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붉은 선
페데리코 람피니. 김정하 옮김. 갈라파고스. 8/17

책은 엄청 재미있었는데 번역 실수들이 매우 아쉽다. 훌륭한 번역가이신 것 같은 데 편집자가 좀 더 꼼꼼하게 봤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제국은 몰락하고 있는가?
미국의 국가 채무는 2021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의 104.4 퍼센트에 이르지만 유럽연합의 평균치보다는 낮은 편이며, 베네수엘라나 일본의 채무 비율보다 낮다. 중국 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국 재무부 채권을 가장 많이 구입한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연방준비제도가 채권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미국의 가장 큰 재정 지원 국가인 셈이다.
중국 정부가 미국 재무부의 채권을 (더 이상) 구입하지 않는 것으로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하다. 중국 정부가 이를 시도한다면 스스로 더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 타격은 달러에 대한 급격한 평가절하로 인해 중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의 수출 가격 이 크게 인상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중국처럼 대외 수출이 수입보다 많은 국가는 안전한 재정 활동을 통해 이를 순환시켜야 한다. 세계적으로 미국 재무부 채권만큼 안전한 것은 없다.
-27
미국의 리더십은 항상 문화적 패권을 동반했다. 미국 제국의 몰락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패권의 여러 요인들을 규명하고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를 분석하며, 몰락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불가역적인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정치의 붉은 선은, 거대한 군사기지들의 붉은 선들에 앞서 거대한 미 해군의 항구들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제국은 이념이 물리적인 힘만큼이나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들에서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해왔다. 이념들의 빛이 바래진다면 군사력은 시대착오적이며 높은 비용으로 인해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 수 있다.
-37-39
서양은 중국을 죽이고 있는가?
인종차별이 서양의 병폐라고 믿는 사람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결코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어떤 민족은 자신의 우월성 이론에 고취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유교 문명권의 민족도 포함된다.
… 중국의 역사책에서 정화는 애국자로 높게 평가받았으며, 정복이나 착취의 야망 없이 모든 대륙을 탐험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영웅으로 서술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러한 신화적 이미지는 재검토된 후 중국의 역사책들에서 삭제되었다. 실제로 정화의 거대한 함대는 명나라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만들기 위해 그가 방문한 모든 지역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52
시진핑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연설문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중국의 시진핑이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역사학자를 인용한 것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서양의 정치가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으며 도널드 트럼프는 외교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텔레비전의 토크쇼를 시청할 뿐이다. 이는 차기 선거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절대 권력의 군주가 누릴 수 있는 부수적인 이익일까? 사실은 투키디데스가 베이징의 '열렬한 독자' 덕분에 큰 행운을 누린 것이다. 베이징의 권력자는 우리 서양인들, 특히 미국인들에게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일으켜 모두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과오를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53
카를 하우스호퍼가 지향했던 나치즘의 지정학적인 비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우스호퍼에 따르면, 몰락하고 있는 국가들만이 안정된 국경을 원하고, 쇠퇴의 길에 접어든 문명만이 요새를 구축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 발전하는 국가들은 성벽이 아니라 도로를 건설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중국은 자신의 문명 발전을 위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58
유럽의 심장 독일, 그리고 지도에서 드러난 영원한 혁명
1871년과 1990년 사이에 그 어떤 국가의 지도도 독일처럼 빈번하게, 그리고 충격적으로 바뀐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독일은 재통일에 성공했다. 통일된 유럽의 경계들도 카롤링거에서 신성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게르만의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은 덕분에 유럽은 오늘날 '공격적이지 않은' 초강력 세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유럽은 비스마르크의 시대처럼 불안정한 상태에 직면해 있다.
-12
독일을 지도에 '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도할 때마다 계속해서 성공하지 못한다. 독일국가는 상당히 빈번하게 형태와 차원을 바꾼다.
독일은 북쪽으로 바다의 경계가 있지만 남쪽으로는 상황이 조금 복잡해지는데, 그 이유는 독일과 알프스 사이의 지역들에 수 세기 전부터 공통의 언어와 문화를 사용하지만 지리적 정치성을 달리하는 민족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오스트리아, 독일 방면의 스위스). 동쪽과 서쪽으로는 이처럼 정확한 자연의 경계가 없다.
이처럼 물리적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하나의 '지리적인 사실'이 유래되는데, 이는 독일이 그 특성상 불안정한 실체라는 점이다. 독일은 어떻게 움직이든지 이웃을 방해한다.
