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상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나라, 키리바시. 지구는 둥근데 가장 동쪽이라 하니 이상하지만 날짜변경선 부근에 있는 이 나라가 굳이 따지면 세계에서 그 날의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맞는 나라다. 올해도 해는 떴고, 키리바시는 세상 어느 나라보다 먼저 2026년 1월 1일을 맞았다.
태평양 한가운데, 적도에 거의 붙은 이 나라는 32개의 환초와 섬들로 이뤄져 있다. 육지 면적이 811㎢ 밖에 안 되는데 무려 344만㎢에 이르는 드넓은 해역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제일 큰 섬 타라와는 산호섬인데 거기가 이 나라의 수도다. 실은 날짜변경선이 이 나라 가운데를 관통해야 하지만 ‘밀레니엄 해맞이 장소’로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키리바시 전체를 1995년 한 날짜에 들어오게 묶었다. 그래서 지도를 보면 날짜변경선이 쭉 곧은 경도 선을 따르지 않고 키리바시 주변을 휘어서 지나간다.

인구는 12만 명, 주변 태평양 섬나라들 가운데 소멸 직전인 나우루나 투발루 같은 나라들에 대면 그나마 큰 편이다. 하지만 오래 전 이미 고갈된 인산염 자원 외에는 이렇다 할 소득원이 없다. 정부의 조업권 판매, 밖에 나가 선원 등으로 일하는 이들이 보내주는 송금, 유엔 기구나 유럽연합 혹은 일본과 대만 같은 나라들의 원조에 의지해 살아간다. 2023년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 2400달러로 주변국들과 비교해도 최저개발국이다.
사모아, 통가, 피지에서 온 이들이 오래 전부터 거주해온 까닭에 오스트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등 태평양 여러 민족들의 문화가 이곳에서 뒤섞였다. 특히 14세기 무렵 사모아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폴리네시아 문화에 기반한 씨족 사회를 형성했는데, 씨족들 간 내전이 적잖았다. 어떤 씨족은 유럽인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대양 항해에 나선 유럽인들의 총과 함선 도움을 받아 적을 몰살시키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것이다. ‘위대한 부족장 템비노크’는 <보물섬>으로 유명한 19세기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작품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스티븐슨이 이 이 섬에 와서 머물 때 템비노크의 통치 방식을 상세히 관찰해서 책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 무렵이면 이미 유럽열강이 남태평양을 멋대로 갈라먹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이 1886년 협정을 맺어 나우루는 독일이, 길버트 제도(오늘날의 키리바시)와 엘리스 제도(오늘날의 투발루)는 영국이 차지하는 식으로 분할했던 것이다. 키리바시라는 이름 자체가 ‘길버트’를 키리바시 언어식으로 읽은 것이라고 한다. 그후의 태평양 섬나라들 역사는 대개 비슷하다. 식민지, 태평양 전쟁, 일본 혹은 미국의 점령과 공습, 독립, 저개발, 그리고 해수면 상승. 1979년 독립한 키리바시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 나라 역사에는 깊은 슬픔 하나가 더 겹쳐 있다.
2025년 9월 유엔 총회장의 금빛 휘장 아래 연단에 젊은 여성 한 명이 섰다. 오엠와 존슨이라는 이 여성은 핵폭발 피해자 후손이다. 1957년부터 1962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은 당시까지 영국령이던 키리티마티 섬에서 핵무기 실험을 했고 주민들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섬에 살고 있던 존슨의 외할아버지는 겨우 14살이었다. “담요 한 장만 쥐어주고 눈을 가리라고 했다.” 그 상태로 핵폭발의 섬광을 견뎌내야 했다. 존슨의 고모들은 미숙아로 태어나 얼마 못 가 숨졌다. 섬 주변 환경과 일부 해양생물들은 아직까지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다. 2022년 키리바시와 카자흐스탄의 공동 제안으로 핵실험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국제 신탁기금이 만들어졌으나 모금이 여의치 않다. 존슨은 유엔뉴스와 인터뷰하면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고통을 설명하고 강대국들을 향해 핵무기 금지조약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호소에 대한 응답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요즘 키리바시를 비롯한 태평양 섬나라들의 정치적 키워드는 ‘중국’이다. 대만을 제끼고 세계 대부분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한 중국이 마지막으로 공들이고 있는 지역이 여기다. 몇년 새 여러 나라가 대만을 버리고 중국 손을 잡았다. 키리바시는 좀 독특하다. 1980년 이미 중국과 국교를 맺었는데 2003년 대만과 수교를 해버렸다. 이곳에 위성 추적기지를 두고 있던 중국이 압력을 가했으나 키리바시가 듣지 않자 관계를 단절해버렸다. 그 대신 대만이 원조를 해줬다. 2019년 키리바시는 다시 중국으로 갈아탔다. 돈 없고 힘 없는 섬나라의 힘겨운 줄타기였던 셈이다.

