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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일기/ 굳은 마음

딸기21 2006. 8. 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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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마음(成心)

8. 우리에게 생긴 굳은 마음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떠받들면, 스승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게 되면 어찌 변화의 이치를 아는 현명한 사람들만이겠느냐, 우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지. 아직 이런 굳은 마음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우(禹) 임금처럼 신령한 분이라도 알 수 없을텐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느냐?

해설을 보니 어떤 이는 成心을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어떤 이는 '굳어진 마음'이라 해서 부정적인 뜻으로 읽는다고 한다. 이 책의 주석자는 문맥을 보아 후자를 따랐다고 하는데, 통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이다. 첫 문장, 성심을 스승으로 떠받들면 세상에 스승 없는이가 어딨겠냐고 하는 걸로 봐서는 부정적인 맥락 같기도 한데... 하물며 성심도 없으면서 무슨 재주로 시비를 따지냐는 얘기인가.

방금 전까지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를 읽고 있었다. 하필이면 시공간 얘기에, 양자론에 우주론이다. 두 책 모두 난해하기는 매한가지다. 어떤 점이 난해하냐면,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뉴튼의 세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과 다른 맥락을 얘기한다는 점이다. 장자는 곤과 붕의 세계, 나비의 꿈처럼 혼돈스러운 듯 하면서 본질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한다. 그린은 양자의 세계와 시간의 대칭성 등을 얘기한다.
장자는 '오늘 월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린은 '오늘 월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있을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 시비를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 성심과 양자적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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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다는 것은

9. 말을 한다는 것은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에는 뜻이 있지, 말을 했지만 말하려는 바가 뚜렷하지 않다면 말을 했다고 해야 할까,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말은 새끼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다른 것일까, 다르지 않은 것일까?
道가 무엇에 가리어 참과 거짓의 분별이 생긴 것일까? 참말은 무엇에 가리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생긴 것일까? 도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어진 걸까? 참말이 어디에 있기에 제구실을 못하는가? 도는 자질구레한 이룸에 가리고, 참말은 현란한 말장난에 가리었다. 그리하여 유가와 묵가가 시비를 다투어, 한쪽에서 옳다 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 하고, 한쪽에서 그르다 하면 다른 쪽에서 옳다 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

노장사상이니 禪이나 명상이니 자연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있고, 그딴거 관심 없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후자 쪽이다. 그런데 아주 코딱지만큼 장자님 말씀을 읽다보니, 애당초 자기수련용으로 읽은 것이 아닌 만큼 수양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분 말씀이 한가지 이미지로만 고정될 것은 아니다 하는 생각도 든다.
초월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저것은 주석자가 붙인 것이고 실제 문장에는 없다. 원문은 則莫若以明 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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