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20. 중세의 프라하는 어떤 곳이었을까

딸기21 2013. 3. 18. 18:10

20. 14세기 중반-15세기의 프라하


프라하... 

캬... 


여기서 '캬...'의 의미는, 이름만 들어도 궁금한, 참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

프라하는 엘베 강의 지류인 블타바 강(독일어로는 몰다우 강, 헝가리어로는 몰도바 강)을 오가는 상인들이 지나던 길목에 세워진 마을이었다가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9세기 초반 체코의 부족 지도자에서 출발한 프제미슬 왕가가 이 일대 언덕들에 요새를 세우면서 서서히 커지기 시작해 행정·문화의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10세기 중반이 되자 흐라드차니 Hradčany (흐라드차니는 ‘성 주변’이라는 뜻) 언덕의 체코 요새 맞은편 블타바 강변에 소규모 유대인 상인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유대인 마을은 오래지 않아 국제적인 교역과 공업생산의 중심지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흐라드차니에는 돌로 지어진 건물은 교회 두 곳 밖에 없었다는군요. 프제미슬 대공 브라티슬라프(905-921년 재위) 시절 지어진 지리 바실리카(Bazilika Sv. Jiří 성 게오르그 성당)와 성 바츨라프에 의해 건립된 성 비타 성당 두 곳입니다. 그 외의 건물들은 모두 나무와 진흙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볼레슬라프2세(967-999년 재위) 대공은 973년 프라하를 주교 관구로 끌어올리고 성 비타 성당을 주교좌 성당으로 삼았습니다. 볼레슬라프의 이런 조치는 프라하가 독일 레겐스부르크 주교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가 프라하의 성 비타 성당. 내부가 정말 멋지군요!
저는 저런 고딕스러운 분위기가 경건하면서도 참 좋더라고요. /위키피디아


곧 베네딕토 수도원이 프라하 외곽에 세워지고 지리 바실리카에서 수도회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프제미슬 왕가는 프라하를 영토적으로 뿐 아니라 종교적, 문화적으로도 장악했습니다.


브라티슬라프2세(1085-92년 재위)는 1085년 처음으로 보헤미아의 ‘국왕’에 등극했습니다. 그는 즉위하자 프라하에 재판소를 세웠으며, 오래된 로툰다 양식(원형 지붕을 기본으로 하는 건축양식이죠. 저도 그것밖에 몰라유;;)을 살려 성 비타 성당을 새로 지었습니다.


도시는 구시가지 광장을 중심으로 교역을 통해 번창했습니다. 부유한 상인들은 시장 주변에 석조 주택들을 지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Friedrich Barbarossa (프리드리히1세)와 굳게 동맹을 맺고 있던 블라디슬라프2세 때에는 독일 상인들이 프라하에 독립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교역을 주름잡았습니다.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도시가 팽창하고 신·증축이 잇따랐습니다. 흐라드차니 성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왕궁으로 바뀌었고 낡은 지리 바실리카도 새로 지어졌습니다. 블타바 강에는 프라하 성과 상업 지구를 잇는 돌다리가 놓였습니다. 당시 중부 유럽에 석조 다리는 이것을 포함해 3개뿐이었다고 합니다.


1867년의 프라하. /위키피디아


프라하 성 부근 스트라호프 언덕에는 프레몽트레 수도회의 수도원이 들어섰습니다. 12세기 말이 되자 프라하는 50개가 넘는 교회, 왕실 귀족과 돈 많은 상인들이 소유한 수많은 석조 주택들로 가득 차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바츨라프1세가 왕위에 있던 1230년 무렵 프라하의 성곽지구와 말라 스트라나 Mala Strana(‘소구역’), 구시가지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 곳 주민들은 권리 헌장에 따라 자유를 누렸습니다. 

북유럽 중세 도시들에 많이 형성돼 있던 독일계 집단들의 규약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독일법’이라 불린 프라하의 옛 법은 도시민들에게 경제활동의 자유 뿐 아니라 자치협의회 선거, 독립적인 형사재판소 설치 등 일정 수준의 자치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법 덕에 프라하는 도시 국가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13세기에 걸쳐 서유럽의 문화가 프라하로 밀려들어왔습니다. 고딕 예술과 건축양식이 퍼져 로마네스크 양식의 옛 건물들을 대체했습니다. 독일, 이탈리아의 관습과 패션이 프라하 주민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습니다.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룩셈부르크 공 카를1세(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 시절에는 이런 흐름이 극에 달했습니다.

카를은 젊은 시절 상당한 기간을 프랑스 궁정에서 보냈으나 보헤미아, 특히 프라하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프라하를 보헤미아 왕국 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전체의 수도로 삼고 이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흐라드차니 성을 프랑스 왕궁 스타일로 개축하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비타 성당을 고딕 풍 대성당으로 바꿨습니다. 1344년에는 프라하 주교를 대주교로 격상시켰고요. 또 1348년에는 프라하에 대학을 지었습니다. 카를 대학은 볼로냐, 파도바, 파리 대학에 이어 유럽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랍니다. 황제는 당시의 최신 도시계획 디자인에 따라 신도시를 지어 대학을 구시가지 시장 거리의 소음에서 보호했다고 합니다.


카를 대학을 세운 카를4세의 동상


신도시는 이상적인 도시 형태로 고안됐습니다. 잘 조직된 대칭 구도의 광장과 거리, 통일된 디자인의 고층 주택들을 갖추고 명소마다 높이 솟은 사원들이 지어졌습니다. 엠마우스의 베네딕토 수도원은 교황청으로부터 고대 슬라브 교회 전례에 따라 가톨릭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하는 특권을 허락받음으로써 슬라브 문화가 종교 분야에서도 꽃을 피웠습니다. 1378년 카를이 죽을 무렵 프라하는 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카를의 아들 바츨라프4세(1378-1419년 재위)는 아버지에게서 문화적 관심을 물려받았나봅니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황제였지만 그는 프라하에만큼은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또 흐라드차니 궁전에서 구시가지로 거처를 옮겨, 귀족정치가 아닌 민생에 관심 쏟는 왕임을 과시했습니다. 예로부터 이런 지도자들은 꼭 있네요. ㅎㅎ

그는 아버지가 지은 카를 대학에 카롤리눔이라고 불리는 새 건물을 더 지어주었다. 바츨라프는 당시 카를 대학의 베들레헴 신학강좌에서 강의하던 진보적인 신학자 얀 후스와 친한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가톨릭 교회의 부도덕성에 반발하며 보헤미아의 사회적, 민족적 현실을 바꾸고 유럽 전체를 개조하고 싶어 했습니다.


★얀 후스(Jan Hus·1372-1415년)

보헤미아(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카를대학에서 공부하고 1396년에는 인문학 마스터 학위를 받았다. 로마가톨릭 사제로 1400년부터 이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이듬해부터는 철학부 학장과 총장을 지내면서 보헤미아의 지적 전통을 주도했고, 독일에 맞서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지도부의 부패를 비난하다가 1411년 교황 요한23세에 파문당했고 1415년에는 종교재판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신학과 사상을 이어받은 개신교 공동체인 ‘보헤미아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프라하의 카를 다리. 참 아름답네요, 도시 분위기가... /위키피디아


바츨라프 통치 기간에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에서 활기를 띠어가던 가톨릭 개혁운동의 진앙이 됐습니다. 후스의 개혁운동은 또한 15세기 이후 체코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었답니다.

하지만 후스파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지위는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