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미국으로부터 기술 독립을 꿈꾸고 있다.”
10월 14일 미국 블룸버그통신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미국과 중국에 기술적으로 종속되는 걸 걱정해서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다. 비슷한 얘기들이 유럽 언론에도 줄을 이었다. 그 핵심 무대로 첫손 꼽힌 곳은 네덜란드다. 유럽연합(EU)이 거액을 지원, 네덜란드 북동부 흐로닝언에 AI 연구시설을 건설할 예정이다. 총 2억 유로가 투자되는데 네덜란드 정부와 EU가 각각 7000만 유로씩 내고 흐로닝언 시 등이 나머지 6000만 유로를 채운다. 내년에 전문지식센터를 만들고 2027년부터 슈퍼컴퓨터를 가동할 계획인데 앞으로 유럽 전역에 걸쳐 만들어질 비슷한 시설들과 네트워크를 이루게 된다. 유럽 스타트업들이 접근할 수 있는 대규모 컴퓨팅 파워를 구축하면서, 미국과 중국 플랫폼으로부터 기술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하는 게 목적이다.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첨단 기술산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무래도 ASML 덕분일 것이다. 초정밀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광학장비를 만드는 세계 유일의 회사 말이다. 네덜란드는 그 덕에 세계 반도체산업 공급망의 핵심이 됐다. 왜 독일 같은 경제 대국이 아니라 네덜란드였을까, 어떤 이들은 예로부터 무역으로 성장한 네덜란드의 ‘개방형 무역 국가 DNA’를 얘기한다. 해운 강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지금도 유럽 최대 항구인 로테르담 항만, 유럽 3위 항공 물류 허브인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 그리고 라인강 운송 네트워크 등을 기반으로 한 유럽 물류·무역의 중심이다. 반도체, 바이오, AI 같은 첨단산업은 공급망이 생명줄인데, 네덜란드는 그 물류·행정 효율이 유럽에서 가장 좋다는 평을 듣는다.

정부의 일관된 첨단산업 전략과 연구개발(R&D) 투자도 물론 큰 몫을 했다. 정부가 2011년부터 국가 혁신전략(Topsectorenbeleid)을 체계적으로 운영해왔다. 하이테크시스템, 에너지, 생명과학 등 9개 핵심 산업군을 선정해 기업과 대학과 정부가 손잡는 ‘트리플 헬릭스(triple helix)’, 삼각협력 모델을 만들었다. 특히 반도체·정밀기계·광학기술 분야는 에인트호번을 중심으로 ‘브레인포트’라는 이름의 혁신 산업단지가 형성돼 있다. 여기서 탄생한 대표적인 기업이 ASML이다. ‘단기 유행’이 아니라 10년 넘게 이어진 산학연 일체형 전략이었던 것이다. 델프트공대, 에인트호번공대, 트벤테대학 등을 발판 삼아 실리콘밸리처럼 ‘아이디어에서 제품까지’ 빠르게 이어질 수 있는 유럽 내 드문 환경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The History of Brainport Eindhoven
“기후·디지털 전환이 곧 산업혁신”이라는 인식을 적극 받아들여 EU의 ‘그린딜’과 ‘디지털 유럽’ 전략에도 앞장서 호응해왔다. 해상 풍력발전 단지, 수소경제 프로젝트, 스마트시티 기술, 반도체 장비 산업 등은 국가 전략의 축으로 자리 잡았다. EU의 AI 투자가 결합되면 지식과 혁신 측면에서 네덜란드의 국제적 입지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인재를 유치하고 미국과 중국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것이고, 이를 통해 유럽의 디지털 주권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EU는 기대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9월 유럽의회 연설에서 “유럽의 독립성은 오늘날의 격변기에 경쟁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면서 새 경쟁력 기금과 EU 연구·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 예산 증액을 제시했다. 금융, 에너지, 통신 분야의 오랜 장벽을 허무는 '2028년까지의 단일 시장 로드맵’도 내놓겠다고 했다. 민간 투자자와 함께 수십억 유로 규모의 '스케일업 유럽 펀드'도 출범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양자, 인공지능, 바이오테크 분야의 유럽 스타트업들이 해외에서 줄곧 자금을 조달해 왔는데 그러다 보면 일자리, 부, 기술주권이 유출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소버린(주권) AI'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지금 AI는 국가의 독립성과 결부돼 있다. 폰데어라이엔은 "유럽형 AI는 미래 독립에 필수적"이라고 했다. 특히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뒤 유럽에선 미국 기술 의존도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커졌다. 미국이 주도하는 기술 세계에서 중국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데, 이러다는 유럽이 향후 기술 활용에서 완전히 밀려난다는 우려인 것이다. EU는 AI 개발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와 핵심 광물의 상당 부분을 미국과 아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폰데어라이엔은 또 과학자와 연구원을 유럽으로 모으기 위해 5억 유로를 들여 ‘유럽을 선택하라(Choose Europe)' 패키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다른 나라가 물러서는 곳에서 유럽이 나서야 한다”는 발언은, 미국이 인재들을 쫓아내는 상황을 기회로 만들자는 것으로 들렸다.
Gartner Says Worldwide AI Spending Will Total $1.5 Trillion in 2025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산업에서 유럽에는 통 눈에 띄는 기업이 없는 게 현실이다. 미국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애플이 있다. 이름 첫 글자를 묶어 또 다른 의미의 ‘MAGA’라 불리는 거대 기업들이다. 중국엔 알리바바와 텐센트와 바이두, 약칭 ‘BAT’가 있고 한국 기업으로는 삼성전자, 엘지전자, 에스케이하이닉스 등등이 세계적인 기술기업으로 거론된다.

