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연방최고법원 판사 알렉산드레 지 모라에스는 전직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쿠데타 음모 재판을 맡은 사람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동을 착실히 이어받아 말라리아 약을 방역에 동원하고 아마존 밀림을 파괴해 세계의 공분을 산 인물, ‘트로피칼(열대지역) 트럼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보우소나루. 지 모라에스 판사는 그에게 소셜미디어 사용을 금지시켰는데 보우소나루가 위반한 정황이 나타났다. 그러자 보우소나루에게 가택연금 명령을 내렸다. “피고가 법원을 조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지 모라에스가 지난 4일 결정문에 적은 구절이다.
보우소나루는 노동자당(PT)의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대선에서 이기자 승복하지 않고 지지자들에게 난동을 부추겼고, 쿠데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했다. 그런데 미국 트럼프 정부는 보우소나루 편들기를 넘어 내정 간섭도 불사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서비스와 상품 교역 모두에서 브라질에 흑자를 봤다. 그런데도 트럼프 정부는 브라질산 제품에 50%의 관세를 부과했다. 브라질 법원의 보우소나루 처벌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 모라에스는 젊은 검사 시절 상파울루 시 정부를 상대로 부패 수사를 주도했고 상파울루 주 법무장관을 거쳐 연방최고법원 판사가 됐다. 룰라가 승리한 2022년 대선부터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격인 연방선거법원장을 맡았다. 2023년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의사당을 습격하자 가담 혹은 동조한 전현직 공직자 체포령을 내렸고 주지사를 해임해버렸다.
브라질 연방최고법원은 연방대법원과 구분되는,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헌법재판소에 해당되는 법원이다. 민주주의 지킴이로 나선 그에 대해 브라질 안에서도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라질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친노동자당-반노동자당’으로 나뉘어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를 겪고 있다. 그러니 지 모라에스 판사가 브라질 정치판에서 논란의 중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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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미국이 나선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듯이, 트럼프의 존재는 너나 없이 양극화된 세계 각국 정치에서 ‘분열의 상수’가 되고 있다. ‘트럼프식 극우 행태’의 간접적인 영향력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 트럼프와 그 주변 극우 인사들이 각국 극우파와 손잡고 남의 나라 정치 싸움에 기름을 붓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지금은 트럼프와 싸웠지만 한때 단짝이었던 우파 기업가 일론 머스크가 유럽 극우파 지지발언을 한 것, 트럼프 1기 시절의 선동가 스티브 배넌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한 것도 그런 사례들이다.

지 모라에스 판사는 지난해 8월부터 두 달 동안 브라질에서 머스크의 소셜미디어 ‘X’ 접속을 차단시켰다. 그는 보우소나루의 주된 선전 수단인 X가 가짜뉴스와 선동의 플랫폼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디지털 위협’이 되고 있다고 본다. 올 2월에는 트럼프가 만든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과 서버를 공유하면서 법원의 게시물 삭제 명령을 거부한 ‘럼블’도 일시 중단시켰다. 럼블은 캐나다에 본사를 둔 동영상 플랫폼인데 브라질에서 특히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많이 사용한다.
쿠데타 음모에 관한 입장은 특히나 강경하다. 보우소나루가 재선 캠페인 때 투표 시스템 자체를 공격하자 현직 대통령이던 그를 수사하기 시작했고, 대선 패배 후 의사당 공격을 선동한 우익 블로거들과 정치인들을 대대적으로 수사했다. 대법관들을 구금하자고 주장한 보우소나루 내각의 장관,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억압통치를 옹호한 연방 의원도 체포해버렸다. 보우소나루에게는 아예 2030년까지 공직 출마 금지 결정을 내렸다.
재판 과정에서 보우소나루가 룰라를 비롯한 야당 정치인들을 공격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려 했던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달 지 모라에스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하면서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할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고,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할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옳은 일을 할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질은 20년의 군사 독재정권과 수 차례의 쿠데타를 겪었다. 질병에 더 많이 공격받을수록 더 강한 항체를 형성하고 예방 백신을 찾게 된다.”
트럼프 정부는 브라질 법원이 보우소나루를 기소한 것이 “마녀사냥”이고 온라인 선동을 통제한 것은 “언론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한다. 관세 폭탄에 이어, 지 모라에스 판사 개인도 제재 대상으로 삼아 미국 비자를 취소했다. 트럼프가 이 판사를 눈여겨보게 된 것은 럼블을 차단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럼블 측이 미국 법원에 지 모라에스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다.

