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최후통첩'에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18일 '결사항전'의 의지를 재천명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후세인이 권좌에서 물러나 두 아들과 함께 망명의 길을 택할 것으로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으며, 항전 선언은 충분히 예상됐던 것이었다.
지난 16일 후세인 대통령은 대통령궁에 각 부족장들을 불러모았다. 이라크 전역에 TV로 생중계된 이날 부족회의에서 후세인은 시가를 물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부족장들의 '충성서약'을 받았다.
중동에서는 후세인이 바그다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을 벌이다 죽을지언정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다고 보고 있다. 이라크 교민인 박상화씨는 "후세인은 '역사적인 인물'로 남고 싶어한다"며 "미국에 항복해 목숨을 구걸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인물"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비슷하게 보고 있다. 미국의 국제문제전문가 앤드루 크레피네비치는 "후세인은 스스로 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믿고 있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과거 후세인의 행적을 보면 숱한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은 것이 사실이다. 생후 9개월만에 고아가 돼 극도의 궁핍 속에 자란 그는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반영(反英)투쟁에 뛰어들었으나 곧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는 이집트로 건너가 가말 압둘 나세르 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보호 아래 범아랍국가 수립 운동을 벌인다. 당시 카이로대학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놓고 대학생들이 토론을 벌이는데 젊은 후세인이 총을 꺼내들고 '무력투쟁 외에 길이 없다'고 주장했던 일은 유명하다.
전문가들은 후세인이 그처럼 격정적이지만, 어려운 순간에는 냉철함을 결코 잃지 않는 이중적인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이라크에서 그다지 명성있는 인물은 아니었던 후세인은 젊은 시절 돌파력과 지략으로 바트당을 장악했다. 70년대 부통령이던 후세인은 바크르 정권을 밑에서부터 흔들어 결국 79년 숱한 이들을 죽이고 권좌에 올랐다. 80년대 수차례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모두 '피의 숙청'으로 보복하면서 버텼다. 후세인의 정권관리 방식은 정기적인 숙청으로 저항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 80년대 초반 바그다드 시내에서 반대파의 공격을 받은 후세인은 곧바로 직접 차를 몰고 방송국으로 달려가 "나는 살아 있다"는 방송을 내보내며 건재를 과시, 반대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91년 걸프전 직후 남부에서 시아파 반란이 일어나자 후세인은 "지금 이 순간부터 이라크에 시아파가 존재하지 않게 하겠다"며 무참히 진압했다.
이제 후세인은 미국과의 전쟁에 이겨 아랍 전체의 지도자가 되려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자신이 십자군 전쟁에서 서방에 맞서 이슬람의 승리를 이끌어낸 살라딘과 같은 인물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조지워싱턴대학 정치심리학과 교수 제롤드 포스트는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인터뷰에서 "후세인은 '순교'를 하려는 인물이 아니다"라면서 "그가 항전을 다짐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 쌓아온 특유의 낙관론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어느 이라크인과의 대화
"Let Iraq Live(이라크를 살게 놔두어라)"
전운에 휩싸인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반전 슬로건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라크인들은 자기네 나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미국이든 그 누구든 자신들의 생활을 파괴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어느 이라크 사람과의 대화를 옮겨본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바그다드는 의외로 평온해 보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바그다드에서 태어나서, 내 나이만큼 이 도시에서 살아왔다.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도망칠 수는 없다."
-위기상황인데도 바그다드의 경제는 비교적 안정돼 있고, 배급망도 잘 운용되고 있는 것 같다.(이라크 디나르의 대 달러 환율은 2250-2500으로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가도 올들어 큰 변동은 없다)
"그것은 이라크인들이 똑똑하기 때문이다(웃음). 이라크인들은 중동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는다."(이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다. 학위 소유자 비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라크는 막대한 자원을 갖고 있는데도 발전이 뒤쳐져 있다.
"많은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10년 넘게 경제제재를 받으면서도 이만큼 살 수 있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왕정(1950년대 하솀 왕정)시대를 기억하고 계신다. 그 때는 사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이라크 공화국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요르단의 왕정보다 훨씬 깨끗하다. 사우디 왕가는 국민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요르단은 미국의 원조로 연명한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고 있다."(이라크인들은 요르단을 거지국가라고 생각한다. 일면 사실이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말로 미뤄볼 때, 당신이 말하는 '훌륭한 체제'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사회주의 시스템을 따르고 있지만 북한처럼 폐쇄된 체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식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몹시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배가 아프거나 감기에 걸리면 나와 내 가족은 지역의 병원에 가서 저렴한 가격에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미국인들은 모두가 부자인가? 그렇지 않다. 많은 미국인들이 가난하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체제로 바뀌면, 내가 아플 때 누가 나를 챙겨주겠는가. 모두가 남남이 될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비참해질 것이다."
-후세인 정권은 분명 독재정권이다. 지난해 대통령 재신임투표에서 100% 투표, 100%의 찬성을 기록한 것을 보고 놀랐다.
"우리는 지금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적 앞에서 분열해서는 안 된다. 사담은 우리의 아버지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믿고 따른다."
