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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 태국, 동성결혼 합법화…정치적 민주화와 ‘관용‘

딸기21 2025. 1. 2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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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1월 23일부터 동성 결혼이 허용됐다. ‘결혼평등법’은 이미 통과됐고, 2024년 9월 24일 왕실 승인을 받았다. 이 법에 맞춰서 내무부가 ‘가족 등록에 관한 규정’을 새로 만들어서 왕실 관보에 게재했다. 

방콕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내무부 가족등록규정(No.4) BE 2568(2025)은 남성과 여성, 아내와 남편 같은 표현들을 ‘사람’ ‘약혼자’ ‘배우자’ 등으로 교체했으며 태국인들은 전국의 혼인 등록 부서와 세계 94개국 태국 대사관, 영사관에 혼인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미 법 발효를 앞두고 동성 결혼 등록을 준비하며 리허설까지 했다고 한다. 

 

'동성 결혼' 혹은 '시민 결합' '시민파트너십' 등 여러 형태를 포괄해, 동성 간의 법적 결합을 합법화한 나라는 태국을 포함해 세계 38개국에이른다. 현대 들어와 합법적으로 결혼한 세계 최초의 동성 커플은 1971년 9월 미국 미네소타에서 결혼한 남성 커플이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합법화한 것은 2001년 법안을 발효시킨 네덜란드가 처음이었다. 아시아에서는 대만에 이어 태국이 두번째다. (위키피디아는 동성결혼 항목에서 “세계 선진국들은 대부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일본, 한국, 체코 정도가 예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www.bangkokpost.com

 

반면 나이지리아, 러시아 등35개국은 결혼을 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으로 헌법에 규정함으로써 아예 동성 결혼의 길을 막고 있다. 일부 이슬람 국가들은 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헌법을 갖고 있는데, 동성혼을 금한다고 명시하지 않았더라도 율법이 동성혼을 금지한 것으로 해석한다. 헌법에 이성 간 혼인을 규정한 나라들 중에 일부 국가들, 그리고 이슬람 율법을 적용하는 나라들 대부분은 동성 결합은 물론이고 동성애 자체를 범죄로 규정한다.

 

태국은 자유로운 관광지 이미지도 있지만 반대로 군사 정권이 오래 유지됐고 왕실도 있다. 보수적인 분위기일 것 같은데 어떻게 동성 결혼이 인정을 받았을까. 최근 몇 년 상황을 정리해보면 2023년 11월 여야 모두의 지지 속에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됐다. 2024년 3월 하원에서 찬성 400표, 반대 10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통과했다. 6월에 상원에서 통과될 때에도 찬성 130표, 반대 4표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논의가 있었다. 2011년 9월 성소수자 단체들의 연합체인 ‘성적 다양성 네트워크(Sexual Diversity Network)’와 국가인권위원회(National Human Rights Commission, NHRC)가 정부에 동성결혼 합법화를 촉구했다. 2012년 12월, 잉럭 친나왓 총리 정부가 동성커플을 시민파트너십 형태로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법무/사법을 관할하는 정부 부처인 ‘권리와 자유 보호부’는 2013년 2월 첫 공청회를 열었다.

 

Passage of the four draft Bills paves the way for the formation of a committee to merge the four Bills into one ahead of further debate and votes expected in 2024. PHOTO: REUTERS

 

 

하지만 10년도 더 전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합법화 논의는 오랫동안 제자리 걸음을 했다. 잉럭 총리 때 시작해 2014년까지 2년에 걸친 논의를 통해 시민파트너십 법안이 만들어졌고 초당적 지지를 받았지만 문제는 정치 불안이었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의회가 제 기능을 못했던 것이다. 2017년, 시민 6만명이 동성 시민파트너십을 합법화하라는 청원을 했다. 권리자유보호부는 2018년 다시 법안 논의를 시작했다. 법안 이름은 ‘동성 생활 파트너십 등록 법안(Same Sex Life Partnership Registration Bill)’.으로, 동성 커플이 "인생의 동반자"로 등록할 수 있게 했다. 그 해 말 정부가 법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다시 격변이 일어났다. 2014년 쿠데타 이후 군부정권의 5년에 걸친 계엄 통치 뒤 2019년 선거가 실시됐는데 이 때 팟아나콘마이(Future Forward)라는 신생 정당이 바람을 일으켜 제3당으로 부상했다. 겁이 난 군부와 보수 정치세력은 이 정당을 해체시켜버렸다. 당시 이 정당의 정책 중에는 평등 결혼을 지지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이 정당의 돌풍과 보수세력의 탄압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 LGBT 활동가들의 참여가 많았고, 정치권도 결국 이런 요구를 받아들였다(2024년 말 이후 한국의 윤석열 내란에 저항하는 시위에서 성소수자들의 발언이 많았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2019년 선거에 따라 구성된 정부가 2020년 7월 법안 초안을 승인하고 국회 제출했다. 그러나 여전히 통과가 미뤄졌다. 의회에서는 법안이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2021년 헌법재판소는 혼인을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것으로 정의한 민법과 상법 조항이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의회에서 다시 논의가 본격화됐고 2022년 6월 두 개의 법안이 의회에 제출됨. 당시 정치개혁을 주도한 전진당이 제안한 것이 결혼평등법(Marriage Equality Bill)이었으며 이와 별도로 정부는 시민 파트너십 법안(Civil Partnership Bill)을 제출했다. 두 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결혼 평등법안은 동성 결혼도 남녀 간 결혼과 똑같이 다루자는 것인 반면 정부 법안은 시민 파트너십을 별도의 범주로 도입해서 결혼한 커플과 비슷한 권리를 주자는 것이었다.