지난달 말 트럼프 정부는 지 모라에스를 상대로 ‘마그니츠키법’을 꺼내들었다. 러시아에서 정부 부패를 폭로한 뒤 고문당하고 사망한 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의 이름을 딴 법이다. 2012년 미국 의회는 ‘세르게이 마그니츠키 법치 책임법’을 만들어 사건과 관련된 러시아인들을 제재하기 시작했다. 2016년에는 ‘인권 침해와 부패에 연루된 전 세계의 개인들’을 제재할 수 있게 한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책임법’을 만들어 제재 범위를 넓혔다. 미국을 본떠 캐나다, 영국, 유럽연합, 호주 발트3국 등이 비슷한 법안을 만들었다.
미국은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끔찍하게 살해한 책임을 물어 사우디 관리 17명을 이 법으로 제재했다. 정작 배후로 지목된 무하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제외했지만. 2017~2019년에는 미얀마 군 고위 장성들이 제재를 받았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그 측근들도 이 법에 따라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됐다. 2020년에는 중국 신장위구르자치주 공산당 서기 천취안궈 등이 대상이 됐다. 인권을 위한 법이 외국을 압박하는 도구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더니 이제는 브라질 법관을 ‘인권 침해 연루자’로 지목했다. 트럼프는 7월 30일 무려 2221단어짜리 성명에서 “브라질의 최근 정책은 미국의 국가안보와 외교정책과 경제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지 모라에스는 사법 권한을 남용해 미국 소셜미디어 기업을 검열했다”고 주장했다. 관세 폭탄을 ‘전직 대통령 박해’와 엮으면서 트럼프는 “브라질 정부의 위협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브라질 연방최고법원은 “외국 법은 우리 나라에 관할권이 없다”며 트럼프 정부 조치들의 효력을 “우리 국가 내에서 정지시켰다”는 성명으로 맞받았다. 마그니츠키법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판사 제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자 미 국무부 서반구사무국은 X에 게시한 성명에서 “지 모라에스는 미국과 미국 시장에 접근하고자 하는 모든 기업과 개인에게 유해하다”, “미국인은 그와 거래할 수 없으며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인권침해자와의 거래에서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고 엄포를 놨다.
보우소나루 재판의 판결은 다음달 초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이 싸움을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걸까? 미국 언론이나 싱크탱크들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2일 룰라 정부가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힌 브라질 정치 이슈를 놓고 트럼프 정부가 제재 수준의 관세를 매기면서 양국 관계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양국 외교장관이 만났지만 성과는 없었고, 양국 재무장관 회담은 취소됐다. 룰라 정부는 굴복하는 대신 지난 13일 관세 타격을 받는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300억 헤알, 7조7000억원 규모의 ‘소버린 브라질(브라질의 주권)’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룰라는 “브라질에 대한 제재 이유로 제시된 것이 근거가 없다는 점이 불쾌하지만, 위기 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해선 안 된다”며 “위기는 기회다”라고 했다.
룰라의 계획이 발표된 지 몇 시간 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번엔 브라질 정부가 2013년부터 쿠바 의사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쿠바의 노동착취 프로그램에 책임이 있는 국가의 정부 관료들에게는 비자 발급을 제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점입가경이다. 이 싸움이 브라질에게 진정한 기회가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에 실책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룰라 대통령은 50% 관세가 적용된 첫날인 6일 역시 관세 50% 폭탄을 맞은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연달아 통화했다.

브라질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로, 중국의 3분의1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밀어붙인 브라질 압박의 최대 수혜자는 결국 중국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중국은 이 참에 브라질을 더더욱 끌어당기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장관은 룰라의 외교보좌관과 통화하면서 “우리는 이성적이지 못한 외부 간섭에 반대한다”고 했고, “브라질의 주권과 존엄성을 단호히 지지한다”는 외교부 성명을 냈다. 브라질 주재 중국대사관은 소셜미디어에 “단결이 힘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미국과 협상 중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18일 룰라와 통화하면서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온 브라질을 우군으로 만들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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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는 브릭스 국가들이나 멕시코, 베트남, 인도네시아, 걸프 국가들과 계속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지 모라에스 판사의 입장을 굳건히 지지하고 있으며 트럼프와 대화를 하겠지만 굴복할 뜻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미국과 척을 지기보다는 늘 그랬듯 실용주의 노선 속에 물밑 협상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오글로보는 룰라 정부가 ‘보복 조치’는 배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압박 때문에 지난달 룰라 지지율은 지난해 10월 이후 최고치로 올라갔고, 79세 룰라는 내년 대선 재출마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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