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19. 14세기, 체코의 카를 대학이 세워지다

딸기21 2013. 3. 1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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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4세기 중반의 동유럽


다시, 가물에 콩나듯 업그레이드되는 동유럽 상상여행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아 쑥스러워라;;)


비잔틴의 후계자 격인 군소 국가들(이 나라들엔 미안하지만)이 등장, 서유럽에서 온 깡패 십자군을 몰아낸 것까지 얘기했지요. 그 시기 폴란드 보헤미아(체코) 등에선 각각 여러 왕들이 할거를 했고요.


그럼 체코로 다시 가볼까요. 바츨라프3세(1305-06년 재위)의 죽음으로, 1290년 바츨라프2세(1278-1305년 재위) 이래 폴란드 왕좌를 차지해온 체코계 프제미슬 왕조는 끝났습니다. 왕좌가 비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룩셈부르크 공 요한(1310-1346년 재위)을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왕은 다시 한 번 귀족들에게 특전을 주는 헌장을 공표해야 했습니다. 당시 상설 국회가 만들어졌다는 점도 왕권의 약화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왕국들의 역사 이야기는 대개 왕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읽는(듣는) 사람도 괜시리 속으로 왕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만, 역사이건 현실이건 왕 편에 서서 보는 건 멍청한 짓이죠. 우린 왕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자꾸만 왕 중심으로 쓰게 되어 죄송하네요... 아는 게 없어서 ㅠ.ㅠ

암튼 보헤미아의 왕들은 노상 귀족들과 싸워야 했는데, 특히나 룩셈부르크 공이라는 요한은 호칭에서 보이듯 보헤미아와는 별 상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은 나름 노련한 전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로 파리에 체류하거나 유럽을 돌아다니며 튜턴 기사단과 협력해 당시 떠오르고 있던 리투아니아에 맞서거나 프랑스의 100년 전쟁에 끼어들어 싸웠습니다. 말년의 그는 눈이 멀었지만 전쟁에 계속 참가했고 결국 1346년 프랑스와 영국 간에 벌어진 크레시 전투에서 숨졌습니다. 아무래도 체코의 왕보다는 군인 역할이 어울렸던 인물인가 봅니다. 


본문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프라하에 있는 춤추는 건물. 사진/위키피디아. 
예전에 한번 포스팅한 적 있지요. 


하지만 그의 아들은 달랐습니다. 요한의 아들 카를1세 Carl I(1346-78년 재위)는 보헤미아의 황금기를 가져온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보헤미아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도 부분적으로 그 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헤미아인이라 생각했습니다. 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347년 그는 카를4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됐습니다. 


그는 황제 자리를 후대에 물려줄 안정적인 계승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1356년에는 제국의 여러 선거후들 중 보헤미아 왕을 가장 높은 위치로 승격시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카를은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보헤미아에 ‘카롤리나 법전(Maiestas Carolina)’이라 불리는 새로운 법령을 반포했습니다. 실레지아와 브란덴부르크는 보헤미아로 병합됐습니다.


체코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카를의 시대에 프라하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로 인해 프라하는 중·동부 유럽의 문화 수도로 거듭났습니다. 1348년 그는 또 라인 강 동쪽에 자신의 이름을 딴 보헤미아 최초의 대학을 세웠습니다. 카를대학은 유럽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 중 하나입니다. 황제는 프라하에서 광범위한 재건축을 진행,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왕궁과 요새들을 세우고 예술을 후원했습니다.


★카를 대학(Universita Carlova)


카를4세가 1348년 프라하에 세운 카를 대학은 중·동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입니다. 대학 본부 건물인 카를리눔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건물로 손꼽히며, 아름다운 고전 건축 양식으로도 유명합니다. 



15세기에는 개혁파 신학자 얀 후스의 영향으로 종교개혁 운동의 요람이 되었으나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가톨릭 교단의 영향 아래 놓이면서 지적 전통이 쇠락했습니다. 1882년 체코대학과 독일대학으로 분리됐다가 1920년 체코대학이 카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습니다. 나치 점령시절 한때 폐쇄됐다가 독일대학은 없어지고 체코대학만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북쪽 발트해 연안에선 튜턴 기사단이 


이 시기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튜턴 기사단입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 본부를 두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된 종교기사단입니다. (명예직이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십자군 빌미로 독일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 기사단 소속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발트해 연안을 장악하고 있었지요. 

보헤미아 이외의 북동부 유럽 지역에서는 튜턴 기사단의 영향력이 특히 강했습니다. 그들은 말보르크(마리엔부르크)를 거점으로, 남쪽의 폴란드를 향해 계속 압력을 가했습니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 기사단을 등에 업고 폴란드 지역으로 넘어왔고요. 독일과 폴란드의 이 얼키고 설킨 관계는... 참말이지, 훗날까지도 큰 문제가 되지요. 
폴란드 지배자들에겐 유감스런 일이었겠지만, 넘어온 이들은 폴란드 내의 독일어 사용자로 이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폴란드 동쪽에서는 신생 이교도 국가 리투아니아가 부상해 기사단과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브와디스와프4세 Władysław IV(1305-33년 재위)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란을 끝내고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카시미르3세 Kasimir III (카시미르 대제·1333-70년 재위)는 보헤미아의 카를 황제를 강력한 롤 모델로 삼고 1364년 수도 크라쿠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동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을 세웠습니다. 폴란드의 고등교육을 중앙 집중화하고 문화 발전을 제도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 후로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정치적 수도였을 뿐 아니라 문화의 원천이 되었답니다. 