-97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로마의 통일이라는 역할을 계승하려는 자는 게르만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집중되는 권력들이었다. 카롤링거 제국은 인종적으로 게르만이었다. 비록 오늘날의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카롤링거 제국을 계승했다는 주장을 내세울지라도 말이다. '게르만족'인 샤를마뉴의 정복을 보여주는 붉은 선을 잘 관찰하면 이로부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붉은 선에는 큰 틀에서 6개 국가의 유럽, 즉 확산되기 이전의 첫 유럽공동체를 창설했던 핵심이 속해 있다.
카롤링거 왕조가 붕괴된 이후, 대륙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유럽의 목표를 정복한 가장 중요한 제국은 로마-게르만 권력인 신성로마제국이었다. 그들은 게르만이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또한 수많은 기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장부에 독일, 갈리아, 이탈리아 민중을 품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98-99
1990년대 말의 맥락에서 볼 때, 게르만화라는 용어가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지만 바람직하지는 않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음을 떠올렸다. 통화의 안정, 보다 폐쇄적이고 전통적이며 금융-산업 간 불투명과 근친상간의 관계로 드러난 자본주의에 기초한 경제 문화의 확산이 그것이 었다. 최고경영진과 조합의 공동결정에 기초한 산업 관계의 장치는 독일적인 것이었다(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특징들이 공모와 부패의 사례로 전락했다).
또한 조합의 중재, 파업 수단의 적절한 활용, 유익한 일에 대한 동참을 조건으로 하는 사회적 평화 역시 독일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말, '라인강의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드러났다. 이것은 기업가 정신, 조합의 참여와 결속력을 중재하려는 체제였다. 이 시스템은 카롤링거 시대와 이후 신성로마제국 당시 고대 유럽의 단단한 중심이었던 주변 지역들로도 확산되었다(브뤼셀, 플랑드르, 룩셈부르크, 프랑스 동북부 지역). 미셸 알베르, 카를로 아젤리오 참피, 로마노 프로디, 마리오 몬티, 마리오 드라기와 같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인물들은 이 모델의 미덕을 확신했다.
-116
많은 독일인들은 경제를 도덕적인 이론으로 간주했다. 미국이 2008년의 위기를 발생시킨 장본인이면서도 다른 국가들을 훈계하는 것을 메르켈은 수용할 수 없었다.
독일의 도덕주의자와 같은 태도는 도이치은행의 파생 상품들부터 폭스바겐의 유로디젤에 이르는 거대한 스캔들을 고려할 때 진정으로 정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처럼 독일의 확고하지 못한 헤게모니는 변칙적인 것이다. 여기에 강압적이고 삐뚤어진 논리, 즉 독일을 모방할 수 있는 학생이 거의 없는 환상적인 모델로 남게 하려는 논리가 추가되었다.
-122-123
“독일 텔레비전은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인종이나 국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금지했다. 따라서 우리 여성들은 실제로 조사된 정보를 확인하고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진실이 알려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원인으로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본능적인 두려움, 수치심 외에, 미디어에 의한 자기 검열과 무슬림 공동체 내에 민족적• 문화적 원인이 있는 에피소드를 설명하는 데 따른 당혹감도 있었다. 이후 점차적으로 쾰른의 설날에 대한 진실이 알려졌는데, 이는 국가적 차원의 충격이었다.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사건들이 단지 일회성 폭발이 아니라 '정상'이 되어버린 일상적인 현실을 둘러싸고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30
에르도안 대통령은 연간 30억 유로를 대가로, 과거 카다피가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와 했던 것과 유사하게 상당수의 난민을 자국 내에 머물게 하는 데 합의했다.
이븐 칼둔은 체계적인 상수, 즉 (비무장 농민들로부터 수입을 징수하는 데 전념하는) 평화주의 제국들이 국경의 질서 유지 임무를 야만족 전사들에게 위임하는 무장민병대 역할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카다피와 에르도안은 이븐 칼둔이 6세기 전에 목록화하기 시작했던 많은 경우들 중에 단지 최근의 사례들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은 '초식' 강대국으로서 오래되고 검증된 모델을 지향했다.
-131-132
러시아는 결코 지나치게 크지 않다
이 국가의 기원에는 역사와 지리에 대한 유머가 존재하는데, 바로 진정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146
수 세기 동안 모스크바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 때문에) 서유럽의 변화들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레이의 말처럼, "러시아는 봉건 기사도, 도시혁명도 경험하지 못했다".
