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86

바그다드, 그 후 10년 (이라크 전쟁 10주년)

10년 전 '황해문화'에 이라크 전쟁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10년 후, 다시 황해문화(2013년 여름호)에 보낸 글입니다. 2003년 1월 18일, 영하의 추위 속에서 미국 워싱턴의 의사당 앞에 수만 명이 모여 ‘전쟁 반대’를 외쳤다. 미국을 ‘깡패 국가’라 부른 것은 북한도 이라크도 이란도 아닌, 미국의 시민들이었다. 시위대의 피켓 중에는 ‘정권 교체(Regime Change)’라 적힌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위대가 원하는 정권 교체의 대상은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악마 취급을 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아니라 부시 자신이었다. 시민들은 부시가 말한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부시에게로 돌리면서 “이 악이 우리 아이들 머리위에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날 프랑스에서는 파리를 비롯한 40개 도..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이젤딘 아부엘아이시와 만나다

여덟 아이들과 단란하게 살아가던 집에 포탄이 떨어진다. 목숨과도 같던 사랑스런 딸들은 ‘조각난 몸뚱이’가 되어 방 안에 흩어졌다. 목이 달아난 딸들의 몸, 잘린 손발을 발견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이 아버지는 그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자식들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낸’ 자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촌 의사로, 이스라엘군 공습에 세 딸을 잃은 이젤딘 아부엘아이시(58·사진)가 그 사람이다. 삶을 파괴당한 뒤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팔 평화공존 운동에 나선 아부엘아이시는 “전쟁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서 의 한국어판 출..

무덤들에 경의를

오늘 아침에도 칫솔로 이를 닦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회사에 왔습니다. 랩톱 컴퓨터로 기사를 씁니다. 오늘은 야근입니다. 택시를 타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던데, 우리가 쓰는 이런 물건들이 죽으면 무엇이 남을까요. 중국의 충칭은 인구가 2800만명입니다. 이 커다란 도시 외곽에 ‘노란 택시의 무덤’이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발전해서 자가용 승용차를 모는 사람들이 늘고 자동차 총 등록대수가 1억대가 넘습니다만, 대중교통이 완전히 확충되지 않은 이 도시 주변 권역에서는 택시가 주요 교통수단이랍니다. 시민들의 발이 돼주던 택시가 수명을 다하면 적법한 절차를 거쳐 폐차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빈터에 버려집니다. 그렇게 한 대, 두 대 방치된 택시들이..

도쿄 대공습과 커티스 르메이

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군 B29 폭격기 340여대가 2400톤이 넘는 소이탄을 일본 도쿄에 떨어뜨렸습니다. 몇개월 뒤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로 이어지는 미국의 일본 패퇴작전의 서막인 ‘도쿄대공습’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그 몇년 전부터 태평양전쟁을 벌여 아시아 거의 대부분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었지만 정작 일본 ‘본토’의 국민들은 전쟁 분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합니다. 일본이 태평양 주요 전선에서 연일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군국주의 정부의 선전이 사실이 아님을, 미국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적을 상대하고 있음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것이 바로 이 도쿄대공습이었습니다. 이미 도쿄는 1923년의 간토 대지진으로 한차례 초토화된 뒤였습니다. 20여년 동안 도쿄를 재건하면서 일본 당국은 ..

진주만 공습

1941년 11월 26일, 전함 33대와 보조선 등을 거느린 일본 함대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1884-1943. 이름 참 특이하지요;;) 장군의 지휘 아래 비밀리에 태평양으로 출항, 6500킬로미터 떨어진 하와이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야마모토(아래 사진)는 일본 제국해군학교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2차 대전 때 해군 연합함대 총사령관으로 복무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 맞춰 해군 조직을 바꾸고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12월 7일 아침 일본군이 하와이의 진주만(Pearl Harbor)을 기습 공격하기 직전까지도 미국은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 교착상태를 외교적으로 풀어보겠다며 협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하와이 북쪽 400킬로미터 지점에 항공모함 6척을..