-후세인 대통령은 정부 고위직들을 혈육과 측근들로 채우고 있다. 대통령의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만큼 의지할 것은 없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후세인 정권은 걸프전 때 남부 시아파 무슬림들을 학살한 것을 비롯해, 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이란 편에 섰던 적(enemies)이었다. 살해한 것이 아니라 응징한 것이다."
-북부의 쿠르드족들도 핍박을 많이 받았고, 지금은 독립을 원하고 있다.
"내 어머니는 쿠르드 지역에서 태어나셨고, 외삼촌들 몇몇은 쿠르드족과 결혼했다. 그러나 아무 갈등이 없었다. 걸프전 뒤에 그들이 독립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독립을 한다는 것인가. 쿠르드족을 탄압하는 것은 터키다. 그런데 왜 미국은 터키에 비행금지구역을 만들지 않고 이라크에 만들었는가."(미국과 영국은 1990년 이라크 북부에 쿠르드족 자치지역을 만들었으며, 쿠르드족 보호를 명분으로 이라크군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놓고 정기적으로 공습을 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고, 북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 한국 건설업체들이 이라크의 도로와 건물들을 훌륭하게 지어줬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교육비가 얼마나 드는지도 궁금해했다. 겉으로는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을 이야기했지만, 현실이 주는 중압감을 모두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라크 대학생들과의 만남
여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사담 후세인 정권의 강압에 시달리고 있는 이라크에서도 세대간 차이는 존재한다. 이라크에서도 젊은이들은 부모세대와 달리 서방을 동경하면서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삭히고 있었다.
알 무스탄시리야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에삼은 이라크의 현실에 대해 대단히 냉소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지도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두려움 때문입니다." 시내에 건축중인 초대형 모스크는 그에게 비판의 대상이었다. "비판받아 마땅하죠, 저 돈으로 병원을 차라리 병원을 지었으면." 에삼의 어머니는 5년 전 암으로 사망했다. 에삼은 자신의 어머니가 걸프전 때문에 병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매주 한차례씩 열리는 알 주무리야 거리의 헌책 시장에 갔을 때 에삼은 롱맨 영어사전의 가격을 물어보더니 들춰만 보고 내려놨다. 한 권 사주고 싶었지만 자존심 상해 할 것 같아 그만뒀다. 에삼은 한국의 교육비는 얼마나 되냐면서 관심을 보였다. 에삼은 이라크의 사회주의 체제에 불만이 많았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한국은 부유하지 않느냐"면서 "개발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다가올 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겠지만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다. "나는 나 자신만 걱정해요. '국민들'은 내가 알 바 아니잖아요."
우사마와 함께 대학에 들렀다. 원래 가이드(스파이)가 없으면 안 되는데 사정해서 들어갔다.
아바(머리쓰개) 대신 흰 블라우스 차림을 하고 서양식으로 머리를 말아 한껏 모양낸 스라는 영문과 여학생이다. 스물한살. 스라는 "아바를 쓰는 것은 의무사항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라면서 "좀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서 영문학을 전공으로 택했다"고 말했다. 스라는 전쟁이 끝나면 미국과 유럽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미국인들 모두가 우리의 적은 아니잖아요." 스라는 모델처럼 예쁘고 화려했다.
같은 과 학생인 사우젠은 졸업을 한 뒤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사우젠은 역시 대학생인 동갑내기 사촌과 약혼한 사이다. 스무살 밖에 안 된 사우젠의 이른 약혼은 친구들 사이에서 종종 놀림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결혼 뒤에도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 약혼자와 얘기는 안 해봤지만, 많은 여성들이 일을 하고 있는 걸요."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이라크에서는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 일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박봉의 공무원이나 교사들이다. 일하는 여성들은 아이를 시부모에게 맡기거나 유치원에 보내고 직장에 다닌다. "아랍 여성들에 대해서 편견을 갖지 마세요. 여기서도 여성은 사회의 절반이예요."
스라에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모양내고 예쁜 얼굴에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남녀교제는 용납되지 않으니까요. 사회의 단합을 해치는 행위로 비난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귀게 된다면? "교제는 곧 결혼이예요."
이라크에서는 일부 사립대학을 제외하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학비가 무료다. 교과서나 공책 같은 교육기자재도 정부가 제공한다. 다른 중동국가들보다 여성들의 교육율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무상교육은 91년부터 계속된 엠바고(금수조치)로 질이 많이 떨어졌고 교육자재가 없어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학교들이 태반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유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들도 많아졌다.
어느 곳에서나 대학생들은 똑같다. 사는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할테니까. 스라와 사우젠에게 "수업 끝나면 뭘 하느냐"고 했더니 집에 가서 밥 먹고 잔단다. 아니면 쇼핑하거나, 친구들을 만나거나. 얼굴이 새카만 남학생 하나가 수다에 끼어들었다. 스라의 말로는 걔가 과에서 톱이란다. 시험 때만 되면 그 친구의 노트를 복사하느라 난리가 난다나. 스라의 친구인 시바가 내게 초콜렛을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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