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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공격- '인도적 개입'이 어려운 이유

딸기21 2011. 3. 2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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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과 국제사회는 리비아 공습이 리비아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도적 개입’임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군사행동은 통상의 전쟁보다도 훨씬 어렵다. 더욱이 지상군을 들여보내지 않고 특정 세력을 무력화하기는 쉽지 않다. 전례로 봤을 때, 자칫 사담 후세인 시절의 이라크나 코소보 사태 때처럼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민간인 피해 부담

1999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은 알바니아계에 대한 학살을 막는다며 세르비아 내 코소보를 폭격했다. 하지만 인구가 밀집한 코소보의 지형적 특성에 악천후까지 겹쳐 숱한 오폭이 벌어졌다. 나토 공습 때문에 민간인 수천명이 희생됐고, 이는 오히려 세르비아계의 보복을 불러일으켜 다시 수천명이 숨졌다. ‘학살-공습-학살’로 이어진 두달 간의 공습의 공과는 두고두고 논란을 불렀다.
19일 다국적군 전투기들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인근 미스라타에 미사일 폭격을 퍼부었다. 프랑스 전투기는 반군 거점도시 벵가지를 둘러싸고 있던 무아마르 카다피 친위부대를 공격했다고 BBC방송 등이 보도했다. 이에 맞서 카다피 측은 ‘인간 사슬’ 등의 전술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도적 개입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내걸고 군사행동을 하는 쪽에서는 그 무력으로 인한 민간인 살상을 최소화해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인간 사슬’은 이런 약점을 노린 전술이다. 자칫 다국적군 공습으로 민간인 피해라도 날 경우, 카다피가 이를 집중 부각시킬 것이 뻔하다. 이번 공격이 유엔의 승인으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러시아, 중국이 비협조적인데다 독일 등도 참전을 피하고 있다. 민간인 살상이 일어나면 참전국가들 내부에서도 비판론이 나올 수 있다.


 

지상군 없는 ‘고공전’

미국이 늘 주장해온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공격(surgical strike)’이 정말로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전 때 국제적 비난을 의식,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밀공격에 치중했다. 실제로 공습 자체로 인한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당시 미국은 1980년대 후세인과 친밀했던 시절부터 모아놓은 정보가 많았고, 91년 걸프전과 98년 제2걸프전 등을 거치며 이라크 군사시설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험지에 정보도 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오폭을 계속하고 있다. 리비아에 대해 다국적군이 정밀공격을 할수있을 만큼 정보를 갖고있는지는 의문이다.
유엔은 리비아의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만큼의 군사개입만을 승인했다. 지상군을 들여보내지 않고 조기에 상황을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자칫 상황이 그대로 교착될 수 있다. 유엔은 1990년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에, 91년에는 남부 시아파 지역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다. 하지만 후세인은 공습 속에서도 12년을 버텼다. 

사태 장기화 우려

미국은 어떻게든 리비아에의 군사개입을 최소화시켜 지상군 투입만은 않겠다는 입장이다. 실제 지상군을 들여보낼 여건도 못 된다. 미국이 쓸 수 있는 기지가 없기 때문이다.
미군을 들여보내려면 리비아 양 옆의 이집트와 튀니지에 기지를 둬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중동·북아프리카 반미 이슬람세력을 자극할 것이다. 민주화 혁명 뒤 숨죽이고 있는 극단주의의 불꽃에 기름을 부어주는 꼴이 된다.
가뜩이나 정세가 복잡한 이집트 측은 물밑에서 비공개로 리비아 반군에 무기를 대주고 있을 뿐, 리비아 공격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은 하지 않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자칫 미군을 이집트에 들여보냈다가는, 미군기지가 알카에다의 최대 공격대상이 되어버린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튀니지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상군 투입 없이, 민간인 희생을 막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고서 카다피를 얼마나 빨리 제압할 수 있을까. 조기에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동부엔 반군세력이 남아있고 서부엔 카다피 측이 온존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장기간 사태가 고착화될 공산이 크다.
1990년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내전 때 학살 참상이 벌어지자 영국은 전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 군벌세력을 내모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1994년 르완다 내전 때 국제사회는 개입 시기를 놓친데다 소극적 개입으로 일관해 대량학살을 막지 못했다.

이것저것 고민하는 사이 카다피 측의 반군 학살이라도 벌어지면 “다국적군이 개입을 하고도 못 막았다”는 비난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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