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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아프간, 이라크... '미군 때문에'

딸기21 2006. 5. 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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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에서


한국전쟁중 미군이 방어선을 넘어 남하하는 한국 피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도록 방침을 정했다는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서한이 공개돼 노근리 학살사건을 둘러싼 새로운 논란이 예상된다. AP통신은 29일 한국전 당시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에 보고한 `미군의 피난민 총격허용 방침'에 관한 편지를 찾아내 공개했다. 무초대사는 이 서한에서 "미군이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난민에게 경고사격을 하고 이후 계속 남하할 경우 총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침을 정했다"고 밝혔다.


◆노근리사건 당일 서한발송=
AP통신은 무초 대사의 서한 날짜가 바로 노근리 학살이 터진 그날이었다며 이 문서는 미군 방어선을 넘어서는 피난민에 대한 미군의 발포 방침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자 미 정부의 고위간부들에게까지 이 방침이 보고됐다는 첫 증거라고 보도했다.이 서한에 따르면 미군이 발포 방침은 제7기병연대의 노근리 학살사건 하루전인 1950년 7월25일에 미 8사단 고위 참모와 무초 대사를 대리했던 해롤드 노블 1등서기관,한국정부의 내무부 관리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됐다. 무초 대사는 이 서한을 쓰게 된 배경과 관련, "이같은 미국의  치명적인 전술로 인해 미국내에서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미 국방부 노근리 조사 재논란 대상으로=
AP통신은 지난 99년 노근리 학살사건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미 국방부는 16개월간 이 사건 진상조사를 벌였다. 미 국방부는 진상조사결과 "겁에 질린 병사들이 피난민 틈에 적이 숨어들어 오는 것을 우려, 명령없이  발포한 사건"으로 `불행한 비극' `비계획적 살상'이란 결론을 내렸었다. 미 육군사관학교의 전쟁범죄 전문가인 게리 솔리스는 무초 대사의 서한에 담긴정책은 "통상적인 전시 절차에 벗어나는 것으로 전쟁관련 법률의 핵심 기본원칙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미 국방부는 무초 대사의 서한이라는 새로운 '증거물'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미국의 ABC뉴스 FOX 뉴스 웹사이트는 이날 AP통신을 전재하며 "한국전 학살 때 미 정부의 정책이 세워져 있었다"는 제목 등을 달았다.


이라크에서


미 해병대가 이라크에서 서너살 어린이까지 포함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실이 드러났다. 뉴욕타임스,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29일 베트남전 때 미군이 양민들을 학살한 미라이(My Lai) 사건에 빗대 `제2의 미라이'라고 비판하면서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미군 합참의장이 철저한 조사를 다짐했지만 의회가 청문회 개최를 준비하는 등 파문은 점점 커지고 있다.


◆3살 아이도 사살=
미군 자체조사결과에 따르면 미 해병대는 지난해 11월 수니파 무슬림 저항세력의 거점이 이라크 서부 안바르주의 하디타 마을에서 무장 세력을 소탕한다며 대대적인 작전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도 피해를 입자 비무장 민간인들을 상대로 마구잡이 총격을 퍼부었다.

뉴욕타임스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인용, 당시의 참상을 생생히 전했다. 미군은 민가에 뛰어들어 주민 19명을 사살했고, 이어 지나가던 택시에 총격을 가해 5명을 살해했다. 생존자 중 한명인 히바 압둘라라는 여성은 아침 7시15분쯤 미 해병대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휠체어를 타고 있던 77세 시아버지와 4살 조카를 비롯해 가족 7명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증언했다. 사건을 조사한 미군 관계자들은 압둘라의 시아버지가 휠체어에서 손에 코란을 든 채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 현장에 교전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미군이 양민을 상대로 `보복 학살'을 저지른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인정했다. 9살 소년 이만 압둘 하미드는 7살 동생과 침대 밑에 숨어 화를 면했지만 가족들이 모두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해병대는 3∼14살 아이들까지 몰살시켰고, 발로 차고 고함을 지르며 총을 난사했다.


◆`이라크판 미라이'
=미라이 사건은 1968년 미군 부대가 베트남 미라이 마을 주민 수백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알려진 뒤 미국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고 반전 분위기가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이라크 하디타 학살사건도 미라이 사건에 버금가는 파문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군 당국의 조사결과는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았으나 전말이 드러나고 의회 청문회가 열린다면 단순히 `책임자 문책' 정도로는 수습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피터 페이스 미 합참의장은 29일 CBS, CNN 방송 등에 출연해서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페이스 의장은 최초의 해병대 출신 합참의장이다. 그는 "미군의 99.9%는 명예와 용기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으나, 미국 언론들은 군 당국의 조사가 진상을 가리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군 측의 조사에서 하디타 학살에 가담한 해병대원은 10여명이고, 직접 총격을 한 사람은 4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병대는 사건이 불거진 뒤 일부 유가족에게 돈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 사건을 보고받은 것은 발생 뒤 석 달이 지나서였다"면서 국방부 차원의 축소·은폐는 없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존 워너(공화) 상원 군사위원장은 군 당국의 조사결과가 나오면 청문회를 개최해 "무슨 일이 언제 일어났고 해병대 고위층의 대응은 어땠는지"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이번 사건이 사임 압력을 받고 있는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의 거취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또 미군 철수 여론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될 것이며, 중간 선거를 앞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에게 큰 부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아프간에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2001년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미군 트럭의 질주로 행인들이 숨진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이번 시위는 폭동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29일 보도했다.

이날 시위는 오전 러시아워 대에 카불 북부에서 미군 트럭이 충돌사고를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이 사고로 시민 5명이 숨지자 성난 군중들은 미군 트럭을 에워싸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미군의 요청으로 달려온 아프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최소 8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쳤다. 미군과 경찰 측은 `경고사격'만 가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위대는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며 반발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현장에 있던 취재진이 총을 맞고 숨진 사람과 부상자들을 목격했다"면서 시위대의 주장이 허위가 아님을 확인했다. 더욱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차량을 전복시켰고, 거센 몸싸움이 벌어졌다.




An Afghan girl during a protest in Kabul, May 29, 2006. (Ahmad Masood/Reuters)


폴 피츠패트릭 미군 대변인은 "미군 병사들도 상처를 입었다"면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정오가 되기 전 이미 2000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카불 시내 중심가에 모여 의사당과 대통령궁을 향해 가두행진을 시작했으며, 경찰과 군대가 경고사격을 했음에도 해산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했다. 미 대사관 앞에도 수백명이 모여 성조기를 태우며 시위를 벌였다. 외국인들을 겨냥해 돌을 던지는 시민들도 있었다. 시위대 일부는 폭도로 변해 시내 상가들을 약탈했으며 구호기관인 케어인터내셔널 사무실도 약탈당했다. 미 대사관은 소요를 피해 직원들을 대피시켰으며 국제 구호기구들도 임무를 중단하고 외국인 스탭들을 피신시켰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은 "선동꾼들이 소요를 부추기고 있다"면서 "아프간 재건을 방해하려는 외부 세력의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위대들은 거리에 내걸린 카르자이 대통령의 초상화를 찢으며 미국에 의존하는 정부 행태를 비난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미국의 지지 하에 전후 과도정부 수반을 거쳐 새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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