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살인자, 너를 없애버리겠다!” 근육질의 여성 전사가 매처럼 날아와 악당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악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이 여성은 만화 속의 주인공이다. 원더우먼 같은 미국 만화 주인공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이 여전사는 이집트 출판사 AK코믹스가 내놓는 만화잡지 ‘스페이스 툰 타운’의 인기캐릭터 ‘잘릴라(Jalila)’다.
악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여성 전사 캐릭터다. 잘릴라는 2004년 첫선을 보인 이래 아랍-이슬람권의 여성 영웅으로 떠올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수퍼맨, 배트맨 등 미국 만화에서 시작된 코믹 수퍼히어로(만화 속 초인적 영웅)들 사이에 문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중동-이슬람권을 중심으로 미국식 가치가 아닌 토착형 영웅들이 속속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대표적인 것은 지난 2월 세돌을 맞은 ‘믿음의 도시의 수호자’의 잘릴라와 그 동료 격인 세 명의 전사들이다. 고대 파라오의 후예로 설정된 ‘마지막 파라오’의 주인공 제인, ‘어둠의 여왕’의 주인공 아야, ‘외로운 전사’ 라칸 등은 이집트 만화가 아이만 칸딜의 손에서 태어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으로 팬층을 넓히며 이슬람권의 문화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3년전 첫선을 보일 때만 해도 발행부수가 400부에 불과했던 ‘스페이스 툰 타운’은 월 1만1000부를 찍는 인기 만화잡지가 됐다. 이 영웅들은 몽골, 투르크(터키), 십자군 등 역사적으로 이슬람을 공격한 세력들에 맞서 무슬림들을 구해내는 역할을 한다. 올들어 이슬람권 전역은 덴마크의 일간지에 실린 만평에서 시작된 이른바 ‘무하마드 만평 파문’으로 들끓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듯, 이슬람은 알라(신)나 예언자 무하마드의 모습을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을 금해왔다. 신의 형상 뿐 아니라 무하마드가 쿠란을 통해 전한 신의 말씀을 이미지화하는 것도 터부시됐었다. 이런 종교적, 문화적 배경에서 볼 때 이슬람식 ‘코믹 히어로-헤로인’의 등장은 새로운 현상이다. 잘릴라와 제인 등 AK코믹스에서 내놓은 만화 속 영웅들은 악과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는, 고전적인 선-악 대비 구도를 따르고 있으나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랍 토종 캐릭터들이 인기를 끌면서 아예 이슬람적 가치를 내건 영웅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쿠웨이트에 본사를 둔 테쉬킬미디어는 오는 9월부터 만화 ‘99(The 99)’ 시리즈를 출간할 계획이다. 신이 99가지 속성을 나타낸다고 믿는 이슬람 종교에서 제목과 내용을 따온 이 만화는 서구에서 밀려들어온 사악한 가치관과 싸우는 이슬람 전사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다.
카톨릭적 영웅관을 보여주고 있다. 수퍼히어로의 원형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문학에서 찾을 수 있지만,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본격 등장한 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였다. 헐리우드와 함께 성장해 냉전을 거치며 인기를 끌었던 코믹 수퍼히어로들은 1960년대 이후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수퍼헤로인(여성 영웅)과 ‘블랙 팬더’ 같은 유색인, 게이 주인공 등이 나타난 것. 1990년대 이후로는 냉전 종식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을 반영하듯 미국에서도 ‘징벌자 울버린’ ‘아스트로 시티’ 등의 악한 영웅들, 즉 안티히어로들이 부상했다. 2004년에는 에이즈에 감염된 주인공이 출연하는 ‘그린 애로우’같은 작품도 나왔다. 2001년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거쳐 ‘문명의 충돌’이 화두가 된 상황에서 이슬람식 영웅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귀결로도 보인다. 테쉬킬미디어의 편집인 나이프 알 무타와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만화 속 영웅들은 수퍼맨 같은 기독교-유대계와 포케몬으로 대변되는 일본계로 나뉘어 있었다”며 무슬림의 시각을 대변하는 영웅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2월 ‘배트맨’의 원작자인 미국 작가 프랭크 밀러는 배트맨이 오사마 빈라덴을 비롯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서 고담 시(배트맨의 배경)를 지켜낸다는 내용의 새 버전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어, 만화 속 ‘문명의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만화 속 영웅의 세계에서 기독교-이슬람의 충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코믹 수퍼히어로는 세계적으로 다양한 문화권을 대변하며 분화되고 있다. 남미 콜롬비아에서는 인기 만화가 로돌포 레온이 지난해 선종한 교황 요한바오로2세를 모델로 한 ‘위대한 교황’이라는 작품을 통해 성수(聖水)를 들고 다니는 카톨릭식 영웅을 선보였다. 인도권에서는 힌두스타일 히어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 라지코믹스에서 이미 1980년대부터 내놓기 시작했던 ‘뱀의 왕 나그라지’의 주인공 나그라지가 그 효시격. ‘프라티쇼드 키 즈왈라(복수의 불)’ 시리즈에 나오는 수퍼코만도 ‘드루바’는 시티헌터를 연상케 하는 격투기 전사다. 드루바는 산스크리트어로 ‘북녘의 별’이라는 뜻. 고아 출신 권투선수에서 뭄바이의 범죄조직과 싸우는 영웅이 된 헝그리 복서 스타일의 투사 캐릭터 수라지도 인기를 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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