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 세계의 골칫거리 ’기독교 우파‘

딸기21 2025. 5. 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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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2005년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나 2013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장례식 때처럼 대규모 ‘조문 외교’가 펼쳐지는 자리였다.
 
세계 130개국에서 온 고위 인사와 대표단이 참석했으나 속내는 제각각이었다. 교황은 생전에 전쟁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비판했으며, 선종 직전까지 미국 부통령을 만나 이민자들의 권리를 옹호한 인물이다. 프란치스코의 사회적 메시지들이 워낙 강력했고 더군다나 세계가 전쟁과 갈등에 휘말려 있는 상황이라 ‘조문의 정치학’이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교황 선종 직후 몇몇 이스라엘 관리들과 정치인들이 소셜미디어에 애도 글을 올렸지만 이스라엘 외교부는 외교관들에게 애도 메시지를 삭제하고 바티칸의 조문 관련 문서에는 서명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아이작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은 애도를 표했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메시지조차 없었다.
 
공식 조문단 맨 앞줄 눈에 띄는 자리는 프란치스코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차지했다. 극우 자유지상주의자인 밀레이는 2023년 대선 때 프란치스코를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멍청이"라고 불렀던 인물이다. 그 옆에는 바티칸을 둘러싸고 있는 이탈리아 대표가 앉았다. 이어 프랑스어 국가 표기 알파벳 순서로 자리가 배치됐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영어 표기(US)가 아닌 프랑스식 표기(Etats Unis)에 따라 다른 정상들보다 앞자리에 착석했다. 미국 언론들은 “프랑스어 표기가 기준이 된 덕에 우크라이나(Ukraine) 대통령과 나란히 앉지 않아도 됐다”고 전했다.
 

Photo by ISABELLA BONOTTO/AFP via Getty Images)

 
 
시간을 좀 돌려 보자. 2020년 여름, 미국 전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위에 대한 백인 기독교 보수파의 반감을 자극하는 동영상이 퍼졌다. 트럼프의 장남도 소셜미디어에서 영상을 공유했고 공화당 내 극우파가 가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영상의 내용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몇몇 시위자가 성경을 찢는 장면이었다. 이 영상이 확산된 과정을 미국 언론들이 추적해, 러시아가 돈을 대고 독일에 본사를 둔 영상매체가 찍어서 퍼뜨린 것임을 확인했다.
 
5년이 지난 지금, 트럼프는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돼 있다. 그의 굳건한 지지기반은 여전히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이다. 올 4월 7일부터 13일까지 미국 성인 약 3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퓨리서치 설문조사에서 백인 복음주의자의 72%는 트럼프가 현재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방식에 찬성한다고 했다. 백인 중에서도 복음주의가 아닌 개신교도들이나 가톨릭 신자의 트럼프 직무수행 지지도는 51%였다. 흑인 개신교 신자,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 혹은 종교가 없다고 말한 이들 사이에서는 지지율이 더 낮았다.
 
