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19

47. 2차 대전과 동유럽

47. 1938-1944년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동유럽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시리즈, 어느새 해가 바뀌었습니다. 이러다가 5년에 걸친 연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시간은 흐르는 법. 어느새 2차 세계대전 시기로 넘어왔군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 분할해 동유럽 공격의 장애물을 제거한 히틀러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들어갔습니다. 나치 독일은 여러 동유럽 국가들 간의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조건들을 활용해 동유럽을 공략합니다. 당시 헝가리와 불가리아는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불이익을 본 패전국들이었고, 국가사회주의 파시즘이 잘 먹혀들고 있었습니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1927년 이래로 히틀러와 강력한 연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헝가리 내부에서도 화살십자가당이라는 파시스트 운동이 성장했습니다. ..

39. 지금부터 100년 전, 일촉즉발의 동유럽

39. 1914년의 동유럽 올해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지요. 유럽에서는 곳곳에서 전쟁의 교훈을 되새기는 행사가 벌어지는 모양입니다만... 지금부터 100년 전, 위기를 향해 치닫는 동유럽으로 가보겠습니다. 당시 독일 의회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러시아와 밀착하는 데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고조돼 폭발 직전에 와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세력균형'의 시대. 한참 국력이 커진 독일이 이제는 합스부르크와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저 둘이만 친해지면 우리가 외톨이가 되니, 아예 3각 균형을 잡자'는 것. 어쩐지 제갈량의 정(鼎)이 생각나는.....

28. 왕위를 내놓은 왕가, 찢겨나간 폴란드

28. 1772-1795년 폴란드 분할 폴란드가 정점에서 밀려나 쇠락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국가를 떠받쳐줄 통합된 사회정치적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까지 폴란드는 내부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너무 힘이 강해져 왕실의 권위에 맞먹으려 했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귀족 집단들을 서로 통합할만한 실질적인 단일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랍니다. 저야 뭐 잘 모르지만서도... 귀족들의 회의체인 '세임 Sejm'은 ‘자유거부권(Liberum Veto)’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정책을 무산시켜 행정을 마비시키기 일쑤였습니다. 이 자유거부권은 귀족들이 나약한 왕실을 윽박질러 얻어낸 것으로, 세임에서 단 한 명의 귀족이 반대해도 정책이나 법안..

25. 폴란드, 스웨덴, 코사크, 러시아... 폴란드와 러시아의 기나긴 악연

25. 16-17세기 폴란드의 성쇠 한동안 머물렀던(?) 투르크제국과 이스탄불을 떠나, 다시 폴란드로 가봅니다. 야드비가 공주와 야기에워 공의 결혼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합쳐지면서 '정략결혼을 통한 왕실-국가간 결합'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1565년 루블린 조약으로 통일이 공식화되면서, 폴란드 귀족들의 관료 체제가 리투아니아 귀족사회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왕자공주 혹은 왕과 여왕의 결혼이 '나라끼리의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몽땅 다 끼리끼리 결혼한 것도 아니고... 리투아니아는 이후 모든 영역에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됐다고 보는 것이 역사가들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일방적인 관계라는 게 있나요. 폴란드인들은 리투아니..

22. 나라를 넓힌 폴란드와 '야기에워 체제'

22. 14-15세기 폴란드의 팽창 오늘은 14~15세기 폴란드로 가봅니다. 이 시기에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그럭저럭 안정됐고, 문화적으로도 번영을 구가합니다. 하지만 북쪽에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발트 해 연안에서부터 내려오는 튜턴 기사단과 점점 늘어나는 독일계 이주민 집단으로 인해 혼란이 조금씩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독일계 이주민이 세력화하면서 폴란드의 포메라니아(폴란드어로는 Pomorze- 여기를 참고하세요) 통치권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폴란드 내륙에서 발트 해로 접근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갈수록 강해지는 튜턴 기사단과 폴란드인들 사이에 14세기 내내 충돌이 심해졌지만 폴란드 정부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름이 예쁜 포메라니아... 이런 곳이로군요 ^^ 지도, 사진..