야만족의 침략과 경계를 접한 상태에서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인은 그리스 정교의 신앙에 집착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 유목민족과 아시아인,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슬람에 대항한 저항의 보루라고 상상하면서 민족적 전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 최초의 민족서사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상이한 특징이 공존한다. 하나는 자신들이 완전한 유럽인이 아니라는 자의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럽을 구원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모스크바는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보루 역할을 상속한 '제3의 로마'라는 이념을 형성했다. 러시아를 중부유럽에서 발칸까지 수많은 '형제' 민족의 지도자로 간주하는 운동인 범슬라브주의도 있었다. 끝으로 국제공산주의도 있었는데, 이는 모스크바가 보편적 이념의 수도로서 멀리 중국까지 그 영향력을 확산해야 할 메시아적인 역할을 가리켰다.
-148-149
2002년 로마노 프로디는 유럽연합위원회의 의장으로서러시아에 '제도를 제외한 모든 것'을 공유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상당히 관대한 제안이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는 긴밀한 관계 구축, 러시아의 준통합,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고도 거대 단일시장에 속하는 것에 따른 모든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에 러시아의 입장, 즉 표도르 루캬노프에 따르면 프로디의 제안은 모욕이며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155
제국팽창주의의 경쟁은 러시아 군대의 재무장과 근대화에 의해 가능했다.
(소련 시절의) 군사적 우위는 핵잠수함 쿠르스크가 바렌츠해에 좌초되었을 때인 2000년에 함장이 200 달러의 월급을 받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에서의 전쟁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압하스와 남오세티야의 분리주의 공화국들에 대한 침공을 계기로 군대의 근대화를 시작했다. 10여 년 동안 7,000억 달러를 투자해 붉은 군대를 보다 가볍고 신속하며 국지전투에 적합한 군대로 변화시켰다. 두 차례의 하이브리드 전쟁이었던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는 준군사단체의 활동, 러시아 위장 부대, 러시아가 훈련시킨 자원자들, 그리고 국경 근처에서 불안을 조장할 목적으로 병행된 군사 기동훈련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나토에 대한 도발도 증가했는데 미국, 영국, 스웨덴의 상공에 러시아 항공기들이 빈번하게 출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157
21 세기의 정치 영역에서 볼 때, 수많은 권위주의적 모델 중에는 보다 효율적인 모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의 모델이다. 푸틴의 러시아가 공산주의적인 '제3의 로마'의 전 지구적 영향을 발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민족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정권이 30년 전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경제적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163
군사 활동과 교역 활동의 이유들로 인해 러시아는 선박 항해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인도양으로의 진출에 상당히 집착하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위한 조건은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쪽 바다를 향한 러시아의 노력은… 오늘날 덩치가 더 커진 중국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중국은 자신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파키스탄의 중요한 항구를 이미 통제하고 있다. 즉, 페르시아 또는 소말리아를 향한 바닷길 항로를 확보했다.
중국의 모든 신실크로드 전략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야망을 결정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165
아시아 방면의 교착상태로 인해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모든 것에 확고하지 못한 상태이며, 트럼프의 국가-보호주의적인 지향성에 실망한 서유럽을 압박하는 전략으로 우회할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의 아시아 정책에 중국이 드러냈던 것보다 훨씬 약한 정도의 저항에 부딪힐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국가의 복합적인 열등감과 불안감 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러시아의 영원한 딜레마를 배경으로, 오늘날 붉은 선의 새로운 확장 가능성은 유럽을 향하고 있다.
종종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 인사들과 시민들은 제국 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향수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역할에 자족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많은 측면에서 빈곤하고 후진적인 국가이면서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준비하는 것 같지 않다.
-166
인도의 희망은 어떻게 되었나?
『알렉산드로스의 소설』은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기원전 323년과 기원후 4세기 사이에 작성된 이야기였으며, 진실은 서사시와 신화의 실타래로 얽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지리와 역사,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우리에게는 문화적 의미로 가득한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최초 인식은 이 책에 근원을 두고 있다.
2,000년 전부터 알렉산드로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의 신화를 통해 서양의 세계관에서도 지리에서도 두 개의 끈질긴 패러다임인 동양과 서양 간 첫 반목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제국은 가장 단명한 제국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인도는 서양 세계의 지리와 문명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다.
