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딸기21 2009. 6. 1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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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월 17일 미국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의 경비원 프랭크 윌즈는 후미진 계단 구석에 이상한 녹음기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이 건물 내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을 염탐하기 위한 도청 장치를 설치한 남자 5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범인들 중 한 명인 제임스 매커드의 수첩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측근의 백악관 사무실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미국을 뒤흔든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이었다.
매커드는 중앙정보국(CIA) 직원 출신으로, 닉슨 재선위원회의 경비주임이었음이 드러났다. 수사당국은 매커드 등이 닉슨 측의 돈을 받고 민주당 대선후보 조지 맥거번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도청장치를 설치했음을 알아냈다. 경찰은 수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연방수사국(FBI)가 공개하지 않은 내용들을 익명의 취재원에게 듣고 보도해 대특종을 했다.


ㆍ하야로 끝난 ‘대통령의 거짓말’

사건이 커지자 닉슨은 보좌관과 “FBI의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CIA를 움직여야겠다”며 의논을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CIA에 FBI의 조사를 방해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듬해 1월 워터게이트 호텔 침입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고 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자신에 불리한 증언이 나오지 않도록 보좌진과 백악관 법률고문을 해고하고 법무장관을 경질했다. 그 해 여름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 청문회가 시작됐다. 
TV에 방송된 청문회에 나온 닉슨의 보좌관은 “대통령과의 대화가 담긴 녹음 테이프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닉슨은 여론에 밀려 ‘일부 삭제된 테이프’를 공개했으나 오히려 비판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74년 워터게이트 조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닉슨의 측근 7명이 무더기 기소됐고, 하원은 탄핵을 준비했다.
미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에 의해 쫓겨난 대통령이 될 뻔했던 닉슨은 74년 8월8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튿날 탄핵을 피하기 위해 자진 사퇴했다. 후임인 제럴드 포드는 “닉슨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대해 무조건 특별사면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닉슨은 퇴임 뒤 모든 조사와 재판을 피할 수 있었지만, ‘국민을 속이고 쫓겨난 대통령’이라는 비난이 94년 사망할 때까지 따라다녔다.

‘숨겨진 목소리(딥스로트·Deep Throat)’로만 불려온 우드워드의 정보원은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임이 2005년에 밝혀져 다시 한번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지난달에는 뉴욕타임스 편집진이 72년 8월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개입 사실을 알고서도 묵살해 특종을 놓쳤다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로버트 펠프스 편집장이 한 기자로부터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이 연루됐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 펠프스도 뒤늦게 이 사실을 인정했다. 권력형 비리 앞에 용기를 굽히지 않았던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기자 정신의 상징이 된 반면, 어떤 이유로든 눈 감은 뉴욕타임스는 두고두고 뼈저린 실책을 곱씹는 처지가 됐다.
지난 5일에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도청장치를 설치한 5명 중 하나인 전직 CIA 직원 버나드 바커가 92세로 숨졌다. 바커의 죽음으로 워터게이트는 또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대통령의 ‘역사적인 거짓말’은 두고두고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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