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해가 요즘 뜨겁다. 러시아 MiG-31 요격기 3대가 9월 19일 에스토니아 영공을 침범, 12분간 머물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유럽 최고사령부(SHAPE)는 에스토니아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 F-35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켰고, 스웨덴과 핀란드도 각자 신속 대응 항공기를 띄웠다. 올들어 러시아 군용기가 에스토니아 영공에 들어간 게 네 번이다. 특히 19일에는 전투기 3대가 들어왔다는 점에서 에스토니아는 격앙됐다.
21일에는 독일과 스웨덴 전투기가 발트해 상공에 떴다. 중립지역 영공에 진입한 러시아 정찰기를 요격하기 위해 출격한 것이다. 스웨덴 그리펜 전투기 2대와 독일 유로파이터 전투기 2대가 국제 공역에서 러시아 IL-20 정찰기를 감시하고 촬영했다. 25일에는 헝가리가 그리펜 전투기를 띄워서 발트해 상공의 러시아기 5대를 쫓아냈다.

폴란드는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 드론을 요격해버렸다. 러시아 드론이 9월 9~10일 영공에 들어오자 그 중 몇 대를 격추한 것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래 나토 회원국이 자국 영공에서 러시아 군사 자산을 직접 공격한 첫 사례였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나토 동맹조약 4조를 발동시키고 이 사건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개적인 갈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건"이라고 말했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럽 본토 사이의 발트해는 남쪽의 지중해처럼 서쪽만 뚫리고 땅들에 둘러싸인 내해(內海)다. 북서쪽으로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를 지나 북해와 연결되고, 북동쪽으로는 핀란드 만을 거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른다. 전체 면적은 약 37만㎢로 넓지 않다. 평균 수심도 55m 정도로 얕아 대양보다는 큰 호수 같은 성격이다.

유럽 대륙의 덴마크·독일·폴란드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핀란드·스웨덴, 그리고 러시아에서 독립한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발트 3국), 그리고 러시아가 이 바다에 면해 있다. 핵심 항구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발트해 길목에 있을뿐 아니라 거기서 떨어진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가 발트해에 있어서 러시아엔 어느 바다보다 중요하다.
좁은 바다 주변에 9개국이나 있다는 것은 역사가 복잡하다는 뜻이다. 중세의 발트해는 바이킹의 바다였다. 노르드인(스칸디나비아인)들이 발트해 전역에서 무역망을 구축했고, 러시아의 강들을 따라 흑해와 남러시아까지 교역길을 열었다. 중요한 무역로였으니 세력 다툼도 많았다. 13~16세기 발트해와 북해 일대에는 ‘한자동맹’이라는 무역 세력이 성장했다. 17세기에 이르자 스웨덴이 사실상 발트해 전체를 장악했지만 실제 교역은 발트해 연안국이 아닌 네덜란드가 주도했다.
18세기에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발트해 패권을 노렸다. 스웨덴이 ‘대북방전쟁’에서 러시아에 패배하면서 러시아가 발트해 동부에 진출했다. 발트해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표트르 대제는 네바 강 어귀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었다. 1871년 독일 통일 후 발트해 남부는 독일령이 됐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폴란드와 발트해를 잇는 ‘폴란드 회랑’을 내줘야 했다. 독일이 2차 대전 때 폴란드를 점령했지만 폴란드는 이 회랑 지대를 결국 확보했다.

