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의 국경 도시 엘패소. 면적은 서울보다 조금 큰 약 670㎢이지만 인구는 주변 광역 도시권을 합산해도 90만명에 채 못 미친다.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 때문에 ‘선시티(Sun City)’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멕시코와 접경해 있어 ‘국경지대(borderland)’라고도 불린다. 엘패소(El Paso)라는 이름 자체가 스페인어로 ‘통로’를 뜻한다.
이 도시가 요즘 미국 내에서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BTS의 북미투어 개최지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엘패소 언론 KVIA방송에 따르면 BTS 공연이 예정된 세계 도시들이 다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5월 초 열릴 공연을 앞두고 시내 호텔 숙박비가 치솟아 주민들과 방문객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질 정도다. 에어비앤비 단기 임대 숙소들도 평소 1박에 120~180달러 하던 것이 공연과 겹치는 시기에는 300달러 이상으로 올라갔다. 그럼에도 도시 이름을 빛내게 된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지 언론들은 “로스앤젤레스나 라스베이거스 같은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며 기뻐했다. 어떻게 공연을 유치하게 됐는지 ‘비법’을 전하는 공연마케팅 전문가 인터뷰들도 보인다.

현지언론 KTEP는 작년 6월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의 공연이 엘패소에 ‘대형 공연’을 유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북돋워줬다고 전한다. 당시 공연이 열린 선볼스타디움은 1963년 지어진 오래된 미식축구 경기장이다. 엘패소텍사스대학교(UTEP) 안에 있는 이 경기장에서 콜드플레이가 이틀간 공연하면서 9만 장 넘는 티켓을 팔았다. BTS가 설 무대도 같은 경기장이다. 공연이 성사되기까지 엘패소텍사스대 측은 공연기획사와 손잡고 1년 가까이 공을 들였다. 콜드플레이 리더 크리스 마틴이 BTS와 친한 사이여서 다리 역할을 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 대학 행사담당 이사 호르헤 바스케스는 안전 문제를 포함해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면서 "엘패소를 세계 최대 엔터테인먼트 공연의 지도에 올렸고 이제 전 세계가 엘패소를 알게 됐다”고 자축했다.
엘패소는 1만~1만2000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옥수수를 재배하는 부족들이 살던 땅에 16세기 말 스페인 점령부대가 도착했고 이내 ‘누에바 에스파냐’라 불리는 스페인 영토가 됐다. 푸에블로족의 반란 등 원주민들 저항이 거셌지만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미국과 멕시코가 영국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 이 일대에서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각축전이 벌어졌다. 1845년 텍사스가 미국의 한 주가 되면서 미국인들의 이주가 늘었으나 분란은 계속됐다. 5년 뒤 미-멕시코의 ‘1850년 타협(Compromise of 1850)’으로 엘패소는 결국 미국 땅이 됐다. 리우그란데 강을 사이에 두고 멕시코의 시우다드후아레스와 엘패소 간에 국경이 그어졌다. 그러나 두 도시는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금까지도 깊숙이 얽혀 있다. 미국 뉴멕시코주의 라스크루세스와 텍사스주 엘패소, 멕시코 치와와주의 시우다드후아레스가 트리플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함께 이 세 도시 권역은 270만 인구를 가진 산업지역으로 성장했다.

2020년 추정으로 엘패소 인구의 80% 이상이 히스패닉이다. 최근 십여년 사이에는 미국 기업들의 콜센터 거점도시로도 비중이 커졌다. 포트블리스 기지 등 미군의 군사 거점들이 있어서 방위산업도 제법 크다. 국경지대라는 특수한 조건 때문에 텍사스 주의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 연방정부의 존재감이 크다고 한다. 마약단속국(DEA)과 국경순찰대가 이 도시에 주요 거점을 두고 종종 특수작전을 벌인다. DEA와 연방정부 기관들이 함께 운영하는 엘패소정보센터(EPIC), 연방 법무부와 미군이 결합된 북부합동부대(JTF노스)도 있다.
그리고 ICE.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요즘 악명 높은 이 기관이 빠질 리 없다. BTS 공연을 유치한 바스케스는 “친절함과 관대함, 협력적인 문화가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강조했지만 엘패소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이민자 사냥’ 속에 계속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달 3일 캠프이스트몬태나의 연방 이민자 구금시설에서 헤랄도 호르헤 라모스라는 55세 쿠바 출신 남성이 사망했다. 텍사스트리뷴에 따르면 부검보고서에는 ‘목과 몸통 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적혀 있었다. ICE는 라모스의 범죄기록들을 늘어놓으며 “소란을 피워 격리실에 갇혔다가 지병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의혹이 가시지 않자 이 남성이 자살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엘패소 카운티 검시관은 ‘살인’으로 판정했다. 연방법원 판사는 ICE가 부랴부랴 살인 목격자들을 추방하려던 것을 판결로 막았고 유족들은 소송을 냈다.