-172-173
우리에게 오늘날 인도의 '근접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인도는 놀라운 근대성을 보유하고 있고 실리콘밸리와 기술적 경쟁 관계에 있다. 인도는 2001년의 9.11 사태와 유럽의 비극에 반세기 앞서 이슬람과의 충동이 있었던 역사 무대였다. 미국의 모든 전략적 계산에 따르면 인도는 중국에 대한 균형추에 해당한다. 그리고 국민적 포퓰리즘의 실험실이기도 하다. 인도는 현기증을 일으키고, 혼란스럽게 하며, 내재된 수많은 모순들로 인해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낙담시키기도 한다.
-174
2,000년 전부터 우리는 인도에 대해 우리의 무의식적인 고통, 우리의 부적절함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마술 같은 해결책을 기대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인도는 서양과 별개의 존재이지만 내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중국과 비교할 때 고유한 차이점 중 하나가 드러난다. 우리 유럽인은 종종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정의된 바 있다. 반면에 중국과는 공통된 역사가 훨씬 적고 그것도 최근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최근 중국과 인도 사이에 어느 정도는 인위적인 적대감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두 발전 모델, 즉 하나는 권위주의적인 자본-공산주의 모델에 의해 지배되고, 다른 하나는 혼란 스러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두 모델 간 경쟁의 결과로서 그 반향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5
이러한 빈곤의 모습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이러한 모습이 유럽으로, 예를 들면 밀라노 첸트랄레 기차역이나 로마 테르미니 기차 역으로 옮겨갔다. 두 기차역은 캘커타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장소다.
-176
인도와 미국은 중국의 팽창주의를 저지하는 데 전략적 이해를 같이한다. 이러한 성향은 버락 오바마의 시대에도 여전했다.
1947년 독립한 인도의 근대화에서는 지리적으로 두 가지 사실이 우선시 되었다. 첫째는 파키스탄의 이슬람 신정정치에 맞서는 것이었다(파키스탄은 이란보다 먼저, 종교를 국가정체성의 근본으로 선택한 바 있다). 둘째는 국경 을 접하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미국이 인도에게 필수적인 동맹으로 등장한 것은 불과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는 인도가 자본주의로 회귀한 결과 중 하나로서… 모디-트럼프와 더불어 가치조정이 시작되었다.
-178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비트 세대, 비틀스 등등)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인도, 즉 인도 문명에서 모든 종교들의 어머니, 마틴 루터 킹과 넬슨 만델라에게 영감을 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과 평화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지혜'의 주요 원천인 신화의 핵심적인 저장고를 숭배하려는 서양 엘리트들의 관습과 소비를 위해 재창조된 이미지였다.
폭넓게 상상된 인도에 오랫동안 빠져 있던 서양은 대략 20여 년 전, 인도의 또 다른 신화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 았다. 소프트웨어의 세계적인 수도인 벵갈루루가 그것이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인도의 미래 비전이 주목을 받은 것은 문화적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 병행해, '발리우드(Bollywood)'는 세계의 영화계와 영화관들에 엄선된 식재료들로 반죽한 인디언 드림을 가져 왔다. 비디아다르 나이폴에서 살만 루슈디까지, 아미타브 고시에서 수케투 메타까지,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의 지식인들 덕분에 서양의 박식한 엘리트들도 고풍스러운 동시에 현대적인 인도, 즉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모순들로 가득하고 신화와 고풍의 퇴적물이 응축되었지만 업데이트되고 국제화된 인도를 다시금 사랑하게 되었다. 문학과 정치, 또는 과학과 투쟁성 간의 경계에서 아룬다티 로이와 반다나 시바 같은 두 여성은 서양의 급진 좌파 로부터 예언자로 평가되었다.
이 시점에서 나렌드라 모디가 등장했고, 우리를 다시금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179-181
경제적 적극성 덕분에 중국 경제처럼 뚜렷한 거시적 불균형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 거대 기업인 미탈과 타타의 과도한 철강 생산과 벵갈루루 또는 하이데라바드의 소프트웨어 분야 노동력 재배치를 제외한다면, 서양과 인도 간 심각한 경제적 분쟁은 없다. 인도는 수출에 기초한 발전 모델이 아니라, 내수 지향성의 경제에 근거한다. 이것은 글로벌 경제 균형 면에서 인도가 안정적인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184
영국이 건설한 식민제국인 인도제국(British Raj)'의 붉은 선… 오늘날의 경계 및 분열과 이슬람 분리 이전의 경계 사이에는 아시아 아대륙을 두고 대립하던 거대 종교 간 관계의 기원으로 소급되는 비극이 위치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월함 콤플렉스와 죄책감 콤플렉스를 동시에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첫째는 거만함에 의한 진정한 죄책감 콤플렉스로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유독 서양하고만 좋지 못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슬람은 서양 문명과 상당히 다른 종교인 힌두교 문명하고도 난해하고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따라서 서양과의 관계에만 국한해 무슬림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은 심각한 무지의 결과이다.