(몇해 전 폴란드 대통령 등 정부 인사들이 대거 항공기 사고 때문에 목숨을 잃는 비극이 있었는데, 당시 희생된 이들의 장례식이 크라쿠프 대성당에서 열린 바 있습니다. 대통령을 크라쿠프 대성당에 안장하는 문제를 놓고 반론도 없지 않았지요. 그가 죽은 게 국민들 입장에서 슬프고 당혹스럽긴 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폴란드의 역사적인 인물이거나 영웅이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카시미르가 죽은 뒤 왕위는 외국인인 앙주 공 루이 Louis of Anjou (1370-82년 재위)에게 넘어갔습니다.


헝가리에서는 1301년 아르파드 왕조가 끝나고 혼란기가 이어졌습니다. 봉건 영주들과 고위 사제들, 젠트리 계급은 취약해진 왕권에 도전했습니다.


프랑스-시칠리아계 앙주 왕가의 샤를 로베르 Charles Robert (샤를1세·1308-42년 재위)는 기사제와 같은 서유럽 제도를 헝가리에 도입했습니다. 그는 귀족 계급을 왕실 밑에 복속시키고 병역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왕권을 서서히 되찾았습니다. 샤를은 또한 국가에 내는 직접세를 신설했으며 도시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는 헝가리의 전통적인 봉건 질서에 강력한 왕권을 성공적으로 침투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인 루이1세(루이 대제·1342-82년 재위)는 부다에 재판소를 설치하고 문화를 후원했으며 영주들에 대해 더욱 고삐를 죄었습니다. 그는 앙주 왕가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나폴리와 베네치아 간 분쟁(1347-1381년)에서 나폴리 편을 들었고, 그 덕에 베네치아가 갖고 있던 크로아티아 지역의 달마티아 해안지대를 빼앗아올 수 있었습니다.


루이 대제의 초상. 모피를 둘렀군요. /위키피디아



이 시기의 유럽 왕실들은 참 복잡하게도 얽혀있네요. 루이1세는 1370년 폴란드의 왕으로 공식 선출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면 "King of Hungary and Croatia and King of Poland"라고 나옵니다. 루이는 보스니아, 왈라키아, 그리고 새로 부상하던 헝가리령 몰다비아 등 발칸 내륙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해갔습니다. 또 발칸을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어막을 만들었습니다.


발칸에서는 세르비아가 14세기 중반 두샨 치하에서 영토를 최대로 넓히며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355년 그가 죽은 뒤 세르비아는 급속히 쇠락했습니다.


불가리아도 같은 전철을 밟았습니다. 1330년 세르비아에 대패해 차르 미하일 시슈만 Michael Sishman (1323-30년 재위)이 죽은 이후로 두샨이 숨질 때까지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위성국가에 머물렀습니다. 

차르 이반 알렉산두르 알렉산두르 Ivan Alexandur Alexandur (1331-71년 재위)는 오랜 세월 왕좌에 남았지만 왕정은 계속 쇠락의 길을 걸었고 그 틈을 타 지방 귀족세력들이 힘을 키웠습니다. 1365년이 되자 국가는 수도인 투르노보와 영주 이반 슈랏시미르 Ivan Sratsimir (1365-96년 재위)가 이끄는 비딘의 두 지방 세력으로 분열됐습니다.


14세기 전반기 내내 비잔틴 제국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1305-11년 스페인 카탈루냐 용병들이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족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비잔틴에 들어와 제국의 유럽 대륙 쪽 영토를 약탈하고 아테네 공국을 좌지우지했습니다. 


1321-28년에는 안드로니쿠스2세(1282-1328년 재위)와 안드로니쿠스3세(1328-41년 재위)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못 나가는 집안의 특징인 집안싸움... 이어 1341-47년에는 요한네스 팔라이올로구스 Joannes V Palaiologus (요한네스5세·1341-76년 재위)와 공동 황제였던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 Joaanes VI Cantacuzenus (요한네스6세·1347-54년 재위)간에 다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잠시 샛길로... 칸타쿠제누스(혹은 칸타쿠제네스)는 버트리스 스몰의 히스토릭 로맨틱 애정소설 <아도라 공주>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인물이죠. ㅎㅎ 주인공 테아도라의 아버지, 딸들을 각각 비잔틴 황제와 투르크의 술탄에게 팔아넘긴 잇속 밝은 아버지가 이 사람. 그렇게 팔아넘기고 주판알 두드린 끝에 마침내 비잔틴의 황제에 올랐답니다. 


암튼 싸움질 와중에 두샨마저 제국을 공략하며 혼란을 거들었고, 비잔틴은 오스만 투르크가 유럽 대륙 쪽에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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