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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 편이 되어 싸웠던 미국과 서유럽 간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 1948년 3월. 서방은 패전국 독일 내 자신들의 관할구역을 합쳐 하나의 경제단위를 만들기로 하고는 서베를린에 마르크화를 도입하는 등 ‘서독화’를 밀고 나갔다. 여기 반발한 소련은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를 박차고 나갔으며, 베를린과 서독을 잇는 철도와 도로·수로까지 차단했다. 6월 24일 소련은 미국·영국·프랑스와 소련 등 4국으로 구성됐던 베를린 행정위원회는 폐지됐다면서 “서유럽 연합국은 이제 베를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세계를 짓눌렀던 냉전의 서막이 된 ‘베를린 봉쇄’의 시작이었다.
봉쇄 사흘째부터 미국과 영국은 항공편으로 서베를린에 생필품을 공수했고, 수출길이 막힌 서베를린의 공업생산품을 밖으로 실어날랐다. 서독과 서베를린 간 도로가 끊기자 서방국들은 공중에 다리를 놓아 매일 7300톤의 물자를 베를린에 공급했다.
이후 11개월 동안 인구 200만의 서베를린을 살리기 위해 서방은 2억2400만 달러를 퍼부었다. 동시에 서방은 동유럽 금수조치를 실시, 소련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소련은 결국 이듬해 5월 봉쇄를 풀었다.
봉쇄 당시 공수작전에 참가한 서방국 조종사들은 2차 대전의 적국이던 독일인들에 대한 미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나 베를린의 처참한 상황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게일 핼버슨이라는 미군 조종사는 굶주린 독일 어린이들에게 검을 건넸고, 점차 여러 조종사가 아이들에게 검과 사탕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은 검과 사탕을 손수건에 싸 공중에서 떨어뜨렸다. 이런 행동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옛 적국 어린이들을 위한 ‘사탕 폭탄’ 이야기가 언론에 실리면서 미국에서는 사탕모으기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핼버슨은 ‘사탕 폭격기(Candy Bomber)’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사탕 폭탄은 냉전기간 두고두고 미국과 독일 간 우정의 상징이 됐다. 독일 정부는 74년 그에게 최고의 영예인 ‘연방 대십자훈장’을 수여했다.
핼버슨은 89년 옛 유고연방 내전이 시작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미군 C130 수송기를 타고 날아가 다시 사탕을 투하했다. 미군은 2004년에는 핼버슨을 시켜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곰인형과 축구공 등 장난감을 투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60년 전 독일인들을 감동시켰던 사탕폭탄은 발칸과 이라크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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