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교황 레오 14세의 첫 인사다.
콘클라베에서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을 제267대 로마 주교로 선출했다고 바티칸뉴스가 보도했다. 레오 14세는 아메리카 대륙 출신의 두 번째 교황이자 사상 첫 미국 출신 교황이 됐다.
133명의 추기경이 콘클라베에 모인 지 이틀 만에 선출되었는데, 비교적 빨리 의견이 모인 편이다. 프란치스코와 베네딕토 16세도 콘클라베 둘째 날 저녁에, 요한 바오로 2세는 1978년 셋째 날에 결정됐다.

페루 시민이 된 사제
레오 14세는 1955년 9월 14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출신의 아버지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69세다. 펜실베이니아주 빌라노바 대학교에서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시카고 가톨릭 신학대학교에서 신학 학위를 받았다. 이후 로마로 파견되어 교황청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고 1982년 6월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이듬해부터 페루의 트루히요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부터 11년간 줄곧 페루에서 근무했으며, 1999년에는 시카고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선의의 어머니' 관구의 관구장으로 선출되었다. 2001년부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2013년까지 연임했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페루 치클라요 주교를 역임했으며, 2015년에는 페루 시민권도 취득했다. 2023년 1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로마로 불러 교황청 라틴아메리카 위원회의 회장으로 임명하여 대주교로 승격시켰다. 2024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최근에는 바티칸에서 세계 주교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톨릭뉴스서비스에 따르면, 그는 “미국인 추기경들 중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교황청 라틴아메리카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라틴아메리카 사람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락 의식과 발표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새로운 로마 주교가 선출되었음을 신자들과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다. 현 프로토디콘(교황 대리) 프랑스 추기경 맘베르티가 새 교황의 이름을 발표했다.
선출 이후 절차를 보면
1) 수락 의식: 교황청 예식서와 사도헌장에 명시된 규칙에 따라 시스티나 성당에 참석한 추기경 중 한 명이 과반수를 얻으면, 선임 추기경이 전체 선거인단을 대표하여 라틴어로 "교황으로 정식 선출되신 것을 수락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수락하면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공증인 역할을 하는 전례 담당자가 두 명의 예식 담당자를 증인으로 세우고, 교황의 수락과 그가 선택한 이름을 확인하는 문서를 작성한다.
2) 흰 연기: 수락 의식이 끝나면 투표용지와 기타 선거 관련 서류가 모두 소각되면서 흰 연기가 피어나와 새 교황이 탄생했음을 세계에 알린다.
3) 눈물의 방과 첫 예식: 성 베드로 광장의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전 세계가 새 교황의 이름을 기다리는 동안, 새로 선출된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을 나와 "눈물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세 가지 교황 예복 중 하나를 입고 몇 분간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시스티나 성당으로 돌아온 새 교황이 의자에 앉으면 간단한 의식이 시작된다. 선임 추기경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또는 "내 양을 먹이라" 중 하나를 골라 낭독한다. 원로 사제가 새로 선출된 교황을 위해 기도한 후 모든 추기경들이 새 교황에게 인사하고 순종을 서약한다.
4) 발표: 예식이 끝나면 프로토데콘 맘베르티 추기경이 로지아(바티칸 발코니)에 나와 새 교황의 선출과 이름을 알린다. "아난티오 보비스 가우디움 마그넘, 하베무스 파팜!"("여러분에게 큰 기쁨을 알립니다. 교황이 탄생했습니다!")
새 교황은 바오로 성당에 들러 기도한 뒤 로지아로 나와 첫 번째 축복인 우르비 엣 오르비를 전한다.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레오14세는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로 말했고, 전통에 따라 라틴어로 마무리했다. 영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교황 이름 '레오 14세'의 의미
새 교황이 선출된 직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초기 수세기 동안 많은 교황이 원래 이름이 이교도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모든 교황이 이 관행을 따랐던 것은 아니다. 역대 교황 266명(새 교황 포함 267명) 중 129명만이 새로운 이름을 선택했다. 이 전통은 955년 교황 요한 12세부터 시작되어 2명을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관행이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은 처음이었지만 이전 교황 중에서 수도회 직계 또는 존경하는 인물의 이름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흔한 이름은 요한, 그레고리, 베네딕토, 비오였다.
