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8일 찰스3세 영국 국왕의 초청을 받아 영국에 갔다. 브렉시트 이후 첫 영국 방문이다. 유럽연합 지도자의 첫 국빈방문이기도 하다.
(요즘 찰스3세의 ‘왕실 외교’가 화려하다. 3월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해 만나더니, 5월에는 캐나다를 찾아가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이번에도 케이트 왕세자비의 옷차림을 비롯해 왕실의 화려한 국빈 맞이 행사가 언론에 줄줄이 보도됐다. 반면에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존재감이 적었다.)
세계의 관심은 마크롱의 입에 집중됐다. 유럽은 사면초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유럽이 전운에 덮여 있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을 압박하고 권위주의 중국과의 무역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을 끌어안고 홀로서기를 해보려는 유럽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예상대로 마크롱은 프랑스와 영국이 위험한 세계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와 국제 질서를 지켜내고 “유럽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이 경제와 안보를 강화하면서 “미국과 중국 양측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을 향한 영국의 재선회는 이미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5월 스타머 총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런던에서 만나 손을 잡고 영국-EU 관계를 ‘재설정’한다고 했다. 안보, 에너지, 이민에서 식품부터 어업 문제까지 전방위 협력을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위협과 지정학적 불안정 속에 EU는 1500억 유로(약 240조 원) 규모 재무장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거기에 영국도 동참할 수 있게 됐다. 영국인이 EU 국가를 드나들 때 여느 회원국 국민처럼 전자 자동입국 심사대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앙금은 잠시 물밑으로 가라앉히고 영국과 EU의 재연결을 약속했다.
이번 마크롱의 런던 방문에서는 이민, 국방, 투자 문제를 논의했는데 프랑스 에너지기업이 영국 동부에 지어질 새 원전에 지분을 투자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마크롱이 영국을 유럽으로 끌어들이려고 가져간 선물도 눈길을 끌었다. 1066년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을 그린 70m 길이의 ‘베이유 태피스트리’라는 작품이었다. 대륙과 섬의 오랜 연결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크롱은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이 “유럽인들이 우크라이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라고 말했다. 또 ‘더 넓은 유럽’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유럽이 미국과 중국에 대한 “이중 의존”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한쪽(중국)은 공정한 무역을 위협하고 가치사슬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다른 쪽(미국)은 무역전쟁을 벌이며 세계무역기구(WTO)와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해온 무역 질서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결심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와 사회를 이중의 의존성에서 오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마크롱은 국빈 방문 첫날 연설 대부분을 미국과 중국의 이중 위협에 할애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등호 표시는 없다. 한쪽에는 강력한 동맹국이 있고 다른 쪽에는 도전자가 있지만 기후변화를 논할 때에는 중국이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마크롱이 연설하는 연단 뒤에는 워털루 전투와 트라팔가 전투를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고 영-프 협력의 의미를 새삼 강조하면서, “브렉시트 시대의 정치적 갈등이 이제 끝났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평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EU의 새로운 무역전략에 ‘굿바이 트럼프, 헬로 아시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난달 말 EU 정상회담에서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WTO의 대안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중심이 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유럽의 "구조적 협력"을 제안했다. “이 계획은 세계에 다수 국가와 규칙을 기반으로 한 자유무역이 가능함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참여해야 할 프로젝트다. CPTPP와 유럽연합은 강력하기 때문이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첫 임기 때 탈퇴해버린 CPTPP를 EU와 연결해, 미국 없이도 자유무역 체제를 지켜내자는 제안으로 들렸다.
구체적인 진전은 아직 없지만, 나름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많다. EU 무역협상 대표를 지낸 이냐시오 가르시아 베르세로는 미국을 배제하는 파트너십이나 트럼프를 자극하는 움직임을 자제해야 한다면서도 “미국이 규칙을 믿지 않고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다른 나라들은 미국이 없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시아와 유럽 간 협력의 고리로는 영국이 꼽혔다. 영국은 CPTPP 회원국으로서, 일본이나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과 함께 무역협력을 논의해왔다. EU를 나간 영국이 아시아에 손을 내밀더니 이제는 유럽도 아시아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미 5월 제주에서 열린 CPTPP 장관회의에서 영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제3의 공급망’ 연대를 제안했다. 한 달 뒤 EU 정상회의에서 이 구상을 공식 제안으로 승격시킨 폰 데어 라이엔은 이미 CPTPP 회원국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있으며 뉴질랜드 총리와 공동 성명을 발표해 양측 간 대화를 “가능한 한 빨리” 하자고 했다. 이달 말에는 두 블록 간 장관급 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협력의 형식은 EU가 CPTPP에 가입하는 형태가 아니라 양자 사이에 다리를 구축하는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라틴아메리카도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 CPTPP와 EU가 아시아와 유럽을 대표하는 경제블록이라면, 라틴아메리카에는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가 있다. 이달 초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브라질의 루이스 이냐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메르코수르는 아시아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라며 “일본, 중국, 한국,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와의 더 깊은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잠재적 혜택”을 강조했다. 미국의 글로벌 무역전쟁에 맞서 역동적인 아시아 경제와 더 긴밀한 관계를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중남미가 일관된 행보를 보이긴 힘들어 보인다. 2023년 12월 아르헨티나에 하비에르 밀레이 정권이 들어선 뒤 룰라의 첫 방문이었으나 양자 회담은 없었다. 밀레이는 룰라에 어깃장을 놓듯 “함께든 혼자든 우리는 자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기다릴 수 없다”면서 단독으로라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겠다고 했다.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해온 밀레이는 과거에 룰라를 “부패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적도 있다. 이번에도 뜨악한 속내를 내비친 것은 밀레이 개인의 속성 탓일 수도 있지만, 브라질을 역내 경쟁자로 생각하고 불신해온 아르헨티나의 오랜 정서와도 닿아 있다.