냉전 시기 발트해는 양 진영의 대결장이었다. 1703년 표트르 대제 때 창설된 발트함대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함대다. 1922년 소련 해군에 편입됐다가 1991년부터 러시아 함대로 승계됐다. 발트해 서쪽의 얕고 좁은 덴마크 해협은 소련에는 북해와 대서양으로 함대를 내보내는 유일한 통로였고, 서방 입장에서는 소련 함정과 잠수함의 출입을 차단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소련, 폴란드, 동독 해군이 발트해에서 서방에 맞섰고 나토 측에서는 덴마크, 서독, 노르웨이가 길목을 지켰다. 1952년 4월 스웨덴 정찰기가 소련 전투기에 격추된 이른바 ‘카탈리나 사건(Catalinaaffären)’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스웨덴은 나토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미국과 비공개로 협력하고 있었다.
발트해는 또한 소련과 동독, 폴란드에서 배를 타고 서방으로 탈출하려는 이들의 망명 경로로도 활용됐다. 1981년 폴란드에서 자유노조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을 때 소련 발트함대가 무력을 과시, 일시적으로 긴장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긴장은 누그러졌고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발트3국이 독립하면서 발트해의 전략 지형은 바뀌었다. 소련 해군이 발트3국에 갖고 있던 기지는 폐쇄됐고 러시아 땅인 칼리닌그라드만 남았다.
그러나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 서방과 러시아 간 갈등의 무대로 발트해가 다시 부상했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는 냉전 시절 저리가라 할 정도로 긴장이 높아졌다. 나토 회원국과 러시아가 직접 맞닿는 유일한 해역이니 동서 간 사이가 나빠질 때마다 가장 민감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또 발트해는 에너지 수송로로도 중요한 곳이다. 러시아산 가스를 유럽으로 수송하는 해저 파이프라인이 발트해를 지난다. 러시아 가스가 독일로 바로 갈 수 있도록 노르드스트림2 파이프라인을 공들여 만들었는데, 공사가 끝난 시점에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해 가동이 중단됐다. 군사화와 에너지 갈등이 발트해에서 겹쳐지는 것이다. 서방은 러시아가 제재를 피해 몰래 석유를 수출하려고 노후 유조선들로 ‘그림자 함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은 7월 비밀 함대의 운항을 막기 위해 발트해 유조선 검문을 강화했다.
하지만 에너지는 러시아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자 지렛대이기도 하다. 9월 26일 크렘린은 3년 전 폭파된 노르드스트림을 “당장이라도 가동할 수 있다”고 유럽에 손짓을 했다. 노르드스트림 시스템은 발트해 해저를 거쳐 독일까지 이어지는 NS1과 NS2 두 갈래로 구성된다. 2022년 사보타주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 이후 총 4개 가스관 중 NS2의 일부인 파이프라인 한 개만 온전한 상태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종전 협상 테이블에 러시아를 불러앉히기 위해 가스관 가동을 허용치 않을 것이라 밝힌 바 있다.
발트해에서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은 나토 전체를 계속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 ‘시험’의 난이도도 갈수록 높아진다. 러시아 드론의 폴란드 침투가 유럽국들에 또 하나의 경종이 됐다. 나토는 12일부터 발틱 센트리(Baltic Sentry)라는 군사작전을 시작해 발트 국가들에 전투기를 배치했다. 유럽연합 국방우주국장 안드리우스 쿠빌리우스는 러시아 드론을 막기 위한 센서와 방해 시스템인 ‘드론 장벽’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스웨덴, 독일기가 긴급 출격한 뒤 나토 대변인 앨리슨 하트는 “러시아의 무모한 행동”에 맞서 즉시 대응능력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세 또한 전방위적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휴전 협상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러시아는 이참에 우크라이나의 ‘지상 영토’를 확보하고 동시에 발트해의 해상 영유권도 굳혀버리겠다는 심산인 듯하다.
올 6월 러시아는 발트해에서 영해의 기준이 되는 기선(基線)을 정한 새 법령을 발표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한 뒤 발트해는 러시아의 짧은 해안선을 제외하고 전부 나토 회원국에 둘러싸였다. 1982년 유엔 해양법협약(UNCLOS)에 따르면 국가는 기선으로부터 최대 12해리(약 22.2km)까지 영해를 설정할 수 있다. 영해 너머 최대 24해리까지는 접속수역으로, 연안국은 외국 선박이 영해로 진입하려 하면 승선 검색할 수 있다. 러시아는 발트해에 수직 기선을 그었다. 해안선이 복잡하거나 섬이 흩어져 있을 경우 UNCLOS는 특정 육지 지점을 잇는 직선을 그어 기준선을 정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이 경우 비교적 넓은 바다 구역이 내수로 편입될 수 있다. 러시아의 ‘제914호 법령’에 따르면 이 선은 핀란드-러시아 국경에서 시작해 남쪽 에스토니아-러시아 국경(나르바 만)까지 연결된다. 핀란드 만 동부 전역이 러시아 내수로 규정된 것이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영해는 냉전 종식 이후 불분명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기선을 정한 1985년이었는데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법령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러시아 영해로 여겨졌던 지역을 명확히 규정하는 법적 정비 성격을 띈다. 당장 현실이 바뀌는 것은 없지만, 서방의 발트해 접근을 차단하려는 것을 선제적으로 막고 러시아가 ‘서방에 포위된’ 처지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폴란드 드론 침투 등 서방을 향해 직접적인 도발 행동을 하면서 정보전, 선전전을 결합시킨 이른바 ‘하이드리드 전술’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크렘린 성향의 모스크바타임스는 러시아 선전기관들의 다층적인 정보작전과 발트해 공세를 연관지었다.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물리적 공격과 허위 정보 유포 같은 선전, 정보 수단을 병행하는 것이다.
폴란드 영공에 드론이 침입한 직후부터 러시아 언론들은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러시아 책임이 아니다”, “폴란드의 대응이 지나쳤다”라고 주장했다. 폴란드 주재 러시아 대사는 “드론 공격은 우크라이나의 도발”이라 했고, 러시아 정부와 연계된 텔레그램 채널 등을 통해 이런 주장이 빠르게 퍼졌다. 폴란드 디지털부 장관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군사 작전이 끝남과 동시에 조직적인 봇들이 가동되고 허위 정보 유포가 하루만에 3배로 늘었다”고 했다. 이와 함께 폴란드 내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유입에 반대하는 주장이 확산됐다. 혼란을 퍼뜨리고, 각국 정부들과 동맹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나토 동맹국들의 대응 능력과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 러시아의 목적인 것이다.
9월 25일 블룸버그통신은 나토 관리들이 비공식적으로 러시아에 ‘영공 침범 시 격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덴마크 당국은 작전 기간 모든 민간 드론 비행을 중단시켰으며, 코펜하겐 공항에 무인항공기 감시 레이더를 설치했다. 28일 NATO 해상사령부는 독일 해군의 작센급 호위함 FGS함부르크가 센트리 작전 일환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입항했다고 발표했다. 바렌츠옵서버는 나토가 항공모함을 동원한 폭격 연습 등으로 러시아에 강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미 F/A-18 전투기들이 노르웨이 해역 및 발트해 연안까지 비행해 폭격 목표에 투하 후 복귀하는 훈련이 ‘넵튠 스트라이크(Neptune Strike)’라는 감시·타격 작전의 일부로 이뤄졌다.
하지만 나토 내에서도 나라마다 위협을 느끼는 정도나 러시아와의 관계에 차이가 있다. 폴란드와 에스토니아는 나토가 ‘러시아군 전투기 들어오면 무력 대응하겠다’는 것을 공동성명으로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독일이나 남유럽 국가들은 반대했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발트해에서 유조선을 이용해 드론을 발사했다는 증거가 있다며 아예 러시아 선박들이 발트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현실화될 가능성은 적다. 미국이 갈팡질팡하고 유럽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이, 발트해는 이렇게 우크라이나와 연동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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