이번에는 레오 14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레오 1세는 5세기 인물이었고, 새 교황이 모범으로 삼은 것은 아마도 레오 13세였을 것이다. 레오 13세는 1878-1903년에 재위하며 바티칸의 현대를 이끈 인물이었다. 지적이었고 외교활동이 활발했고 특히 사회정의와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교황이었는데, 새 교황은 그 이름을 선택했다.
프란치스코의 개혁 의제를 이어갈 것인가
일거수일투족이 프란치스코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는 첫 발코니 인사 때 흰 옷만 입었다. 전례를 깨고 빈자들의 교황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반면 레오14세는 전통적인 붉은옷을 걸쳤다. 중도, 전통으로의 일정 부분 복귀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오 14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의제에 전념하고 효과적인 관리 능력이 입증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이끌며 행정력을 보여주었으며, 온화하지만 리더십이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1962-65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물론 당시에는 사제가 아니었지만). 그 공의회에서 현대 가톨릭의 진보적 의제들이 많이 논의됐다. 이후 라틴아메리카 주교 평의회(약칭 CELAM)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공동체주의와 빈곤과 정의 문제에 관심을 쏟는 분위기가 마련됐다. 좌파 해방신학보다 정제된 실천적인 신학 흐름이었는데 프란치스코도 그렇고 레오 14세도 그 영향권에 있었다고 평가받았다.
바티칸 전통파, 보수파들과는 다른 성향을 가졌으며, 온화하고 안정적이지만 개혁적이고 프란치스코의 뜻을 이어갈 사람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교황이 되자마자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기 전에 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며 전임 교황의 유산을 기억해달라고 촉구했다. "우리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다리를 놓는 교회, 대화를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2025년은 25년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포한 교회의 희년으로, 바티칸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행사로 바쁜 일정이 예정되어 있다.
새 교황 선출에 대한 세계 반응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오늘은 미국의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과 전 세계 신자들에게 역사적이고 희망적인 순간"이라고 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말 흥분되고 우리나라에 큰 영광입니다. 교황 레오 14세를 만나게 되기를 고대합니다.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주었듯이 교황청은 우리 시대의 주요 문제, 특히 기후 변화, 빈곤 완화, 전 세계의 평화와 정의 증진을 위해 사람들과 국가를 하나로 모으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와 바티칸 사이에 구축된 건설적인 대화와 협력이 기초하여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새 교황 레오 14세는 단순한 미국인 그 이상입니다. 그의 직계 조상은 스페인과 프랑스인 등 라틴계이며, 라틴 아메리카의 페루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가 전 세계 이민자들을 위한 위대한 지도자가 되길 바라며, 현재 미국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는 라틴계 이민자 형제자매들을 일으켜 세워주길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생명을 수호하는 인류의 위대한 힘을 키우고 기후 위기와 생물 멸종을 초래한 탐욕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이 어려운 시기에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신자들에게 희망과 지침을 제시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했고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새 교황이 희망과 단합이 필요한 세계에서 대화를 강화하고 인권을 수호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페루 사람들은 자기네 교황이 나왔다고 기뻐하고 있다.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은 "2015년 귀화한 이래 수년간 페루에서 살면서 겸손과 사랑, 깊은 신앙으로 국민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봉사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과 친밀하게 지내셨던 모습은 우리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페루를 사랑했던 사목자가 세계 교회를 이끌게 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축하합니다!"라고 했다.
어려운 시기, 기후 대응, 이주민 문제 등등 세계가 걱정하는 이슈들과 거기에 대한 새 교황의 기여를 기대하는 목소리들이었다.
사제 성학대 등 가톨릭 내부의 복잡한 문제들
프란치스코는 낙태, 동성애, 성 역할, 피임과 같은 가톨릭 내부의 이슈를 넘어 세계의 가난한 사람, 난민들을 옹호하고 이타주의에 기반을 둔 사명을 강조했다. 하지만 내내 사제들의 성범죄 문제에 발목이 잡혔다. 새 교황도 그 문제부터 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검약을 강조해서 외부의 찬사를 받은 것만큼이나, 교회 내 보수파들과 싸워야 했다. 교회 내에는 성, 성별, 결혼, 이민 문제에 대해 더 엄격한 노선을 주장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여성 문제이다. 교황청 주교성의 일원이 된 세 여성의 기여에 대한 질문을 받은 프레보스트는 바티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의 임명은 교황청에도 이제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교황의 제스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노선을 이어가겠다는 얘기다.
이주민의 권리, 반전 평화 등 현실 이슈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고 얼마나 관여할 것인가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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