종교보다 당파적 차이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대개 공화당 지지자거나 공화당 성향으로 분류된다. 반면 흑인 개신교 신자,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 종교가 없는 성인은 민주당 또는 친민주당 성격의 무당파인 경우가 많다. 백인 복음주의자들과 다른 집단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트럼프 정부의 ‘윤리성’에 대한 평가였다. 69%가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리들의 윤리의식이 우수하거나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전체 국민의 다수인 62%는 트럼프 행정부의 윤리의식이 보통 혹은 나쁘다고 평했고 흑인 개신교도(88%), 종교가 없는 사람(76%),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72%) 대다수는 윤리성을 더더욱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백인 복음주의자 4분의 3은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 정책’을 없애려는 트럼프 정부 조치에 찬성했고 연방정부 축소와 예산 삭감에 찬성했다. 백인 복음주의자의 3분의 2는 관세 인상을 지지했다. 이 또한 다른 인종, 다른 종교 집단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흐름으로 미국 기독교 보수파의 대명사이며 미국 사회문화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다. 18세기 ‘대각성운동’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데 초교파 교회, 오순절파, 침례교파, 감리교, 메논파 등 다양한 교파를 포괄하고 있다. 미국 기독교도의 4분의1 이상이 복음주의 성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개혁과 절제를 옹호한 초창기 복음주의는 흘러간 역사일뿐이며 20세기 중반 이래로 진화론을 거부하고 성경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로 흘러갔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로 대표되는 ‘부흥운동‘에 힘입어 주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1960년대부터 전미 복음주의자 협회를 만들고 잡지를 창간하고 신학교들을 세워 세를 불렸다. 민권 운동과 인종 평등에 반대하면서 기독교 우파로 자리를 잡았고 공화당 보수파의 지지기반이 됐다. 로널드 레이건은 선거 때부터 집권 기간 내내 이들을 활용했다. 2000년대 조지 W 부시 정부는 이라크와 아프간인들 수십만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놓고서는 여성의 낙태권을 줄이고 줄기세포 연구를 막는 것을 ‘생명 중시(pro-life)’로 포장했는데 그 역시 복음주의 기독교 우파에 경도돼 있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폭력이 21세기 첫 10여년 동안 세계를 휩쓸더니 최근 10년여 사이에는 기독교 극우파가 세계 곳곳의 이슈가 되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뿐 아니라 유럽의 기독우파들 또한 학자들의 분석 대상이다. 반이민, 반이슬람을 내세운 유럽 극우들의 준동이 기독교 우파의 부상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드러진 이슈가 되기 이전, 수십년 전부터 기독교 우파는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해왔다. 때로는 연립정부에 이념적으로 스며들거나(이탈리아,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기존 중도온건파 주류에 도전하거나(독일) 극우 정당과 협력 혹은 결탁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유럽 정치 지도를 다시 그려온 것이다.
 
특히 헝가리나 슬로바키아처럼 유럽연합 정치지형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던 동유럽 국가들에서의 부상이 눈에 띈다. 젠더나 이주나 복지 이슈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후퇴시키고 있는 이들은 2000년대와 2010년대 글로벌 이슬람주의 운동과 일종의 거울상을 만들고 있다. 외국인 혐오와 반무슬림 정서를 결합한 극우파의 약진 뒤에 이런 기독교 우파들이 있다.
 
이들의 태도는 유럽의 전통적인 ‘기독교 민주주의’와는 많이 다르다. 2차 대전 이후 유럽 기독교와 기독교 민주당 계역의 정당들은 여러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베르 슈망과 장 모네 같은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엄성, 사회 통합, 평화의 원칙을 세워 유럽연합의 토대를 닦았다. 종교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세속화 속에서도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유럽 주류 기독교는 계속 정치에 영향을 미쳤고, 문화적 보수주의와 사회적 진보 사이에서 진폭을 조절해왔다. 프랑스의 엄격한 ‘라이시테(laïcité, 정교 분리)’부터 독일 기독민주연합(CDU) 같은 협력 모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국교회’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국가의 관계는 다양한 모습을 띄었지만 교회는 세속 국가와 대화하면서 종교적 관용과 사회적 포용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 우파가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에 반대하면서 유럽의 기독교 민주주의 전체를 흔들고 있다. 이탈리아의 지오나단 로 마스콜로 같은 학자는 이들을 유럽 기독교의 후계자라기보다는 고도로 정치화된 형태의 새로운 보수 기독교로 보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문화 전쟁에서 양분을 얻어 기독교 민주주의를 양극화된 정치로 몰아가고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미국 기독교 우파 단체들이 유럽의 동료들을 전략적으로 지원하고 자금과 이념적 틀을 제공해왔다. 특히 유럽에서 기독교 우파의 입김이 강해진 영역이 반젠더, 반낙태, 반페미니즘인데 여기에는 미국 기독교 우파 단체의 유럽 지부나 네트워크 조직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미국과 차이 나는 유럽 기독교 우파의 가장 큰 특징은 교파 간 협력이다.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이 여러 교파 내의 우익 급진파들이 손을 잡은 것이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이 다른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는 거리가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역할이다. 러시아 권위주의 정권과 연계된 정교회 조직은 돈과 영향력을 한껏 끌어다 유럽 내 초국가적 기독교 우파 조직을 키우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이런 이상한 동맹은 기독교 급진파와 결합된 극우 세력이 득세하게 해주는 요인 중 하나이며 프랑스와 동유럽 극우파들의 친러, 친크렘린 성향에도 반영돼 있다. 폴란드에서는 2015~2023년 집권한 법과정의당(PiS)은 기독교 우파 싱크탱크와 결탁해 성소수자 권리를 축소하고 낙태를 사실상 금지시켜 유럽연합과 갈등을 빚었다.
 