죄책감 콤플렉스는 서구중심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에 따르면 무슬림 세계의 적대감은 서양이 식민지 시대에 저지른 짓에 대해 책임져야 할 대가이다. 다시 한번 서양은 스스로 세상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 이슬람은 인도에서 버마, 중국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지역들에서 국경을 맞대고 함께 살아가는 힌두교 및 불교와 지극히 오래된 분쟁을 상속했다. 인도는 다른 모든 경우보다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곳에서 식민지 기억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침략했고 식민지화했으며 힌두교 주민들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무슬림의 무굴제국을 건설했다.
-186-187
17세기에 무굴제국의 인구는 1억 명에 달했으며, 오스만 제국보다 5배나 더 큰 무슬림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오직 하나의 제국만이 이들과 경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명나라의 중국이었다. 아그라의 인구는 75만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런던 인구의 2배이며 파리와 콘스탄티노플을 넘어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이 종교전쟁으로 수많은 고통을 받았고 종교재판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무굴제국은 관용적이고 개방된 이슬람을 통해 힌두교와 기독교, 그리고 다른 종교들과 조화로운 공존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타지마할에 묻힌 왕비의 이야기는 여성 의 전형적인 역할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샤자한을 포함한 무굴제국의 권력자들은 일부다처제를 따랐지만, 부인들에게 하렘 내에서 일정한 정도의 자유로운 풍속을 허용했다. 하렘은 경제 권력의 중심이기도 했다. 부유하고 교육을 받았으며 여성들은 이곳에서 사업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여성들은 중계 네트워크를 활성화하여 전 세계와의 무역을 관리했으며, 상선을 소유한 채 인도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아라비아와 그 밖의 지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타지마할이 건설되기 전인 1600년에 로마에서는 조르다노 부르노가 이단으로 고발되어 화형을 당했다. 반면에 아그라에서는 황제 악바르(Akbar, 샤자한의 할아버지)가 이미 관용을 말하고 있었고, 무슬림, 힌두교도, 기독교도, 유대인, 자이나교도, 파르시들 간의 대화를 장려하고 있었다.
-190-191
현재의 인도와 무슬림 간 긴장을 영국 식민주의에 의한 결과로 기술하는 유럽 중심의 잘못된 인식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영국이 인도를 정복하고 종교적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훨씬 이전에 이러한 긴장 상태는 이미 확대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은 1658년부터 1707년까지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아우랑제브의 통치 기간에 발생했다. 그는 급작스럽게 자신들의 조상이 추진해오던 관용과 세계교회주의(Ecuminism)의 전통을 중단하고 힌두교 사원들을 파괴했으며 시크교도와 시아파 무슬림을 탄압했다. 그리고 특히 영국인들이 들어온 이후 소수의 기독교적인 요인들이 추가되면서 불용의 성향이 한층 심화되었다.
-192
(인-파 독립기) 마하트마 간디의 외침은 충돌의 소음에 묻혔다. 분열 방지를 위한 극단적인 시도로서 마하트마 간디는 대담한 제안을 했다. 그는 인도의 수상으로, 네루가 아니라 무함마드 알리 진나를 추천했다. 누구도 이러한 발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무산되었다. 간디는 인도 가 영국 식민지의 지배가 남긴 유산에서 자신의 지분(약 4,000만 파운드)을 파키스탄에 제공한다는 주장을 관철했다. 궁극적으로 분열은 그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
네루는 이슬람 파키스탄이 성립하는 것이 인도의 세속적이고 다종교적인 모델에 지속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루는 선거 목적에 종교적 상징을 사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힌두교의 통합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서양화된 엘리트들과의 동맹에 주력했다. 또한 사회공산주의자들과도 협력하여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합 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30년 동안 인도에 대한 그의 사상은 성공적이었다.