최근 들어 중국이 남태평양까지 진출해 미국과 패권 경쟁을 확대하면서 키리바시는 중요한 포스트 중 하나가 됐다. 2023년 7월에는 중국 병원선이 중국 군함으로는 처음으로 이 나라에 입항했다. 2024년부터는 중국 경찰이 지역 치안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5월 타네티 마아마우 대통령이 중국을 찾아가 왕이 외교부장을 만났다. 심해 채굴 협력도 논의 중이다. 중국이 코발트, 니켈, 구리 같은 광물 매장지를 가진 태평양 국가들에게 접근하고 있는데 키리바시도 그 중 하나인 것이다. 키리바시의 섬들이 흩어져 있는 영역이 넓다 보니, 이 나라가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도 넓고 채굴 탐사권을 가진 해역도 넓다.
캐나다 심해 채굴회사가 키리바시에 접근했었는데 협력이 무산됐고 중국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전망은 그리 밝지는 않다. 상업성이 있느냐가 당장 문제이고, 사모아나 피지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해양 오염을 이유로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는 게 또 하나의 문제다. 하지만 섬나라들을 끌어당기는 중국의 인력은 크다. 지난해 11월부터 중국중철(CREC)은 키리바시의 타라와 환초에 도로를 지어주기 시작했다. 29km 길이에 불과하지만 섬 사람들에겐 요긴할 것이고, 그 정도의 도움조차 절박한 것이 이 나라 사정이다.
태평양 소국들이 점점 친중국으로 돌아서자 2022년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키리바시에 대사관을 열고 ‘평화봉사단’도 보내 돕겠다고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서 유엔 기여금도 다 깎는 마당에, 섬나라들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리는 없다. 반면 키리바시 소식에 이례적으로 등장한 미국 기업이 있다. 얼마 전 스타링크가 이 나라 뉴스에 떴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운영하는 스타링크 위성통신 서비스가 개통된 것이다. 스타링크는 기존 통신 인프라가 충분치 않은 섬이나 오지에 지상 설비를 설치하고 고속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커뮤니티 게이트웨이’ 사업을 세계 곳곳에서 해오고 있다. 미국 알래스카의 우날라스카 섬을 시작으로 동아프리카 르완다, 캐나다 북부 카티빅, 남태평양의 투발루와 나우루,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제도 등에 이어 키리바시도 사업 지역에 이름을 올렸다. 스타링크는 세계로 서비스를 확장하면서 ‘개도국의 디지털 격차를 해소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중국이 깔아주는 도로이든 스타링크가 이어주는 인터넷이든, 결국 영리를 위한 것이 아니냐며 곱잖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공정하지 않은 호의”라는 말로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기후변화에 비하면 큰 논쟁거리도 아니다.
태평양 지역 기후대응을 모색해온 ‘퍼시픽커뮤니티’ 등에 따르면 키리바시를 비롯한 이 일대 섬나라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양은 전 세계 배출량의 0.03%에도 못 미친다. 재난은 이미 시작됐고, 이주 이전에 당장 피해를 줄여야 한다. 국제적십자사는 유럽연합 지원을 받아 지난해 9월부터 키리바시에서 ‘기후 회복력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어떤 기후재난이 어디에 어떻게 발생하는지, 누가 피해를 입는지 평가하고 주민들이 나서서 대응방안을 만들고 실행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어쩌다 닥치는 재난이 아닌 해수면 상승은 주민들이 막을 수 없다.
이미 2008년 키리바시 정부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키리바시 시민을 ‘영구 난민’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 6월 아노테 통 대통령은 키리바시가 “되돌릴 수 없는 지점(point of no return)에 도달했다”면서 “고통스럽지만 더 이상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날을 계획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초 키리바시 정부는 피지의 두 번째로 큰 섬 바누아 레부에 2200헥타르의 땅을 샀다. 해수면이 더 올라가 집을 잃게 되는 이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용도였다. 그 뒤로도 몇 곳에 땅을 더 샀고, 물이 차오른 지역의 주민들에게 정부가 나서서 이주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키리바시의 섬들은 평균 해발고도가 2~3m에 불과하다. 인구 절반이 살고 있는 타라와 환초는 육지 면적이 30㎢에 불과하다. 제일 높은 곳도 해발 3m가 채 못 되고, 육지의 폭은 넓은 곳이 450m 정도다. 주변 섬들이 물에 가라앉자 이 좁은 곳으로 이미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한 집에 많게는 수십 명이 산다. 이웃한 투발루는 호주와 ‘팔레필리 연합’이라는 기후 이주 협정을 맺고 단계적 이주 절차를 밟기 시작했으나 키리바시는 아직 그런 협정을 맺은 게 없다. 태평양 섬나라들은 역사적으로 기후변화에 책임이 큰 나라들을 향해 “이주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고 있다. 해수면 상승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질서 있고 자발적인 이주를 보장하는 ’존엄성 있는 이주’라는 개념이 만들어졌고 유엔과 국제재판소들도 이 개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앰네스티의 지난해 5월 보고서를 보면 가장 가까운 큰 나라인 호주나 뉴질랜드의 정책들조차 섬나라 주민들의 삶을 뒷받침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인구가 줄어들어 고민이라는 한국, 기후변화에 책임이 큰 나라로 점점 더 많이 지목당하고 있는 한국이 키리바시 사람들에게 문을 열 수도 있을까? 너무 많이 나간 상상인 듯하다. 새해를 맨 먼저 맞은 섬나라 키리바시, 국제뉴스에 잘 나오지 않는 낯선 그 나라에 제국주의, 핵무기, 빈곤, 패권 갈등, 기후변화 등등 온갖 이슈들이 다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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