 지금은 관광객들을 맞는 박물관이나 아트센터가 되어 있다.

'개교 50주년'. 옛 식민시절 건물이 독립과 함께 고등학교로 변했지만
그후 보수공사가 이뤄지지 않아 50년 전 그대로의 낡은 모습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각축전을 벌였던 서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베냉 등이 50년 전 독립을 했고, 동·남부 아프리카에서도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 탄자니아, 소말리아 등이 자유를 얻었다. 대륙의 가로세로로 국경선이 그어지면서 신생국가들이 우르르 탄생했다. 그 중엔 오랫동안 역사적·지리적·문화적 공동체를 구성해온 나라도 있었고, 아무 상관없는 민족들이 본의 아니게 한 국경안에 속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아프리카는 다른 어떤 대륙보다도 많은 재난과 분쟁을 겪었다. 똑같이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가난 속에 출발한 아시아 국가들이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세계의 주역으로 거듭난 것과 달리, 아프리카는 반세기 내내 갈짓자 걸음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은 이제 자원과 경제개발을 발판으로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며 ‘제2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

반세기의 성과를 묻는다

아비장 시내 두플라토 고급주택가의 독립50주년 기념준비위원회 사무실을 찾아가 지지 아돌프 카조 부위원장(오른쪽 사진)을 만났다. 준비위는 국민화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스포츠행사들과, 매스컴을 통해 독립 이후 국가 수립과 재건 과정을 직접 경험한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는 연중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직 대법관이기도 한 지지 부위원장은 솔직하게 지난 반세기를 평가했다. “여러 가지 기념행사들을 관통하는 질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지난 50년간 무엇을 이루었는가, 두 번째 그동안 이룬 자유와 성취를 어떻게 유지·발전시킬 것인가, 그리고 국민들에게 어떤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독립 100주년 때에는 최소한 지금보다 훨씬 나은 국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의 기점이 되는 2010년에 만난 아프리카인들은 축제 분위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도약의 밑거름으로 삼자’는 성찰의 분위기가 강했다. 아프리카와 다른 대륙의 발전 속도가 달랐던 이유를 자문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숨고르기를 할 때라는 인식이 많은 듯했다. 
지지 부위원장은 “코트디부아르가 속한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13개 회원국 중 작은 섬나라 카포베르데와 세네갈을 빼면 모든 나라들이 분쟁을 겪었다”면서 “왜 아프리카에서는 분쟁이 가시지 않는지, 지나온 반세기의 방향성이 맞았는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사회’가 거의 형성되지 못한 아프리카의 특수성 때문에 성찰의 분위기조차도 국가가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독립 50년에 대한 다소 냉소적인 반응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57년 독립한 가나는 2007년 옛 식민종주국인 영국의 사절단을 불러모아 50년의 성과를 홍보하고 축제를 열었다. 가나는 서아프리카에선 인프라가 가장 좋고 경제개발에 전념하는 ‘똑똑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나의 독립 반세기보다는 오히려 지난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더 주목받았다. 오바마가 상아해안의 노예무역 유적을 찾아 “아프리카의 책임과 권리”를 역설하자 그제서야 세계가 그 곳에 눈을 돌렸다. 잘 알려진대로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가나 출신이지만, 퇴임 뒤 잠시 귀국해 열렬한 환영을 받고는 다시 스위스 제네바로 가 활동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대통령인 우푸에 부아니는 군대를 키우는 대신 국가재정을 인프라 확충에 돌리고 프랑스군을 주둔시켜 치안을 맡겼다. 덕분에 주변국들처럼 잦은 쿠데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지만, 프랑스와의 단절도 그만큼 늦어졌다. 지금도 프랑스군이 주둔하면서 치안의 일부를 담당한다.
아비장대학 인문학부의 아누마타키 아케세 교수는 “사람들을 좌절케 하는 것은 50년 전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아프리카”라면서 “아직도 옛 식민지 국가들의 자원에 의존하는 프랑스도 참 불쌍한 나라”라고 말했다. 아누마타키 교수는 급여가 적어 컨설팅회사에도 적을 두고 있었다. 아비장대학은 학생 수가 5만명에 이르는데, 종이가 모자라 시험도 제대로 못 치르는 형편이었다.

진정한 독립은 '경제적 독립'에서부터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식민시절을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이지리아 라고스대학에서 만난 심리학과 학생 소쿠두는 독립 50주년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라고스에서도 과거를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시각은 극히 비판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였다. 경제적 독립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는 옛 식민종주국에 원자재를 수출하고 생필품을 사온다. 그나마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등은 중동·아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 때문에 아시아권과 교역을 늘리고 있지만 대서양 연안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옛 지배자들 없이는 여전히 지탱하기 힘든 형편이다.
단적인 예가 코트디부아르, 말리, 세네갈, 토고 등 서아프리카 옛 프랑스 식민지 8개국이 쓰고 있는 ‘세파(CFA) 프랑’이라는 화폐다. 2차 대전 종전 뒤인 1945년 프랑화 가치가 떨어지자 프랑스가 식민지들의 손실을 막기 위해 세파 프랑이라는 화폐를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 르네 플레벵은 “자비로운 프랑스가 멀리 떨어져 있는 딸들의 피해를 막아주기 위해 화폐를 만들어준 것”이라 주장했었다.
그후 수십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 나라들은 프랑스에서 찍은 돈을 ‘사서’ 자국 내에서 유통시킨다. 유로화 출범 뒤 프랑스에서 사라진 ‘프랑’은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살아남았다. 세파 프랑은 유로화에 고정환율로 묶여 있어 암시장을 없애고 환율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그 대신 수출을 늘리기 위한 개별 국가 차원의 환율정책을 쓸 수가 없다. 세파 프랑과 유로의 환율은 프랑스가 결정한다. “화폐도 못 찍는 나라가 독립국이라 할 수 있느냐”는 자조가 나올 법하다.

경제의 실패는 ‘정치의 실패 탓’이라고 아프리카인들은 입을 모은다. 정치지도자·관료들의 부패와 무능이 독립 이후 아프리카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가 됐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라고스대학 정치학과 카요데 소레메쿤 교수는 “아프리카의 부패한 지도층은 식민시대 구조 그대로 독립 국가를 통치했고 새로운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전히 부유층은 영국으로 자식들을 보내 가르치고, 영국 은행에 돈을 모아둔다”며 “심지어 식민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를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소레메쿤 교수는 지난해말 미국행 항공기 폭탄테러를 시도한 나이지리아 청년 압둘무탈라브 사례도 ‘식민지 마인드(mind)’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유명 은행가 가문에서 자란 압둘무탈라브는 중학교 때부터 토고의 영국계 학교에서 교육받고 런던에 유학했지만, 오히려 그 곳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졌다. 소레메쿤 교수는 “뿌리 없이 옛 지배세력을 추종한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테러리즘이었다”면서 “식민지 정신상태(colonial mentality)가 바뀌어야만 진정한 독립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