그의 후임자들은 일련의 양보와 타협, 오염과 위험한 관계의 시즌을 시작했다. 인디라는 표를 얻기 위해 때에 따라서는 시크교도들, 한층 광신적인 힌두교도들, 그리고 무슬림과도 협정을 체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라지브 간디 정부는 의회에서 무슬림 여성헌장(Musim Woman's Act)을 승인하게 하고 무슬림 가족들을 위해 가정 내에서 이슬람법인 샤리아의 우선권을 설정했다. 이것은 힌두교도들에게 국민회의가 무슬림 소수자들의 협박에 굴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힌두민족주의의 부활은 압도적이었다.
-199
인도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슬람에서 기원하는 테러리즘의 세계적인 실험실이 되고 있었다.
1985년 인도항공 소속의 한 여객기가 캐나다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폭발한 사건에서는, 1988년 스코틀랜드의 로커비에서 팬암 103기를 폭발시키는 데 사용된 것과 동일한 기술과 물질이 실험됐었다. 1999년에는 인도항공 814 항공기가 칸다하르에서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해 납치되었다. 마드리드와 런던의 참사가 있기 오래전에, 같은 도시의 여러 기차와 버스에서 동시에 폭발한 폭탄의 제조 기술은 이미 뭄바이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2008년 뭄바이 테러와 동일 기술이 7년 후인 2015년 11 월 파리 테러에 사용되었다. 국경을 접한 곳에서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핵무장 이슬람국가의 존재는 이 위협에 대한 인도의 인식이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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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최후의 소프트파워
이탈리아 이민 정책에 대한 논쟁은 만약 로마교회와 모든 부속 조직들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전혀 달랐을 것이다. 나는 가톨릭의 지정학 또는 인도주의적인 비상사태의 붉은 선이 어떻게 이탈리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관찰하는 데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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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과 정체성, 지중해에 함몰된 이탈리아
“인구통계학적인 발전의 정체 또는 진화에 의해 타협된 국가들에 정착한 사람들, 점차 늘어나고 있는 그 사람들의 압박에 대처할 길은 하나뿐이다. 희망과 믿음을 심어줄 정도의 강력한 선택, 즉 부모가 먼 타국에서 왔을지 라도 태어난 나라를 조국으로 간주하는 선택 말이다.”
(프랑코 카르디니, 2017년 7월 《라 레푸블리카》 기고 「권위와 자긍심은 우리가 모두 잡종이라고 말한다(La dignica e orgoglio che ai fanno dire: siamo tutti bast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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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다인종 사회에 살고 있으며 과거로의 회귀는 없을 것이다. 그럼 지배적인 가치들, 상대적으로 우월해질 인종 모델은 무엇일까? 이것은 출생지주의에 대한 논쟁 그 자체가 공포심을 유발하는 이유이다. 2011년에는 출생지주의에 찬성하는 사람이 전체의 71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도 대다수였다. 하지만 불과 6년 후에는 이탈리아인의 절반 이상(54퍼센트)이 견해를 바꾸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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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심각한 것은 이민자 공동체와 공존하면서 살고 있는 시민들의 중심에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외국인 혐오증, 또는 더 심각한 경우 이슬람공포증, 그리고 남성 중심적 성향과 가부장제 문화는 물론, 북아프리카인 이웃의 성차별주의에 노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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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에 투표하는 서민들, 둘로 나뉘는 세계
에런라이크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 기고에서) 누군가가 과거에 광부였던 사람들을 간호사, 슈퍼마켓 계산원 등 과거에 여성들이 독점하던 직업들에 적응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남성 정체성의 위기와, 진보주의적인 엘리트들 사이에 많은 위선이 존재하는 직업 혁명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담당하던 일자리를 가리키는 '핑크칼라(pink collars)'라는 신조어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남자다움과 남성적 정체성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적인 엘리트들은 '마초'들에 대한 집착을 시대착오적인 태도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엘리트들의 멸시는 근본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귀족적인' 직업들, 즉 주로 좌파에 투표한 자들의 이러한 직업에도 성에 근거한 역할 구분이 존재한다. 중상류충 남자들은 분명한 남성적 지배가 존재하는 기업 매니저나 변호사, 기술이나 금융 전문가 분야에서 활동한다. 이들은 자녀를 돌보거나 병든 노인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 트럼프가 그들(백인 노동자들)에게 준 것은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미지, 즉 이들의 문화, 가치, 육체노동을 하고 규칙을 존중하는 자신들에 대한 이미지였다.
-34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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