메르코수르 의장인 룰라는 밀레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일축했고, “외부 파트너와의 블록 간 무역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역내 다른 지도자들의 생각도 룰라와 비슷해 보인다. 메르코수르는 지난해 12월 EU와 자유무역지대 설립에 합의했고 EU 회원국들의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 농민들이 남미산 농산물 수입에 반대하고 있어서 협상이 25년이나 끌었고 여전히 비준 전망은 불확실하지만 유럽과 남미의 블록 간 협력은 분명한 흐름이다. 이달 초 메르코수르 외교장관들은 EU에 가입하지 않은 유럽국 모임인 노르웨이, 스위스 등 유럽자유무역협회(EFTA) 4개 회원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메르코수르는 아랍에미리트(UAE), 캐나다와도 무역협정을 논의하고 있다. 메르코수르 본부가 있는 우루과이의 야만두 오르시 대통령은 “이제 한국과 캐나다 등 주요 파트너와의 협상을 재개할 때”라고 했다.
중국의 움직임은 어떨까. 시진핑 주석은 4월에 베이징에서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를 접견하며 중국과 유럽이 “일방적인 강압 행위에 함께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산체스 총리가 “유럽이 미국과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중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자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베이징과 협력하는 것은 제 목을 자르는 것”이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유럽과 중국 사이가 긴밀해지기는 쉽지 않다. 이달 안에 베이징에서 EU-중국 수교 50년을 기념하는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지만 양측 모두 기대치는 높지 않은 듯하다.
[CSIS] The Transatlantic Alliance in the Age of Trump: The Coming Collisions
유럽은 미국이 고율 관세로 경제에 타격을 주기 전에 미국과 무역협정을 맺어야 하고, 동시에 베이징에는 러시아 지원을 중단하고 각종 보조금을 줄이고 저가 덤핑을 중단하라고 사정해야 한다. 어느 것도 쉽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유럽이 시진핑의 중국과 트럼프의 미국 사이에서 ‘지정학적인 덫’에 빠졌다면서 “유럽에게는 중국에 내세울 카드가 없다”고 적었다. 실제로 지난 2일 브뤼셀을 방문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유럽 파트너들 간의 만남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유럽은 중국이 불공정한 행위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은 EU가 의료기기나 전기차 수입을 제한하는 것이 불공정한 대우라고 맞섰고 5일 보복조치를 내놨다. 중국과 유럽은 서로 불평하고 견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관계를 관리하고 있으나, 유럽이 원하는 파트너십은 중국보다는 한국을 비롯해 인도와 일본 등 아시아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들 쪽에 더 기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서 합종연횡이 벌어지지만 ‘미국 뺀 자유무역 글로벌 연대’에는 장애물이 많다. 모든 블록이 약점을 안고 있다. 유럽은 경제적 한계가 크다. ‘스타트업이 없는 유럽’이라고들 한다. 인공지능과 전기차, 자율주행 등 미래 기술 경쟁에서 유럽의 강점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중국산 저가 전기차 앞에 독일마저 흔들리는 실정이다. 자체 성장 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과 경쟁하며 동시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억압 체제를 유지하고 러시아를 지지하며 세계 질서를 깨뜨리는 편에 선 중국과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도 있다. ‘이상’은 현실 앞에 고개를 숙이기 쉽다지만, 가치관 차이는 국가의 모델이 다르다는 의미다. ‘이상’이나 ‘가치관’은 현실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한다. 또한 미국 없이 유럽의 안보는 홀로서기가 불가능하다. 유럽 방위 계획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휴전한 이후에도 안보를 강화한다는 계획에 역내 국가들이 적극 참여하려 할까?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상황은 아시아도 비슷하다. 중국 외에 역내 주요 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다. 대만 문제라는 민감한 사안에 남중국해 분쟁, 한일 갈등을 비롯한 역사적 지정학적 균열이 상존한다. 아시아를 하나의 블록으로 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여전히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지역 블록 안에 첨단 기술을 가진 제조업 국가가 없다. 중심국가 브라질은 중국과 브릭스로 묶여 있지만 미국 못잖게 중국과도 경제 갈등이 많다. 산업국가로 성장하려는 브라질은 중국산 덤핑 공세에 어느 나라보다 민감하다.
그럼에도 ‘미국 뺀 연대’의 의미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부분의 ‘자유무역 국가’들은 미국 시장에 수출하면서 경제를 키웠다. 세계경찰, 패권국가 위상을 누리는 대신에 미국은 시장을 내줬다. 하지만 미국의 ‘아량’은 20세기 후반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트럼프 정부의 무역전쟁은 그 결과가 가장 노골적이고 싼티나게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 현실을 이제는 누구도 모른 척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자유무역의 이득을 지키면서 룰을 가다듬는 것은 결국 미국 아닌 나라들의 몫이 돼버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에는 그 룰을 지킬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 국가들의 연대’ 혹은 블록 간 협력은 성공적이든 한계가 있든 거대한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이 지키겠다고 나선 무역 규칙이나 규범이, 미국이 과거 세계에 강요했던 것보다 조금이라도 공평한 것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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