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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1906년 12월 5일 평양의 돈많은 여관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찬송가 소리에 이끌려 동네 예배당에 다니면서 풍금을 손에 댄 안익태는 맏형이 일본에서 사온 바이올린에 푹 빠졌고, 평양 종로보통학교 입학 뒤에는 취주악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능숙하게 익혔을 정도로 음악에 소질과 흥미가 많았다고 한다.
집이 유복했던 덕에 여러가지 악기를 접해볼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복이었다. 1918년 숭실고등보통학교 입학 뒤에는 축음기와 첼로를 선물받았고 방학이면 서울에 와 캐나다인 선교사에게 특별 음악과외까지 받았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을 번안해 불렀던 임시 ‘애국가’를 접한 것은 3·1운동이 일어났던 이듬해 여름, 역시 서울에 와서 과외를 받을 때였다. 평양으로 돌아간 그는 학교에서 친일교사 추방운동을 주도, 무기정학을 당했다고 하는데 음악에 몰두해 있던 그가 왜 갑자기 항일투쟁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자세한 사정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반일 학생으로 쫓기게 된 안익태를 가장 안타깝게 여겼던 것은 선교사 출신의 숭실학교 마우리(E. M. Mowry) 교장이었다. 그는 안익태를 평양기독병원에 입원시키는 등 여러 방법으로 돕다가, 나중에는 설득해 일본 유학을 보낸다. 세계를 떠돌아다니게된 곡절 많은 인생의 시작이었다.
안익태는 26년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들어갔는데, 이 때부터 첼로연주자로 이름을 얻어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아버지 사망 뒤 가세가 기울자 도쿄회관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연주하며 학비를 벌기도 했다. 30년 졸업해서 평양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경찰이 막았고, 안익태는 결국 미국 유학으로 계획을 바꿨다. 미국에서도 그는 샌프란시스코와 신시내티, 필라델피아를 옮겨다녔는데 언제나 자존심은 높아서 연주자들에게 동양인이라 무시당하면 참지를 못했다. 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미국은 문화후진국이라며 36년 초에 유럽행 배를 탔다.
유럽에서 그의 멘토가 되어준 사람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였다. 스트라우스가 베를린올림픽에 맞춰 올림픽 찬가를 작곡하는 걸 보고 애국가를 지었다. 그해부터 이듬해까지 뉴욕과 헝가리를 오가던 안익태는 애국가에 합창 부분을 덧붙인 <한국환상곡>을 완성한다. 그리고 38년 아일랜드의 더블린국립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해 세계에 선을 보였다. 안익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 연주되든 합창 부분의 애국가는 반드시 한국어로 불러야 한다”는 원칙을 죽을 때까지 굽히지 않았다.
안익태는 세계적인 지휘자로 떠올랐으며 어릴 적 꿈이던 런던교향악단을 이끌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치의 혜택을 입은 스트라우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일본 여권으로 돌아다녔던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갑자기 오갈 곳이 마땅찮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46년 안익태는 10살 연하인 스페인 여성과 결혼해 스페인 국적을 얻었고 지중해의 작은 섬 마요르카에 정착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애국가는 정식 국가가 되었으나 안익태는 그 때에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 그는 65년9월16일 갑자기 쓰러져 바르셀로나로 옮겨진 뒤 그곳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주검은 마요르카에 묻혔다가 77년 7월 8일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세계를 떠돌았던 예술혼은 그제서야 고국 땅에 안식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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