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볼리비아에 새 정부가 들어선다. 10월 19일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중도 성향 상원의원 로드리고 파스가 대통령이 된다. 20년 가까이 에보 모랄레스의 사회주의운동당(MAS)이 지배하던 정국이 막을 내린다.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데, 정치적 변화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남미 정치 지형에는 어떤 변화를 부를지 모든 게 안갯속이다.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중도파인 기독민주당(PDC) 후보 파스가 55%의 표를 얻어 우파 호르헤 투토 키로가 전 대통령을 10%포인트 가까운 차이로 이겼다. 모랄레스 측 후보는 1차 투표에서 득표율이 단 3%에 그쳤다. 8월 대선 1차 투표 때 총선도 함께 치러졌는데 내분과 경제난으로 흔들린 MAS는 ‘역사적인 참패’를 했다. 볼리비아 의회는 하원 130명, 상원 33명으로 구성된다. MAS는 하원 의석이 75석에서 1석으로, 상원은 21석에서 0석으로 추락했다. 파스의 기독민주당이 9개 주 중 6곳에서 승리했고 상하원 총 63석을 차지했다.

어쩌다 저렇게 된 걸까. 모랄레스는 볼리비아를 넘어 남미의 오랜 식민지 역사를 전복시키는 상징처럼 여겨졌던 인물이다. 토착민 출신인 그는 미국의 압박에 맞서 전통 작물인 코카 재배 합법화, 코카 농민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올해 선거에서 서부 고원지대와 코카 재배 중심지 코차밤바 등, 과거 모랄레스 핵심 지지 기반이던 토착민 지역까지 전부 파스 쪽이 흡수했다. MAS는 경제난에다 모랄레스와 그 후계자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 간 내분이 일어나면서 자멸했다. 대선과 총선에서 우파와 중도 득표율은 80%에 육박했다.
MAS는 200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좌파 정권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정부로 한때는 평가받았다. 2005년 집권한 모랄레스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식민지배를 받았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사상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모랄레스와 MAS는 헌법을 전면 개정해 토착민의 권리·관습·자치를 보장하는 다민족국가를 선언했다. 아예 공식 국가 이름을 ‘볼리비아 다민족 국가(Estado Plurinacional de Bolivia)’라 바꿨다.
경제 정책도 처음엔 괜찮았다. 우파 정권 시절 서구 자본에 넘겼던 유전개발권 등을 환수, 국부 유출을 막고 발전의 재원으로 삼았다. 인프라에 투자하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렸다. 교육 투자도 많이 했다. 면적 110만㎢에 인구 1200만명인 볼리비아는 지난해 1인당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9800달러였다. 최저개발국은 아니다. 하지만 빈부 격차가 심했고 빈곤율도 높았다. 모랄레스 집권 전에는 60%가 빈곤층이었다. 그런데 2017년까지 빈곤율은 그 절반인 33%로 떨어졌다.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를 넘었고, 인플레이션은 한 자릿수로 안정돼 실질임금이 두 배로 올랐다. 이른바 ‘볼리비아의 기적’이었다.

국제적으로도 모랄레스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함께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뒤 유가가 몇 배로 뛰었다. 역설적이지만 ‘반미’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가 그 수혜자였다. 볼리비아는 노르웨이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그 수입을 나름 효율적으로 썼다. 2006~2014년은 ‘수퍼 사이클’이라 불렸던 세계적인 원자재 호황기였고 이 시기 볼리비아의 외환보유액은 3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늘었다. GDP 대비 국가부채는 74%에서 27%로 줄었다. 문제는 자원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는 것이다. 제조업 기반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유가는 계속 떨어졌고, 천연가스는 탐사에 투자를 충분히 못해 생산이 급감했다. 미국이 투자를 막고 압박한 탓도 분명히 있다. 결국 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재정은 다시 부족해지고, 물가는 올라갔다.
[Compact Magazine] The Tragedy of Bolivian Socialism
특히 최근 몇 년 경제난이 극심했다. 2023년 이후 달러가 부족해지자 정부는 국민들이 은행 예금조차 찾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되니까 달러가 있어도 ‘매트리스 밑에’ 쟁여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올들어 9월까지 물가상승률은 23%로 1991년 이후 가장 높았다. 에너지 부국인데 연료난이 심해서 차에 기름을 넣으려면 주유소 앞에서 며칠씩 줄을 서야하는 상황이 됐다.