“유럽에는 왜 빅테크(첨단기술 대기업)이 없느냐”는 물음이 이미 많이 나왔다. 단순히 기업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문화·시장 구조·역사적 경로가 얽힌 이슈다. 우선 시장의 규모와 통합성 문제가 있다. 경제규모로 보면 미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30조6000억 달러였고 유럽은 약 20조달러였다. 미국보단 작지만 중국(약 18조7000억달러)보다는 크다. 그런데 유럽은 하나의 시장이라면서도 회원국마다 언어, 세금, 법규가 다르다. 스타트업이 독일에서 만들어져도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확장하려면 매번 행정 장벽과 법적 허들을 넘어야 한다.
위험 회피에 치중하는 금융 구조, 보수적 투자 문화를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혁신 기업이 자본을 조달하기가 쉽지 않다. 2010~2012년 금융·재정위기를 겪으면서 벤처캐피털 출자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는데, 2014년부터 회복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한계가 많다. 결과적으로 유럽 스타트업들은 규모를 키우기 힘드니 기업이 자리를 잡으면 매각하는 것으로 출구를 삼는다. 그것이 대형 기술기업의 탄생을 막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규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규제가 많다는 것은 기술 발전과 사회적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라는 얘기다. 책임성 면에서는 훌륭하지만 빠른 기술 확산과 대규모 실험에는 제약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AI나 생명공학 분야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이 엄격한 탓에 데이터를 활용하기 어렵다. 자동화와 AI 실험에 대한 규제도 강하다. 2024년 8월 EU 인공지능법이 발효됐는데, 인간을 지배할 지 모른다며 공상과학영화 애호가들이 걱정하는 ‘범용 목적의 AI’ 개발 등에는 기업들에 여러 의무와 책임을 부여했다. 전력망, 수도·가스와 교통·의료 등 핵심 사회 인프라에 쓰일 수 있는 AI 시스템에도 엄격한 인증과 위험 평가, 투명성 요건을 달았다.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 가능성’도 요구했다.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시작됐지만 미국식 모델과 유럽식 모델의 경로는 이미 2차 대전 때부터 갈라졌다. 전쟁 뒤 미국은 군산복합체 중심의 기술혁신을 주도했고 거기서 컴퓨터와 인터넷이 나왔다. 냉전기에 미국이 먼저 혁신하면 아시아가 따라갔다. 반면 유럽은 그 기술을 사회적 가치에 맞게 응용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차이가 수십 년 동안 누적됐다. 미국과 아시아는 혁신 생태계를 만들었고, 유럽은 제도적·사회적 안정을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혁신은 급성장형 플랫폼 기업보다는 산업기반형 기술, 친환경·에너지 전환, 항공우주와 소재산업처럼 ‘느리지만 정밀한 분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유럽에는 첨단기술이 없다기보다는 디지털 플랫폼형 기술기업이 드문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유럽은 그 경로를 조금 바꾸고 싶어 한다. 2023년 2월 EU 집행위가 발표한 ‘그린딜 산업계획’은 녹색 전환과 디지털 전환을 병행하면서 산업 경쟁력, 공급망 자율성, 기술 주권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전략을 담았다. 그 일환으로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한 ‘칩법(Chips Act)’을 내놨고 ‘유럽을 위한 칩 이니셔티브’라는 이름으로 연구·개발과 혁신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세계 반도체 생산 용량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조금 못 미치는데,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공급망 전쟁 시대에 맞춰 ‘핵심원자재법’도 만들어 2030년까지 가치사슬의 각 단계에서 대외 의존을 낮추기 위한 기준을 제시했다. 회원국이 아닌 나라로부터는 특정 원자재를 소비량의 65% 이상 수입하지 않도록 했다. 다분히 중국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부 정책, 계획들이다. 실제 움직임은 어떨까.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 스타트업이 늘고 있다고 한다. 유럽 언론에 많이 소개된 프랑스의 AI 스타트업 미스트랄 AI는 미국 메타와 구글 출신 엔지니어들이 설립했다. 유럽의 규범을 지키면서 투명성을 갖춘 최첨단 AI를 만드는 걸 목표로 내세워 이미 7억 달러 이상 투자금을 모았다고 한다.
유럽에선 “규모보다 전문화가 중요하다”면서 자기네 스타트업을 띄우려 애쓰고 있다. 오픈AI 같은 미국 기업들과의 경쟁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EU스타트업닷컴의 한 기사는 유럽 기업들이 “희귀 질환 진단, 법적 심사 자동화, 공급망 최적화 같은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면서 “규모가 아닌 정밀성을 바탕으로 특정 비즈니스에 최적화된 도구를 설계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유럽의 섬세한 규범이 결국은 기업 경쟁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았다. 전 세계 데이터센터 용량 중 미국은 37%를 차지하는데 유럽은 18%에 불과하다. 그래서 효율성을 오히려 더 중시하게 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규모 대신 정밀성, 삶과 복지에 도움이 되는 기술. 일리는 있다. 유럽은 한국의 협력 대상이면서 경쟁자이고, AI 윤리나 지속가능성은 정말로 중요하다. 유럽의 전략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배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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