 

2023년 친탁신 계열 푸어타이당 정부로 바뀌는 또 한 차례의 정치적 드라마가 펼쳐졌다. 새 정부는 동성 결혼 법안을 승인하기로 결정했고, 정부 법안과 전진당 법안을 비롯해 총 4개의 안을 놓고 검토했다. 네 법안 모두 의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으며 작년에 의회는 임시 위원회를 구성해 네 법안을 하나로 통합한 결혼평등법(กฎหมายสมรสเท่าเทียม, Kotmai Somrot Thao Thiam)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탁신 전 총리 딸인 패통탄 친나왓 총리는 1월 15일 인스타그램에 “2025년 1월 23일은 우리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고, 모든 사람의 사랑이 명예와 존엄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날이 될 것"이라고 적었으며 여러 동성 커플을 정부 청사로 초청해 축하했다. 마침내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자 성소수자 공익옹호단체 방콕 프라이드(Bangkok Pride) 등은 당연히 환영했다. 이 단체는 1448쌍이 참여하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 간의 여론조사로 보면 태국인들은 일관되게 동성 결혼을 인정하라는 쪽이었다. 2019년 유고브 설문조사에서는 63%가 합법화를 지지했다. 2022년 정부 산하기관 여론조사에서는 지지 응답이 80%로 올라갔다. 정부와 여야가 공동으로 법안을 구체화한 2023년 10~11월 조사에서는 태국 국민의 96.6%가 법안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독 태국이 동성 결합에 긍정적인 이유가 뭘까. 다들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다. 영국 BBC는 "태국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LGBT)에게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나라"라면서 태국 특유의 문화를 소개했다. 태국어로 ‘마이 펜 라이(Mai pen rai)’라는 말이 있는데, 번역하면 “괜찮아”, “그냥 둬” 이런 뜻이라고 한다. 이런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종교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가톨릭, 개신교, 정교 등등 기독교나 이슬람은 성소수자에 몹시 배타적이다. 하지만 태국인들은 90% 이상이 불교도이며 불교는 동성 결혼에 딱히 반대하지 않는다. 물론 태국에서도 25년 전 성소수자 프라이드 행진이 처음 시작되고 몇 번 이뤄지는 동안 폭력 위협이 벌어지는 등 사회적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회 전반의 관용적인 태도에 비해, 동성 결혼 합법화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됐던 것은 관료사회의 거부감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성소수자들에 관용적인 것이 관광산업, 문화산업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2001년 유명 배우들이 동성애 관계였던 사실이 드러나자 이들이 주연하는 TV 드라마 상영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성소수자들을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캐릭터로 묘사한 드라마나 영화가 많다. 그뿐 아니라 요즘에는 적극적으로 성소수자를 주연으로 한 드라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태국 게이 로맨스물이 인기를 끌어서 한국에서도 인터넷 통해 시청자가 많이 늘었다. 

 

2022년 프라이드 행진이 재개되고, 정부가 LGBT 여행객에게 매력적인 여행지로 태국을 홍보하도록 한 것도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인도에서도 동성결혼 놓고 논쟁이 벌어진 적 있었다. 당시 인도도 합법화 쪽으로 성큼 다가섰으나 대법원이 법적 금지를 유지하면서 의회로 공을 넘겼는데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태국은 이번에 동성결혼을 허용하면서 아시아에서 ‘성소수자 친화적인 관광지’임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태국 경제가 살아나는 데에 관광업이 더욱 중요해졌다. LGBT들이 환영받는 안전한 휴가지임을 강조할뿐 아니라, 아시아 다른 나라의 동성 커플들에게도 ‘이성애 커플들이 누리는 거의 모든 권리와 보호를 인정받으면서 아이를 키우고 늙어갈 수 있는 나라’로서 정착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전파될까? 2022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 여론조사에서 태국 국민의 60%가 동성 결혼을 지지했다. 지지율은 종교에 따라 달랐다. 불교도가 68%로 가장 높았지만, 이슬람교도의 지지율은 14%로 가장 낮았다. 동남아 6개국을 대상으로 한 당시 조사에서 동성결혼 지지율은 베트남이 65%로 가장 높았고 이어서 태국, 캄보디아(57%), 싱가포르(45%) 순서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과 불교국가들이 확실히 관용적이었던 반면 말레이시아(17%), 인도네시아(5%)는 동성결혼에 적대적이었다. 종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아시아 다른 나라들로 동성결혼 합법화 조치가 이른 시일 내에 확산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같은 나라들은 성소수자 차별은 물론이고 범죄로 규정해 기소하기도 한다. 이슬람 왕국인 브루나이에서는 남성 간의 성관계는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범죄다. 필리핀에서는 성소수자 커플이 공개적으로 동거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례가 늘고 있으나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동성 결혼을 격렬히 반대한다.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도 성소수자들에게 관용적이지는 않다. 베트남에는 태국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장애물은 없는 편이지만 정권이 억압적이다. 성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법을 바꾸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 3기에 들어오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억압 강도가 높아지고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부활시키는 움직임이 커졌다.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싹부터 자르고 있는 중국은 성소수자들도 탄압하고 체포, 구금하곤 한다.

 

BBC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조차도 정당들이 대체로 보수적이고 나이 든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전망이 어둡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경우 보수 기독교인들이 걸림돌이다. 특히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많고 이들이 동성 결혼을 ‘좌파적 의제’로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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