모랄레스는 점점 권력에 집착했다. 헌법에는 3선까지 가능한데 2016년 임기를 어거지로 늘렸다. 첫번째 임기 뒤에 헌법을 고쳤으니, 첫 임기는 연임으로 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도 선보인 수법이다. 모랄레스는 2019년 대선에 끝내 재출마했고 승리를 거뒀지만 국민들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군 최고사령관이 나서서 사임을 압박하자 결국 모랄레스는 물러났다. 투개표 과정과 별개로 사실상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 뒤에 헤아니네 아녜스라는 여성 정치인이 임시대통령이 됐는데, 미국 도널드 트럼프 지지기반이기도 한 복음주의 개신교 극우파 인사였다. 1년 여 집권하는 사이에 토착민 권리를 줄이고 ‘기독교 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심지어 군경에 면책권을 줘서 반정부 시위대 30여명을 학살했다.
2020년 대선에서는 다시 MAS의 루이스 아르세가 압승했다. 모랄레스 정권 시절 ‘볼리비아의 기적’을 이끈 재무장관 출신인 아르세는 팬데믹 기간에도 인플레를 억제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재정을 투입해 경기를 띄우다 보니 중앙은행 외환보유고가 소진되고 부채가 늘었다. 국가부채는 GDP 대비 95%로 다시 폭증했으며 2022년에는 화석연료 순수입국이 됐다. 게다가 모랄레스가 아르세 정부에 사사건건 관여하려 해서 결국 내분이 일어났다. 아르세 측은 모랄레스의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을 제기했다. 법원이 체포영장을 발부했는데 모랄레스는 요새 같은 정글 숙소에서 버티고 있다.
몇 년에 걸친 정정불안 속에 당선된 새 대통령 파스는 67년생이다. 아버지 하이메 파스 사모라가 1989~1993년 대통령을 지냈으니 부자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아버지는 급진 좌파였고, 우파정권의 핍박을 받았다. 파스는 아버지 망명 중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뒤에 아버지는 군부 독재자 우고 반세르와 손잡고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개혁 노선에서 많이 후퇴했고. 정치적으로 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 아들 파스는 유명 정치인 집안 출신에 본인도 20년 넘게 의원과 시장을 지냈는데도 볼리비아 정계에선 상대적으로 ‘무명‘이었고 ‘정치적 아웃사이더’라는 평을 들었다. 이번 대선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라는 선거 구호를 내세웠는데, 모랄레스 집권 초반 번영을 누리다가 뒤에 경제난에 실망한 소상공인과 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파스 정부 앞에는 난제가 쌓여 있다. 파스는 고정환율제 폐지, 연료보조금 단계적 축소, 공공투자 감축을 공약했다. 하지만 급격한 긴축 대신 점진적 자유시장 개혁을 강조했다. 공공부문을 확 잘라내 대중적인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은 피하겠다는 것이다. 2011년 모랄레스 정부조차 연료보조금을 줄이려다가 전국적인 시위 때문에 일주일만에 철회한 전례가 있다.
[ATB] Nuevo gobierno se enfoca en tres tareas para estabilizar la economía del país
결선에서 맞붙은 우파 후보 키로가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식 충격요법을 주장했다. 국유산업을 완전히 자유화하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겠다고 했다. 키로가는 2001~2002년 대통령 재임 중에 경제를 하도 망쳐서 임기도 못 채우고 쫓겨났는데 이번에 또 똑같은 주장을 했다. 그 시절 우파 정부들이 가스니 수도니 줄줄이 민영화해서 거센 저항이 일어났고 모랄레스가 집권했는데 말이다.