포트블리스 미군기지 안에 있는 이 시설은 수용 인원 5000명 규모의 미국 최대 이민자 구금소다. 트럼프 정부는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으로 구금 인원이 늘어나자 12억달러를 들여 이 시설을 짓고 지난해 8월 문을 열었다. 어찌나 급했던지 시설이 완공되지도 않았는데 운영에 들어갔다. 쿠바 남성은 그 후 넉달여 동안 이곳에서 숨진 세 번째 구금자였다. 14일에는 34세 니카라과인 남성이 또 사망했다.
멀리 북쪽 미네소타 주에서는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작전에 항의하는 시위자들이 잇달아 ICE 폭력에 살해돼 미국 곳곳으로 항의가 번지고 있다. 그 미네소타에서 끌려온 이들도 상당수가 엘패소에 갇혀 있다. 미네소타에서 ICE 총격에 숨진 37세 여성 르네 굿 살해사건 뒤 엘패소 구금시설 부근에서 주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던 차에 구금자 사망 사건으로 캠프이스트몬태나에 시선이 쏠리자 ICE 측은 미네소타에서 붙잡아온 이들의 면회를 금지해버렸다. 미네소타에서 온 이들만 면회를 막는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 시설의 열악한 상태가 알려지고 사망자가 잇따르자 라나시온, 우니비시온 같은 히스패닉 언론들은 영화 <빠삐용>의 알카트라즈 감옥에 빗대 캠프이스트몬태나를 ‘텍사스의 알카트라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이곳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지어진 수용시설에 빗대기도 한다. 천막 지붕의 이 시설에서 구금자들은 아파도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성범죄와 폭행 등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지역 단체들은 지적한다. 캘리포니아의 애들랜토 구금시설 등 ICE의 구금시설들은 인권 침해로 이미 여러곳에서 소송에 직면해 있다.

엘패소의 이민자 권익옹호 단체들은 잇달아 성명을 내고 국토안보부 관련 법규조차 위반하고 있다며 시설 폐쇄를 촉구했으나 트럼프 정부는 오히려 이 도시 동쪽 끝에 더 큰 ICE 구금시설을 지으려 하고 있다. 새 시설은 최대 8500명을 가둘 수 있는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 주민들 반발을 의식한 국토안보부는 시설의 정확한 위치나 건설 일정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말 국토안보부 계약초안을 입수해 버지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등 여러 주의 물류 창고 지역에 추방 예정자들을 가둬둘 대형 구금시설 7곳과 소형 시설 16곳을 지으려 한다고 폭로했다. 트럼프 정부는 ICE에 750억 달러의 추가예산을 배정했는데 그 중 450억 달러는 구금시설을 새로 짓는 데에, 300억 달러는 단속 활동에 쓰이게 된다. 이 예산법안에 트럼프 정부는 ‘‘원 빅 뷰티풀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획대로 구금시설들이 지어지면 무려 8만5000명을 가둘 수 있다. 엘패소에 캠프 하나를 더 짓겠다는 계획은 이 거대한 구상의 일부일 뿐이다. ICE가 기업들 물류창고들을 인수해 구금시설로 쓰려 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민단속 자체뿐 아니라 산업용지에 구금시설을 짓는 것을 놓고도 말이 많다. 일례로 엘패소의 새 구금시설 예정지로 알려진 곳은 주민들에게 상하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지 기업 관할구역이다. 연방정부 시설은 일반적인 토지이용 규제나 건축법을 적용받지 않지만 민간 구역에 짓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부가 건설을 밀어붙이려면 법규들을 무시하는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원주민 부족들을 설득해 정부가 구금시설을 지으려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알래스카의 원주민 건설회사 등 몇몇 부족 계열 기업들이 새 구금시설 건설 공사계약을 수주했던 것이다. 원주민 기업들은 이미 전부터 엘패소의 ICE 시설 운영에 관여하면서 경비와 급식 등을 맡아 왔다. 원주민들이 이민자 추방에 편승해 이익을 챙긴다는 비판이 나오자 이 기업들은 결국 계약을 철회했다. ICE와 거래했다가 도마에 오른 원주민 부족 오네이다 공동체는 회의 뒤 성명을 내고 계약들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유럽계 이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원주민들이 백인 정부에 굴복해 또 다른 이주민들을 내쫓는 일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인 단속과 불법 구금, 구금의 ‘민영화’에 미국의 추악한 역사가 겹치면서 비극이 켜켜이 쌓여간다. 트럼프 정부 1기 시절, 대통령이 나서서 이민자 추방을 외치던 2019년 8월 엘패소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월마트에서 총기를 난사해 23명을 살해했다. 히스패닉계를 겨냥한 최악의 증오범죄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리 밴 클리프가 주연을 맡은 1965년작 영화 <석양의 무법자(For a Few Dollars More)>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들의 배경이었던 엘패소, 하지만 점점 수용소 도시가 되어가는 이 도시는 언제쯤 ‘관대한 선시티’가 될 수 있을까. BTS가 이 도시 사람들에게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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