19. 14세기, 체코의 카를 대학이 세워지다

19. 14세기 중반의 동유럽 다시, 가물에 콩나듯 업그레이드되는 동유럽 상상여행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아 쑥스러워라;;) 비잔틴의 후계자 격인 군소 국가들(이 나라들엔 미안하지만)이 등장, 서유럽에서 온 깡패 십자군을 몰아낸 것까지 얘기했지요. 그 시기 폴란드 보헤미아(체코) 등에선 각각 여러 왕들이 할거를 했고요. 그럼 체코로 다시 가볼까요. 바츨라프3세(1305-06년 재위)의 죽음으로, 1290년 바츨라프2세(1278-1305년 재위) 이래 폴란드 왕좌를 차지해온 체코계 프제미슬 왕조는 끝났습니다. 왕좌가 비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룩셈부르크 공 요한(1310-1346년 재위)을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왕은 다시 한 번 귀족들에게 특전을 주는 헌장을 공표해야 했습니다. 당시 상설 국..

18. 비잔틴의 후계자들, 서유럽 세력을 몰아내다

18. 13세기 중반의 동유럽 (오랫동안 게으름 피우다가... 새해를 맞이하야 심기일전하는 척하며 다시 시작함돠. 죄송...) 13세기 중반이 되자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라틴 제국은 쇠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안에서는 봉건 영주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밖에서는 옛 정교 비잔틴 제국의 세 주자, 즉 니케아, 불가리아, 에피루스가 도전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황제 보두앵2세(1228-61년 재위)가 이끄는 라틴 제국에는 유럽 쪽 작은 땅과 콘스탄티노플 정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테네 공국과 아카이아 공국도 여전히 라틴 지배 하에 있긴 했네요. 이탈리아 쪽에선 베네치아가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베네치아는 크레타 섬을 비롯해 에게 해의 섬 대부분,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를 포함한 발칸반도의 아드리아 해안 도시..

13. 갑자기 떠오른 폴란드

13. 10세기 말~13세기 폴란드의 흥기 폴란드 민족은 963년 '갑자기' 역사의 전면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게르만계 유럽 세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잘 조직된 슬라브 국가를 만들어 짠! 하고 나타난 양상이었다고 할까요. 이 새로 뜬 나라를 다스린 것은 미에슈코1세 Mieszko I(960-992년 재위 추정)라는 부족 지도자였습니다. 미에슈코의 직책은 ‘피아스트(piast)’ 즉 부사령관이었지만 그 집안이 성공적으로 여러 부족집단들을 다스렸기 때문에 피아스트라는 말이 신생 폴란드 국가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됐다고 합니다. 17세기 초반에 그려진 미에슈코1세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명민한 미에슈코는 자신들이 이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 게르만 세력으로부터 더욱 압력..

2010 위기의 유럽

올해 유럽은 한 마디로 ‘위기’였습니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유럽의 금융중심지였던 영국, 그리고 복지국가로 명성을 날렸던 아이슬란드가 타격을 입은 것이 2년 전이죠. 그 뒤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타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유럽은 유독 심했습니다. 그리스와 아일랜드가 긴급 구제금융을 수용하고 다음 순서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거론되는 등 경제위기 여파로 유로권 전체가 흔들거린 한 해였습니다. 재정위기 발단이 됐던 그리스 사태 2009년 10월22일 신용평가사 피치가 그리스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A→A-)했습니다. 긴 협상 끝에 유럽국들이 그리스에 재정긴축안을 강제하는 대신 구제금융을 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재정적자가 GDP 대비 13%를 웃돈다는 집계가 나오면서 사태가 ..

클린턴이 카스피해로 간 까닭은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동유럽-중앙아시아를 순방했다. 닷새간에 걸친 바쁜 스케줄로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을 돌며 현안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역내 문제들에 미국이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영향권이었던 이 지역 문제에 미국이 팔을 뻗고 나온 배경이 관심을 끌고 있다. 클린턴 장관은 5일 그루지야를 방문, 그루지야와 미국의 관계가 확고하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그루지야는 미국과 긴밀한 군사적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2008년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으로 역내 불안이 고조되자 미국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루지야에 대한 무기 공급을 일시 중단시켰다. 이번 방문에서 미국이 ‘사실상의 금수조치’를 해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필립 고든 미 국무부 유럽담당 차관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