기독교 우파들의 캠페인은 정보기술과도 결합했다. 스페인의 한 단체는 2013년 ‘시티즌고(CitizenGO)’라는 다국어 청원 플랫폼을 만들어서 보수적 가치를 홍보하고 국경을 넘어 지지자를 모은다. 브라질의 낙태권 반대부터 슬로베니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에 대한 청원이 이 사이트에 올라온다. 
 
이런 선전전은 기존 미디어와 문화적 공간으로 침투했다. 교회와 극우의 결탁이 두드러진 나라 중의 하나가 영국이다. ‘증오 대신 희망(Hope Not Hate)’라는 이름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정치의 극우주의는 법적으로 금지된 신나치 단체에서부터 주류 정치 내의 흐름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특히 보고서가 주목한 것은, 정치인들의 대중 연설에 나타난 극우적인 주장들이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견해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테면 보수당 정권의 내무장관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민주주의 자체의 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들로는 반이민을 내세운 민족주의, 백인우월주의,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노숙자나 부랑아를 범죄자 취급하는 것, 낙태 클리닉 앞에서 시위를 하거나 직원들을 협박하는 행위, 여성을 통제하고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보고서는 이를 ‘극우 담론의 주류화’로 표현한다. 때로 이런 내용은 반유대주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반대로 이스라엘의 불법행위들을 옹호하는 시오니즘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 반이슬람 음모론 등 다양한 형태를 갖는 극우 담론은 시민들을 ‘증오의 상태’로 이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인 2만5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12~34%가 다양한 음모론을 믿고 있었으며, 음모론 신봉이나 ‘증오의 상태’는 무슬림 등 외부인들의 ‘위협’에 맞서 ‘기독교적 과거’를 회복하려는 믿음과 연결돼 있었다. 2015년 총선을 앞두고 극우파 영국독립당(UKIP)은 '우리의 기독교 유산 가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서문에서 당시 당 대표 나이절 패라지는 “영국은 우리의 기독교 유산과 기독교 헌법을 강력 방어해야 한다. 그런데 영국의 주요 정당 가운데 유대-기독교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정당은 우리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1년 전에는 ‘영국 우선주의’라는 정치단체 회원들이 성경을 들고 모스크들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기독교 십자군’이라 불렀다.
 
종교학자들은 냉전 시기 강력한 세속주의에 묻혀 있던 종교적 현상들이 1970년대 말부터 ‘부흥’하기 시작해 탈냉전 이후 다시 세계의 주된 정치적 현상으로 되살아났다고 지적한다. 어떤 이들은 세계화 흐름 속에서 흐릿해져가는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구가 종교의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반면 영국 종교사회학자 롤랜드 로버트슨은 이처럼 전 지구적으로 종교가 부활한 것을 단순히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나 반응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창조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쪽의 해석이든, 종교를 기반으로 세속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흔드는 현상이 글로벌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불법 계엄으로 탄핵당한 대통령을 ‘지키겠다’면서 성조기와 이스라엘 깃발을 흔드는 한국의 극우들 역시 그런 지구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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