우드로 윌슨의 '14개 조항'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은 미국 28대 대통령(1913-1921 재임)이자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낸 학자이고, 또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국사 교과서에서 윌슨의 이름을 처음 봤습니다. 윌슨은 한국 학생들에게는 1919년 3.1 운동과 짝을 이뤄 등장하는 이름이죠. 윌슨의 이른바 14개 조항,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3.1운동은 다시 중국의 5.4운동을 촉발시켰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윌슨의 14개 조항, 1차 대전 후 체제의 '이상'을 담다 윌슨은 1918년 1월 8일 미 의회 상하원 양원 합동회의에 참석해 1차 대전(1914-1918)을 끝낼 ‘강화(講和) 조건’에 대한 구상을 밝혔습니다. 이 연설에서 밝힌 14개..

리비아 공격- '인도적 개입'이 어려운 이유

유엔과 국제사회는 리비아 공습이 리비아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도적 개입’임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군사행동은 통상의 전쟁보다도 훨씬 어렵다. 더욱이 지상군을 들여보내지 않고 특정 세력을 무력화하기는 쉽지 않다. 전례로 봤을 때, 자칫 사담 후세인 시절의 이라크나 코소보 사태 때처럼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민간인 피해 부담 1999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은 알바니아계에 대한 학살을 막는다며 세르비아 내 코소보를 폭격했다. 하지만 인구가 밀집한 코소보의 지형적 특성에 악천후까지 겹쳐 숱한 오폭이 벌어졌다. 나토 공습 때문에 민간인 수천명이 희생됐고, 이는 오히려 세르비아계의 보복을 불러일으켜 다시 수천명이 숨졌다. ‘학살-공습-학..

아프간전 9주년

이제는 너무나 지겨워진 아프간 전쟁... 지겨울만도 합니다. 미국이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숨겨주고 있다는 이유로 아프간을 침공한지 벌써 9년이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내년 10월 7일 저는 다시 이 블로그에 “오늘이 아프간전 10주년” 이라는 글을 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베트남전이 103개월(8년7개월)을 끌었는데 이미 아프간전은 지난 6월에 8년8개월 돌파, 베트남전보다 더 길어졌지요.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건데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1년 7월부터 미군 철수를 단계적으로 시작한다고는 했지만, 그 후로도 전쟁이 당분간 계속될 테니 이 전쟁의 기간이 12년이 될지 13년이 될지... Afghan children ..

미군 떠난뒤 중동은

미군은 이달 말 이라크를 떠난다. 이라크 내 미군 주요 기지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착착 정리되고 있다. 시리아 접경지대 등 ‘요주의 지역’을 남기고 바그다드 시내의 캠프들은 진작에 폐쇄됐다. 한때 16만명에 이르던 미군들은 9월1일부터 5만명 선으로 줄어든다. 남는 병력 대부분은 재건 작업을 지원하고 치안을 돕는 역할을 주로 하게 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임무 종료’ 선언이 발표되고 ‘눈에 보이는 미군’의 존재가 줄어들고 나면 이라크엔, 중동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바마 대통령은 철군을 강행하고 있지만,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은 23일 미군 전역병들을 상대로 연설하면서 이라크 상황에 대해 혼란스런 평가를 내비쳤다. ‘포스트워(post-war) 이라크’의 미래와 중동 정세의 향방에 대해 미국조차 혼..

아프간 사람들 '목숨값'은

지난해 9월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쿤두즈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이 ‘유조차를 납치한 것으로 보이는 탈레반 반군’들을 향해 공습을 퍼부었습니다. 나토군의 조사결과 이 공습으로 142명이 숨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179명이 숨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숨진이들은 탈레반이 아니라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었고, 어린아이들과 여성들도 많았습니다. 이 공격은 나토군 공습으로 민간인이 사실상 대량학살된 최악의 사건들 중 하나로 기록됐으며, 아프간 정부는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당시 공습을 주도한 것은 국제안보지원군(ISAF) 북부 사령부를 책임지고 있던 독일군이었습니다. 파장은 컸습니다. 2006년 아프간의 독일군이 내전시절 숨진 이들의 유골을 발로 밟거나 ‘장난감’처럼 다루는 사진이 공개돼 독일 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