그 교훈을 아는, 그리고 이웃나라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아는 파스는 ‘IMF 구제금융은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 대신 부패를 없애고, 재정 낭비를 줄이고, 국민들이 깔고 앉아 있는 달러를 은행에 맡기도록 유도해서 외환보유액을 늘리겠다고 했다. 보조금을 줄이는 대신에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빈곤층에는 현금 지원을 병행하겠다고 했다. “너무 지쳤다, 모랄레스 초기 돈이 돌던 시절처럼 살고 싶다. 다만 그보다는 좀 나은 방식이었으면 좋겠다.” AP 기사에 나온 한 상인의 말이다. 과거 모랄레스를 지지했던 서민들이 이번엔 파스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점진적 개혁, 듣기에는 좋지만 부채를 줄이고 달러보유고 늘리는 데에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을까. 그래서 얘기 나오는 게 리튬이다. 볼리비아 대선 결과에 세계가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전기차 배터리에 꼭 필요한 리튬은 칠레 호주 아르헨티나 중국 미국 등이 핵심 채굴국이다. 하지만 매장량에서는 볼리비아가 세계 1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국가 통제와 투자 부족 등으로 탐사, 채굴, 수출 전부 막혀 있었다.

파스는 선거운동 기간에는 MAS 지지층을 끌어오기 위해 빈곤층 대책을 더 강조했고 리튬 얘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리튬 채굴은 국가가 독점하도록 법률로 규정돼 있는데, 그걸 개정해야 외국 기업들이 들어갈 수 있다. 자칫 국민들이 또 자원을 외국 기업들에게 넘기는 것이냐 반대할 수 있으니 민감한 문제다. 그리고 리튬은 원광의 성분 조성이 산지마다 다르기 때문에 현지에 맞는 추출기술이 필요하다. 볼리비아 리튬 원광은 마그네슘 농도가 높아서 추출 효율성을 높이려면 기술적인 과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국영리튬회사 YLB가 2023년 말 첫 공장을 가동했고 지난해 배터리급 리튬 2000톤을 생산했는데 칠레 30만톤, 아르헨티나 7만톤과 비교하면 거의 제로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루카스 베르나드스키, <배터리 전쟁>
자기네 기술과 자본으로는 힘드니 결국 외국 투자를 받아야 한다. 과거 아르세 정부는 중국배터리업체 CATL, 러시아 국영 원자력회사 로사톰과 리튬을 개발하겠다고 했다가 의회에서 가로막혔다. 파스는 계약들을 재검토해 투명성을 높이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모랄레스 진영이 몰락했으니 미국도 볼리비아와 관계를 풀려 할 것이고, 미국 기업들도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온다.
[Prensa Latina] US leaders see Bolivia on their list of allies
2008년 모랄레스가 주볼리비아 미국 대사를 추방하고 이듬해 미국 마약단속국(DEA) 직원들도 쫓아낸 이후 양국 관계는 단절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 파스가 당선되자 미 국무부는 축하 성명을 내놨다. “경제를 안정시키고 민간부문을 키우고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협력하길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파스에게 축하 전화를 해서 양자 간 투자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좌파 정부 시절 미국 리튬업체 에너지엑스, 라일락 같은 기업들도 입찰에 참여했지만 탈락했다. 파스가 집권한다 해도 외국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려면 정부 신뢰도, 즉 정책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국, 러시아와의 계약을 내팽개쳐서는 오히려 서방의 신뢰도 못 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래저래 복잡한 리튬 방정식에서 파스가 어떤 해법을 들고나올지에 미래가 달렸다.
[Planet Leaders] South American Leaders
남미 전체 정치 지형에서는 이번 볼리비아 대선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세계 어디나 그렇듯이 이제는 남미 정치 흐름을 좌우로 나누기는 어렵다. 브라질의 룰라는 중도좌파 실용주의자이고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는 트럼프 예찬론자다. 엘살바도르의 극우파 나이브 부켈레는 자기네 나라를 미국의 유료 감옥으로 만들고 있다. 반면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은 좌파이지만 미국을 상대로 예상을 넘어서는 협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남미에서 앞으로 1년 동안 콜롬비아, 칠레, 페루, 브라질이 대선을 치르게 되는데 우경화이든 좌파의 복귀이든, 나라마다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 같다. 만약 파스 정부가 볼리비아에서 성장과 안정을 어느 정도 실현한다면, 또 하나의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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