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 이베리아 반도 정전과 ‘블랙 스타트’

딸기21 2025. 5. 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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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8일 낮에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대부분 지역에 약 10시간 이상 전력 공급이 끊어졌고 통신, 교통 시스템, 병원 및 응급 서비스 등 대란이 벌어졌다.

 

특히 포르투갈의 피해가 컸던 듯하다. 정전으로 결제서비스는 거의 막혔고, 병원은 비상용 발전기를 돌려야 했고, 신호등과 교통시스템이 중단돼서 사고도 났다. 통근 열차와 고속철도 전부 운행을 중단했고전기 버스, 공유자전거, 트램도 몽땅 멈췄다. 리스본 공항도 8시간 이상 항공기 이륙이 중단됐다. 정부는 비상 각료회의를 열고 에너지 위기를 선언했다. 루이스 몬테네그로 총리는 전기시스템 감사를 유럽연합(EU)에 요청했다.

 

El apagón general en España ha pillado desprevenidos a los usuarios de Metro de Madrid. EFE/MARISCAL

 

 

스페인에서도 열차가 모두 멈췄다. 3만5000명이 철도 안, 지하도 안에 고립됐다가 구조됐다. 기업과 상점들이 문을 닫고, 은행도 업무를 중단했다. 경찰이 대거 거리에 배치돼 교통을 통제했다. 일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처럼 공포가 퍼졌지만 다행히 큰 혼란은 없었다. 하지만 기업 경영자 단체는 정전으로 16억 유로 이상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정했다. 스페인에서는 원전 안전도 관건이었는데 별 탈은 없었다. 전력망(그리드)에 이상이 생기자 원자력발전소들은 자동으로 전력망에서 분리됐다. 당시 4기의 원자로가 전력을 생산하고 있었고 3기는 정기 유지 보수 중이었는데 백업 발전기가 자동으로 냉각수를 공급, 이상은 없었다.

 

두 나라 말고도 정전 영향 받은 곳들은 더 있었다. 피레네 산악지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안도라 공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면적 467제곱킬로미터(서울 면적 4분의3), 인구 8만7000명의 작은 나라다. 여기도 전기가 끊겼는데 몇 초만에 복원됐다고. 전력망이 스페인, 프랑스 모두와 연결돼 있는데 자동복구시스템이 곧바로 안도라의 그리드를 프랑스 전력망에 연결했다. 다만 일시적으로 통신이 중단되긴 했다. 프랑스에서는 스페인 접경지대 바스크 지방에서 몇 분 동안 정전이 있었다.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는 오렌지스페인이라는 인터넷 회사의 서버가 잠시 불통됐고 덴마크령 그린란드에서도 스페인쪽 전력망에 의존하던 통신회사가 잠시 서비스를 중단했다.

 

사망자도 나왔다. 스페인에서 최소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내 발전기에서 일산화탄소가 나와 일가족 3명이 숨진 사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부부와 아들이 사망했는데 부모 중 한 명이 환자여서 기계식 인공호흡기를 쓰기 위해서 발전기를 돌리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던 46세 여성이 사망하기도 했고, 마드리드에서는 촛불을 켰다가 불이 나 한 명이 숨졌고 여럿이 다쳤다.

 

복구는 10~12시간만에 거의 다 됐다. 태양광 발전과 천연가스 발전이 단계적으로 재가동됐고 원전과 석탄발전은 완전히 중단됐다가 역시 복구됐다. 29일 새벽에는 원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 운영됐고, 프랑스로의 전력 수출도 재개됐다. 포르투갈에서는 수력발전댐과 천연가스 발전소를 돌려 사고 발생 10시간 뒤부터 가구 절반에 전력을 공급했고, 자정 넘어서는 그리드가 완전 복구됐다.

 

대규모 정전치고는 복구가 빨랐다. 이번 정전을 계기로 '블랙스타트'의 중요성이 새삼 거론된다. 전원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전력망을 재가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력망이 국가 차원, 혹은 여러 국가들을 포괄하는 지역 차원에서 거대 규모로 가동되기 때문에 대형 정전이 발생할 위험도 커진다. 갑자기 정전이 발생하면 소규모 발전장치가 가동돼 독립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것을 블랙스타트라 한다. 더 넓은 범위의 전력망에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시동을 걸어, 전압과 주파수를 안정권으로 올리는 거다. 전체 송전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재가동해 그리드가 완전히 되살아날 때까지 개별 지역들을 연결한다. 

 

이번 이베리아 정전에서 스페인(REE)과 포르투갈(REN) 전력회사는 매뉴얼대로 블랙스타트 절차를 밟았다. 먼저 블랙스타트 시설을 활성화, 전력 ‘섬’을 만들었다. 그리드 전체가 끊어졌지만 먼저 전기를 되살리는 매듭들을 만든 것이다. 이 섬들에서 전압과 주파수가 안정적으로 확보된 뒤에는 섬들끼리 연결해 전력 그물의 몇몇 구간들을 재건했다. 안정적인 구간들이 늘어나자 원자로, 복합 가스터빈 등 대형 발전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블랙스타트는 일종의 마중물이다. 그런 독립적인 발전 시설을 미리 확보해놓고 있는 게 중요하다. 초기 대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독립적인 발전시설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력발전소나 가스터빈, 혹은 전력망 중요 지점에 전략적으로 배치된 디젤 발전기 등을 활용한다. 일각에서는 ‘그래서 화석연료 시설들도 일단은 계속 두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앞으로는 전력 저장장치(배터리)나 바이오연료 발전기 같은 것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1) 현재로선 블랙스타트에서 제일 활용도 높은 게 수력발전소다. 특히 저수지나 양수 발전소가 있는 수력발전소는 발전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초기 전력이 적게 필요하다고 한다. 소형 배터리시스템이나 보조 디젤엔진을 이용해 적은 양의 에너지만 확보해도 취수문을 열고 발전기를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발전을 시작하면 다른 마중물 설비보다 전력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으면 몇 분 안에 휴면 상태에서 발전 상태로 전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번에 포르투갈이 수력발전소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2) 가스 터빈, 특히 재빨리 가동할 수 있는 소형 터빈들도 이번 정전 복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배터리나 압축 공기 스타터를 가지고 최소한의 전력을 먼저 공급한 뒤 내부 터빈을 돌려서 발전 모드로 전환한 것이다.

