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對) 이란 정책이 `직접 대화'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기자들과 만나 이란에 대화를 제의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미국이 `중요한 정책 전환(major policy shift)'을 보여주고 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비록 "이란이 핵 활동을 중단할 경우"라는 단서를 달긴 했으나 미국이 이란과 직접 대화에 나서겠다고 한 것은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27년만에 처음이다.
미국은 "대화하자"
부시대통령은 31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란이 모든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검증을 받는다면 그 즉시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 나간다"고 말했다. 부시대통령에 앞서 라이스 장관도 기자회견을 갖고 "이란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게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를 중단하면 즉시 유럽국들과 함께 이란 대표단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고 미 대사관 점거-인질 사건이 벌어진 이래 이란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해왔다. 부시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의 이날 발언은 미국의 정책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커다란 정책 선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이스장관은 또 이란에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인정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라이스 장관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경우 무력 대응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으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논의중인 결의안에서 `무력 사용' 언급을 빼는데에는 동의했다.
유럽은 "환영", 유가는 `하락'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이란과의 핵 협상을 맡아왔던 유럽연합(EU) 3국은 미국의 제안으로 협상이 타결될 희망이 커졌다면서 환영했다.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은 이날 곧바로 이란과의 협상안을 둘러싼 최종 절충에 들어갔다.
미국의 `직접 대화 제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 뉴욕상업거래소(NYMEX) 7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전날보다 74센트(1.0%) 떨어진 배럴 당 71.29 달러에 거래됐다. 영국 런던시장의 브렌트유와 국제금값도 동반 하락했다.
이란은 "두고 보자"
그동안 미국 언론들은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겉으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면에서는 미국에 대화 제의를 해왔으며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여러 채널로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었다. 미국이 대화 제의를 한 만큼, 공은 이란에게 넘겨졌다. 라이스 장관은 회견에 앞서 주미 스위스대사관을 통해 회견문 사본을 이란 측에 전달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그러나 이란 쪽에서는 미국의 제의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은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이란은 "평화적인 목적의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활동은 중단할 수 없다"며 핵 이용 권리를 모두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란 국영 IRNA통신은 라이스 장관의 기자회견 내용과 유럽과의 협상 속보를 짤막하게 보도하면서 "정치적 선전(propaganda)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또 "미국이 여전히 테러리즘에 대해 이중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란 핵 협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미국이 이란에 27년만에 `직접 대화'를 제의한데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이 이란에 제시할 `포괄적 협상안'에 전격 합의했다. `당근과 채찍'을 모두 담은 협상안이 마련됨으로써 이란 핵 위기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인센티브 보따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외무장관과 러시아, 중국 대표단은 1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회의를 열고 이란에 제시할 협상안을 확정했다.
이 협상안에는 우라늄 농축·재처리를 중단할 경우 이란에 내어줄 지원책들과, 이란이 핵 활동을 계속할 경우 안보리가 취할 제재 방안이 모두 들어있다. 마거릿 베킷 영국 외무장관은 "중요한 인센티브 패키지가 마련됐다"면서 "매우 진전된 제안들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인센티브 패키지'의 내용은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AP통신과 BBC 등 외신들은 비엔나 외교관들의 말을 빌려 ▲민간용 핵 기술 제공 ▲원자료 연료 공급 ▲무역 상의 특혜 부여 ▲미국의 안전보장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반면 이란이 핵 활동을 고집할 경우 석유수출 금지와 무기 금수조치 강화 등 제재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미-중-러 `합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날 영·프·독일 외무장관과 회동을 가진 뒤 곧바로 러시아, 중국 대표단과 만났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 통화를 나눴다. 긴박한 협의를 거쳐 협상안이 만들어졌다. 미국이 대화 제의를 한뒤 하루만이다. 부시대통령은 각료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푸틴 대통령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공조'를 과시했다. 그동안 러시아와 중국은 이란에 대한 고강도 제재나 무력 사용에 반대해왔다.
백악관의 `자신감'은 이번 협상안을 놓고 미·러·중국 간에 합의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러시아가 이란 측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라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이번에 마련된 제재 방안에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의 합의에 따른 결의안 제출' 조항이 포함되는 등 러시아와 중국의 발언권이 더 강화됐으며 무력 사용 가능성을 경고하는 내용은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 준비 돼있다"
이란 최고종교지도자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의 측근으로 핵 분야를 총괄해온 알리 라리자니 최고국가안보위원회 의장은 1일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블리카 회견에서 "우리의 핵 기술을 군수용으로 전환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했다. 라리자니 의장은 "우리도 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마누셰르 모타키 외무장관도 미국의 직접대화 제안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이란 국영 IRNA통신이 보도했다.
포괄적 협상안에 대한 이란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다. 이란은 서방의 제의를 반기면서도 "우선 모든 핵 활동을 중단하라"는 요구에는 볼멘 소리를 내고 있다. 라리자니 의장은 "어떤 압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협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고, 모타키 장관도 대화에 `조건'을 다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서방이 `가능한 모든 대안들'을 담은 협상안을 내놓은 이상 이란이 협상을 전면 거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며, 무력 충돌 위험은 일단 물밑으로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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