 

3) 더 국지적인 규모에서는 소형 디젤 발전기를 가지고 비상 전력을 공급한다. 스페인의 경우 용량이 보통 10메가와트 이하로 규정돼 있어서발전량은 제한적이지만 비축된 디젤 연료와 점화를 위한 소형 배터리 팩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비상 전력공급에 유용했다. 디젤 발전기로 일단 소량의 전기를 생산해서 지역 변전소에 전력을 공급하고 발전소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대형 발전시설이나 원자력 발전소는 복원력이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 복합 가스 발전소, 석탄 또는 바이오매스 화력발전소는 원자로 냉각 펌프, 급수 시스템, 제어 장비 등의 보조서비스를 외부 전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블랙스타트가 없으면 속수무책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지침에 따르면 원전은 일반적으로 전력망에 재연결되기 전에 총 정격 출력, 즉 최대 생산용량의 약 10%에 해당하는 전력이 필요하다. 가스 터빈과 증기 터빈을 모두 사용하는 복합화력발전소도 급수 펌프와 보조 장비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정격 출력의 5~10%가 필요하다. 이런 대형 발전소들을 돌리기 위해서 먼저 가동돼야 하는 게 블랙스타트다.

 

정전이 일어난 원인은 아직 파악 중이다. 스페인 전력공사(REE)에 따르면 보통 정전 시간대에 32기가와트를 생산해서 25기가와트를 소비하고 7기가와트는 프랑스로 수출하는데 이날 태양광 발전량이 평소의 절반 수준인 15기가와트로 떨어졌고 수출이 중단됐다. 정전 직전에 프랑스 남부에서 화재가 일어나서 초고압 전력선이 손상을 입었다. 그게 원인이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상관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원인은 아직 조사 중인데 가짜 뉴스와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이라더라, 대기 진동이라는 기상이변 때문이라더라… 현재로선 사실과는 무관한 것 같다. 스페인 사이버 보안기관 INCIBE이 해킹 공격 가능성을 조사한 뒤 개연성이 낮다고 밝혔다.

 

스페인 정부는 생태 전환부가 주도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일각에선 늘 그렇듯 ‘이게 다 재생에너지 때문이야’라는 주장이 나온다. 스페인의 태양광, 풍력 발전이 늘어났는데 전력망 전체가 발전량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화석연료 좋아하는 사람들의 근거 없는 비난인 것 같다. 29일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재생 에너지가 정전을 일으켰다는것은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이번 정전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수는 약 5500만명이라고 한다. 과거에도 이런 대규모 정전이 일어난 적은 많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 숫자로 보면 제일 컸던 것은 2012년 7월 인도에서 일어난 정전이다. 이틀간 전력이 끊겨 무려 6억2000만명이 피해를 봤다. 그 이웃 파키스탄은 2023년 1월에 2억4400만명, 인구 99%가 정전을 겪었다. 규모로 봐서 3위는 다시 인도다. 2001년 1월에 2억3000만명이 정전을 겪었다. 4위와 5위는 방글라데시다. 2014년 11월 1억5000만명, 2022년 1억4000만명... 인구 80% 이상 정전 피해를 입었다. 6위는 또 파키스탄이다. 2015년 1월, 1억4000만명이 불편을 겪었다. 인구 많고 인프라 낙후된 남아시아 국가들이 대규모 정전 단골 국가들인 셈이다.

 

그 다음 7위가 인도네시아 자바의 2019년 정전, 8위도 2005년 인도네시아 자바-발리 정전이다. 9위는 1999년 브라질 남부 정전, 10위는 2015년 터키 정전. 11위는 2009년 브라질-파라과이 정전이었다. 유럽에서는 2003년 이탈리아 정전이 컸다. 5600만명의 전력이 끊겼다. 그리고 이번 이베리아 반도 정전이 역대 13위 규모였다.

 

전력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전력망 규모는 점점 커진다. 정전을 막는 게 제일 중요하겠지만, 복원력도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 이번 정전… 다국적 전력망에 연결돼 있는 것이 사고 범위가 넓어지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이베리아 반도 정전에서 전기가 빨리 복구되게 해주는 역할도 했다.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스페인과 마주보고 있는 모로코에서 900메가와트가 스페인으로 왔는데, 그게 아주 중요한 마중물이 됐다고 한다. 평소 스페인으로부터 전기를 수입하던 프랑스도 비상 상황에서 스페인으로 송전을 했다. 독일에서도 남는 전력을 이베리아로 보냈다. 유럽 전력전문가들은 이번 정전 뒤 1) 전력망의 복원력 면에서 국제적인 연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 2) 지리적으로 분산된 다양한 블랙스타트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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